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연산방의 소장일기. 2
1. 문인의 벗, 난(蘭).
매난국죽(梅蘭菊竹) 네 가지 식물을 먹으로 그린 그림을 사군자(四君子)라 하며 문인들이 즐겨 그려 문인화(文人畵)에 대표하는 소재들이다. 난초의 경우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의 시 <이소(離騷)>를 보면 난초의 향을 피우기까지 굴절이 있듯이 군자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구절이 보인다.
그래서 문인들은 난초의 향기를 즐기기 위해 애중(愛重) 하게 가꾸었다. 분재로 난을 가꾸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우므로 그림으로 난을 감상하거나 혹은 난을 그리는 과정을 수행으로 여겨 심신의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였다.
2. 온재(溫齋) 한규복(韓圭復, 1881-1967)의 석란도(石蘭圖).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는 잃고 제도는 자발적 근대가 아닌 제국의 체제하에 근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술도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변화되어 동서양의 절충된 서화(書畫)가 새롭게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어지러운 형국에서도 옛 구식의 기법으로 그리는 서화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온재(溫齋) 한규복(韓圭復)이 그린 석란도(石蘭圖)를 보면 당시의 서화를 그리는 시대상을 단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정묘년(丁卯年)인 1927년에 그린 그림으로 국치를 맞은 지 17년이 지난 시기다.
온재(溫齋) 한규복(韓圭復, 1881-1967)의 경우 1899년 4월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 보통강습소(普通講習所)에서 기초교육을 받고 1900년 와세다(早稻田)대학 입학하는 등 국운이 쇠하는 시기에 이름을 날린 엘리트 인물이다. 구국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행적은 일제치하에서 경상북도참여관, 충청북도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이외에도 내선융화를 주창하는 친일단체 동민회의 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신념형 친일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관료 생활 이외 서예와 문인화에 상당한 작품을 남기는 등 서화가로서 활동도 병행하였다.
그가 그린 석란을 보면 바위를 중심으로 위, 아래에 난초가 운집되어 있다. 바위가 있어서 석란(石蘭)이지 군집란(群集蘭)이라 해도 무방한 그림이다. 먹의 농도도 윤택하여 난의 꽃과 대가 농묵(濃墨)과 담묵(淡墨)으로 나뉘어 있다. 난의 꽃대가 촘촘하게 잡혀있어 난잡해 보일 수 있지만, 먹이 윤택하기 때문에 난의 그윽함으로 느껴진다. 바위 부분도 아래쪽은 난초가 있어 공란을 여백이 아닌 먹으로 채웠으며 바위 윗부분은 암석의 표면을 먹으로 채워 실제 바위와 난초의 자생상태를 나타낸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산수화와 초상화가 아닌 문인화에도 명암법(明暗法)이라는 사실성을 나타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소재와 기법에 근대적 미감인 명암이 혼합된 그림인 것이다.
3. 소호와 운미가 결합된 온재(溫齋)의 석란도(石蘭圖).
절충된 기법으로 그렸다고 해서 그의 그림이 독창성이 있는 그림이라 할 수는 없다. 자세히 보면 동시대 묵란을 즐겨 그린 인물들의 화법을 가미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1855-1921)과 운미(雲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묵란(墨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호(小湖)에 경우 추사에게 묵란을 배운 이하응에게 난초를 배웠다. 운미(雲楣)의 경우 이하응처럼 직접 추사에게 배운 것은 아니지만 초년에는 추사파에서 묵법(墨法)을 배우고 상해로 넘어가 상해화차(上海畫派)의 화법(畫法)을 받아드려 새롭게 묵란을 개척하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는 일지일화(一枝一化)의 춘란이 아닌 꽃대에 여러 꽃이 피는 혜란(蕙蘭)이며 밀집된 군란(群蘭)의 형태로 그렸다. 차이점이 있다면 소호의 경우 난잎을 곡선으로 날카롭게 뽑았다. 운미는 유하게 길게 난잎을 쳤으며 난의 꽃대가 길게 뽑았다.
소호(小湖)와 운미(雲楣)가 그린 난초를 보다가 온재(溫齋) 한규복(韓圭復)의 석란(石蘭)이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분히 두 사람의 화법을 연마한 노력의 결과물로 보인다, 그러나 화법(畫法)을 이루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듯 결코 쉽게 그린 그림은 아니다. 바위에 난초를 배치하는 비율과 먹의 농도만 보더라도 상당히 심혈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온재(溫齋)가 그린 석란(石蘭)을 통하여 1920년대 문인화가 전통시대와 달리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알 수 있으며 더불어 소호(小湖)와 운미(雲楣)의 묵법(墨法)이 당시 서화인(書畫人)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 수 있는 사료적으로 볼만한 그림이다.
4. 치욕의 산물.
친일파가 남긴 유묵(遺墨)이라 과연 진득하니 감상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치욕스러운 역사도 기억해야 되풀이되지 않는다. 더불어 그들이 남긴 행적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앞서 말했듯이 사료적으로 시대성을 갖추었기에 간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