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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소나기

이 바보야!!

by 조르바

소나기가 내린다. 불멍 하듯 소나기를 바라본다. 소나기를 피해 원두막으로 달려가는 소년과 소녀가 보인다. 악다문 입에서 거친 숨소리와 닥닥거리며 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소나기를 봐야겠다. 소나기를 맞아야겠다. 1995년 5월 언제쯤 소나기를 만났을 것이다.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들과 길에서 아카시아 향이 피어나고 저녁 어스름에 논바닥에서 개구리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리며 울어대는 시기일 것이다. 1953년 5월에 소나기는 발표되었다. 6.25 전쟁이 그 해 7월에 휴전했으니 전쟁통에 발표된 것이다. 2025년 6월, 비상계엄으로 대통령이 탄핵되고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나는 휴직을 하고 책을 보며 막연하게나마 소설가의 꿈을 꾸고 있다.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내고 있다.

1953.5/1995.5/2025.6. 숫자를 한참 바라보지만 의미를 찾을 수 없다. 태어나지 않았고, 태어나서 첫 소설을 봤고, 소설을 쓰고 싶다 정도다.

여론조사 결과를 가져오지 않아도, 한국인들에게 소나기는 현실의 소나기만큼이나 강한 영향을 끼친 소설이다. 순수함이라는 대로에서 이탈하여 '잘 쓰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과 공명심 등 각종 잡다한 마음을 씻어내리는 한줄기 소나기를 맞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산 없이 비를 맞으러 갔다.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이 바보야'만 들린다. 소녀와 소년이 두세 번째쯤 만났을 때, 미적지근한 소년에게 소녀가 조약돌을 던지며 한 말이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데 소녀가 내게 조약돌을 던져서 메아리치듯 잔물결이 퍼져나가고 있다. 이 바보야. 이 바보야.

다음 중 소설 소나기의 시점은? 다음 중 소설의 3 요소가 아닌 것은?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 소설은 어때야 하는가?

중학교때와는 문제의 양상이 달라졌다. 객관식이 아니고 서술형이다. Kbs 인간극장에, Mbc라디오 여성시대에 소설이 있어야 하는가? 그보다 그들의 사연을 하루의 일상처럼 보고 들으며, 자신의 슬픔과 비교하며 공감하고 위로받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소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범하지만 살아나가야 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시기하고 질투하며, 사랑하고 연대하며, 후회하고 두려워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

덧없이 살다가는 하나의 생애. 거기에 소설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잔망스러운 소녀의 죽음을, 소년이 부모의 대화에서 엿들었다. 나는 엿들을 것이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순대국밥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며 국밥집에서 일하는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움직임을 살피며, 장광설을 늘어놓는 직장동료의 말에 눈을 한번 마주쳐주고 한 숟갈 뜬 국밥에 능숙한 손놀림으로 깍두기를 올려놓는, 어쩐지 나와 비슷한 구석이 보이는 잿빛 얼굴의 M자 탈모가 있는 중년 남성을 바라보며, 따뜻한 국밥에서 내일을 다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엿들을 것이다.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맹인을 바라보며,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거리며 찾고 모으고 고민하고 끼워 넣어서 이야기를 맞춰가며 맹인의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소녀의 분홍스웨터에 흙물이 들었다. 사람을 더하기 빼기로 만나지 않던 순수한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다시 순수한 마음으로 물들어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다시 비가 내린다. 이번엔 운수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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