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Dutoit - 샤를 뒤투아 (2)-
베를리오즈의 작품 파우스트의 겁벌은 프랑스권에서 주로 연주되는, 애호가들이나 좀 아는 그런 오페라이고 나 또한 이 곡에 이런 엄청난 잉글리쉬 호른 솔로가 있는 줄은 몰랐었다.
‘D‘amour, l‘ardente flamme‘
사랑, 그 불타는 불길
제목만으로도 매우 감이 오는 그런 아리아가 있더라. 소프라노와 잉글리쉬 호른이 거의 이중창처럼 연주하는 곡이고 뒤투아는 나에게 이 곡의 솔로를 이야기하고 간 것.
곡의 아름다움은 둘째 치고(그냥 직접 들어봐야 한다) 뒤투아의 기가 막힌 비팅 테크닉을 이야기해 보자.
우선 뒤투아는 과하거나 큰 동작을 거의 하지 않는다. 팔꿈치 반동만으로 좌우로 흔드는 정도에 불과한 움직임인데 오직 그 속도와 곡선만으로 거의 모든 걸 해결해 내는 솜씨가 정말 기가 막히는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완전하게 연주자를 컨트롤할 수 있는 건 뒤투아 본인이 음악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
그냥 선율을 알고 화성을 아는 수준이 아니고 어디서 성악가와 잉글리쉬 호른 주자가 숨을 쉬어야 하는지, 프레이즈를 어떻게 매끄럽게 연결시키는지, 메인 멜로디를 감싸줄 다른 선율의 악기들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뒤투아는 이성과 본능 양쪽 모두를 꽉 쥐고 넉넉한 움직임으로 연주자를 이끌어준다.
절대로 내가 하는 음악을 방해하거나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나는 뒤투아의 모션에 이미 끌려들어 가 있었다.
내가 루바토를 하려고 하면 그는 이미 더 넓게 프레이즈를 벌려서 날 기다려주고 있고, 내가 늘어지다 못해 선율에 대미지를 입힌다 싶으면 내가 눈치챌 겨를도 없이 음악의 큰 틀 안으로 반드시 날 끌어다 놓는다. 남자인 내가 이런 할아버지(?)에게 설레는 일은 음악 안에서 말고는 있을 수 없다! ㅎㅎ
잉혼 연주자는 99%의 확률로 루바토와 피아니시모를 하고 싶은 욕망(?)의 순간들이 솔로 내내 있다. 그 순간은 magic moment가 발생하지만 그렇게 늘어지는 일이 잦아지면 곡 전체적으로 지루해지기 쉽상인데 훌륭한 지휘자들은
연주 하는 사람을 충분히 ‘노래하게끔’ 두면서도 전체의 흐름은 반드시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솜씨가 탁월하고 그 완벽한 지휘자가 뒤투아였다고 할 수 있다.
이건 아마 본능의 영역이 더 큰 것 같다. 뒤투아는 본능에 충실한 완벽주의자.. 그런 기질이 때론 잘못 튀면 미투로 오해받을 일들이 충분히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상하이 심포니를 관두고 가장 아쉬웠던 건 그다음 시즌에 뒤투아와 신세계 교향곡과 로마의 소나무를 같이 못해서였으니 나는 어지간히 뒤투아와 잘 맞는 사람이었나 보다 ㅎ
여담으로 이번달에 연주하는 앙상블 화담 공연에서 “어미 거위 모음곡”을 연주하는 이유도 아마 뒤투아와의 강렬한 기억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거장의 시대가 이미 끝났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뒤투아 같은 위대한 지휘자가 여전히 우리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고 있다.
뒤투아 선생님께서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뵐 수 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