양연산방의 소장일기. 1
1. 겨울의 소소한 재미, 매화감상.
예로부터 동지를 겨울의 시작이라 하였다. 그래서 옛 문인들은 동지를 시작으로 봄날까지 매화의 꽃망울을 하나씩 그려 겨울을 보냈다고 한다. 이를 구구소한(九九銷寒)이라 하며 동짓날부터 81일이 지나 그려낸 매화를 감상하였다. 그러나 81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길기에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한매(寒梅)를 분재로 키우며 추운 겨울을 보내는 문인들도 있었다. 이렇듯 옛 문인들은 매화를 겨울을 이겨내는 군자로 여길 정도로 매우 아꼈으며 분재가 없는 문인들은 매화를 그린 그림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었다.
올겨울도 반쯤 지났지만, 그래도 아직은 겨울의 쨍쨍한 한기가 창밖 너머에 들어온다. 아쉽게도 분재로 된 매화는 없고 그렇다고 81일 동안 그리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아깝기에 매화 그림 한 점을 꺼내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2. 구당 이재범(九堂 李範載, 1910-1993)의 묵매도.
구당 이범재(九堂 李範載, 1910-1993)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근현대기에 호남에서 문인화가로 명성을 올린 인물이다. 그는 청년 시절 연진회 창립회원 활동으로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에게 지도를 받았다. 해방기 이후부터는 국전(國展)을 중심으로 참여하여 문인화의 기틀을 다졌다.
그림을 보면 큰 수목의 일지(一枝)에서 여러 일지(一枝)가 솟아오른 형태의 매화이다. 매화의 큰 일지를 곡선으로 좌우를 틀어 마치 용이 꽈리를 트는 모양이다. 하단과 중반 부분에 먹으로 태점(苔點)을 찍어 매화가 단순한 나무가 아닌 큰 고목이라는 점을 강조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가지에 꽃을 위를 향하는 방향으로 피어 화사한 매화의 은은한 향이 올라오는 듯한 시각적 연출도 주고 있다. 농담(濃淡)의 먹 조절로 꽃잎과 나무와 가지 등을 나눠 사물의 사실감까지 넣어주었다. 더불어 먹의 농담(濃淡)으로 나타내었기에 한겨울에도 감상하기에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농담(濃淡)의 먹 조절로 충분히 매화의 고아(古雅)함을 나타내었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스승인 의재 허백련의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점에서 스승과 닮아서 좋지만 반대로 스승의 화업(畫業)은 이어갔지만 기질(器質)은 넘어가지 못한 점이라 다소 아쉽다고 느낀다.
구당의 경우 습윤한 먹으로 큰 수목의 일지(一枝)를 그린 뒤 곁가지를 올려 매화꽃을 피웠다. 마치 한겨울에 조그마한 꽃송이를 올린 한매(寒梅)의 특징을 보인다. 반면 의재의 경우 습윤한 먹으로 가지의 바탕을 올렸지만, 갈필(渴筆)로 중심을 이루고 농묵(濃墨)으로 곁가지를 올려 매화를 그렸다. 아마 의재는 구당처럼 겨울에 피는 한매(寒梅)가 아닌 겨울을 이겨내 봄을 만끽하여 피어난 춘매(春梅)를 그린 것 같다. 구당의 경우 매화의 고아함을 나타내었으며, 의재는 매화의 청초(淸楚)함을 담아내었다.
스승의 화법(畫法)은 이어갔지만, 기질을 넘지 못하여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매화라는 군자(君子)의 기질을 잘 담아내어 그림을 감상하는 데 부족함은 없다.
3. 구당이 그린 임포의 매화.
구당이 그린 묵매도(墨梅圖)를 보면 그림 상단에 화제(畫題)가 유려하게 쓰여있다. 화제의 공간도 그림이 끝나는 부분의 상단에 자리를 잡고 있어 그림을 감상하는데 어울림을 주고 있다. 공간을 탁월하게 배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화제의 내용을 보면 송나라 문인 임포(林逋, 967∼1028)의 매화를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화제를 보면 "홀로 서호처사의 시를 읊으니 해마다 서호의 고운 매화를 본다(自讀西湖處士詩 年年臨水看幽姿)."라 적혀있다.
여기서 나오는 서호처사(湖處士詩)는 앞서 말한 임포(林逋, 967∼1028)를 말한다. 임포는 항주 출신의 문인으로 관리 생활을 마치고 항주 서호로 내려와 집을 짓고 사방에 매화를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鶴)을 잘 길러 학의 아비라는 별칭까지 지어졌다. 그래서 임포를 다른 말로 서호처사(湖處士詩)와 함께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묵매도(墨梅圖)의 화제를 자세히 해석해보면 임포의 시를 읽다 보니 해마다 정성스레 매화를 가꾸는 처사처럼 성정을 다하여 매화를 그려본다는 의미이다. 임포가 물심양면(物心兩面)을 다하여 매화를 길렀듯이 붓을 잡은 구당도 심상(心象)을 집중하여 매화를 그린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겨울에 감상하기에 아깝지 않은 매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