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딴. 따. 단.
이천 년대 초반 대학을 다닐 때, 친구와 기차를 타고 다니곤 했다. 당시의 기차 풍경은 지금과는 달랐다. 대합실은 지금처럼 세련되지 못했으며 공간이 좁아 사람과의 거리를 가깝게 해주었다. 전화나 문자 기능 정도만 있었던 핸드폰에 그렇게 매달리지도 않았다. 대신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며, 눈과 눈이 마주치며, 그들의 표정을 읽어내며 내가 아는 사람인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어디로 가는 무리인지를 생각했다. 물론, 예쁜 여자를 찾아다니느라 내 눈동자는 바빴던 것 같다. '기차'를 떠올렸을 때 그 잔상이 '추억', '설렘', '온기', '달걀', '바나나 우유'로 연결될 수 있는 것도 대합실 풍경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차에서 노래는 MP3로 들었다. 많고 많은 노래를 들었겠지만 기억하는 노래는 '캐논 변주곡'이다. 노래뿐만이 아니라 노래가 흘러나올 때의 오감을 기억한다. 친구와 붙어있던 좌석, 오고 가던 속삭임, 바라보는 곳이 같았던 풍경, 열차 통로를 지나가는 청춘들, 한때 청춘이었을 할아버지, 다음 역을 안내하는 차장의 목소리, 공부든 사랑이든 그게 무엇이든 꿈을 꾸고 있던 나를 기억한다. 어느 지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생각했다. 기회가 되면 '캐논 변주곡'을 쳐보리라고.
기회가 왔다. 인생에 세 번 캐논을 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육아휴직을 해서 아이와 피아노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한 달 전, 일 년이면 가능하다는 원장님의 견적이 나왔다. 한 손으로 '떴다 떴다 비행기'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만 칠 수 있었던 내가 이제 두 손으로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며 '종달새'를 지저귄다.
일 년 뒤 캐논을 연주하는 나를 상상한다. 딴. 딴. 따. 단. 도입부를 들으면 기차가 터널로 빠져들듯,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멋쩍음을 센 척으로 희석시킨 개강파티, 경영학개론의 그 시절 수지, 저녁 어스름만 되면 쫓아다녔던 술자리, 공강을 기다리게 했던 당구장, 잔디밭, 연못, 숨을 죽이고 확인했던 그 친구의 문자 답장, 나만 안되던 연애, 빨간 염색이 탈색되어 남아있는 친구의 촌스러운 사진. 설레고, 반가웠고, 다정했고, 슬펐고, 두려웠고, 하늘이 무너졌고, 세상에 나 혼자 남겨졌고, 미련이 남고, 그래도 행복했고, 괜찮아 너 잘해왔다고 캐논은 예나 지금이나 내게 말해준다. 캐논을 내게 알려준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차태현이 전지현을 추억하며 얘기했던 그녀는 어떻고 어떻고가 내게는 그랬고 그랬었고 그럴 것이고가 된다.
나 좋자고 들었던 캐논을 아이의 자장가로 둔갑시켰다. 아이가 캐논을 들으며 깊은 잠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본다. 아이의 자는 모습을 보면 나는 지금이 좋다. 그런데 캐논을 들으면 영화 '박하사탕'의 '나 다시 돌아갈래'가 뇌리를 스친다. 캐논을 듣는 순간만큼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지금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마주침들, 표정들, 촌스러움을, 오월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차창을, 차창 너머 펼쳐지는-그 시절 우리와 같이 푸릇푸릇한-신록의 우거짐, 바람의 한들거림, 큰 바위를 돌아서 흐르는 강물의 움직임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기차를 타고 청주를 다녀왔다. 여전히 같은 곳에서 큰 바위를 돌아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보았지만 그날 내가 보고 느꼈던 강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캐논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