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정하는 시대에,
톨스토이가 남긴 질문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저

by 정근우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제목부터 너무 노골적이라, 다소 부담스럽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 자체라기보다,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삶의 얼굴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학교에서, 교회나 성당에서, 장례식장에서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 소설은 묻는다.


"그래서 당신은 '그것'을 정말로 알고 있는가?"




Fig-1_ivan-ilyich-Small.jpg


1. 주인공에게서 드러나는 죽음의 얼굴

소설 속 이반 일리치에게 죽음은 처음부터 종말,파멸,공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옆구리 통증으로 시작된 이상 징후는 점점 그의 일상을 잠식하고, 결국 그는 고통과 두려움에 갇힌 채 죽음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 과정은 죽음학의 창시자인 퀴블러 로스의 '죽음 수용의 5단계'를 그대로 밟아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부정: 이게 뭐 대단한 병이겠어. 그저 가벼운 통증이야.

분노: 왜 하필 나인가. 나는 남들처럼, 아니 남들보다 더 정상적으로 살아왔는데.

타협: 더 좋은 의사, 더 많은 치료를 찾아다니며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를 출구를 찾는다.

우울: 치료가 별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의 삶 전체가 실패였던 것처럼 느끼며 절망한다.

수용: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는 마치 깊은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을 발견하듯 죽음을 받아들인다.

톨스토이가 퀴블러 로스보다 한 세기는 앞선 사람임을 고려하면,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의 묘사가 두 현자에게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반이 경험하는 죽음은 몸의 붕괴이자 자아의 붕괴다.

이 장면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평소에 떠올리는 '평온한 죽음'이라는 말이 사실 얼마나 허망한 이상인지 생각하게 된다. 죽음은, 특히 자신에게 닥친 죽음은, 이처럼 지저분하고, 고통스럽고, 비루한 얼굴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2. 살아남은 자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흥미로운 것은, 타인의 죽음이 소설에서 다뤄지는 방법이다.


1장은 이반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동료들은 검은 옷을 입고 상갓집으로 찾아오지만, 그들의 관심은 이반의 생애와 죽음이 아니라,

"고인의 직책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
"인사 이동으로 내 자리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인가"
"오늘 카드놀이는 언제 할 수 있을까"

같은 문제에 더 쏠려 있다.


애도는 '해야 하니까 하는 행동'으로 소비된다. 검은 옷, 적당한 표정, 위로의 말, 조문 후 이어지는 사적인 수다. 이는 소설 속 인물들만의 문제일까?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부고 소식을 단톡방 알림처럼 받아들인다.

"OO님 모친상"이라는 문자를 확인하고, 잠깐의 침묵과 애도의 말 뒤에는 곧장 "근무 조정은 어떻게 하지?, "장례식장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같은 실무적 질문이 이어진다.


죽음은 타인의 사건일 때, 금세 일정표의 한 줄, 조직 운영의 변수로 축소된다.

심지어 슬퍼하는 나의 모습마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일 때도 많다.

이반의 동료들이 그랬듯이, 죽음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결국 타인의 눈을 의식한 연기로 변해버리곤 한다.



3. 보편적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예외다

소석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반이 한 유명한 삼단논법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보편적 인간은 죽는다.
카이사르는 보편적 인간이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죽는다.

이반은 이 명제에는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바꾸어보면,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보편적 인간은 죽는다.
나는 보편적 인간이다.
따라서 나는 죽는다.

논리적으로는 완벽한 공식이지만, 마음은 이 결론에 동의하지 못한다.

이 괴리는 어디에서 올까?


우리는 머리로는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끝까지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남는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감각,

세계를 바라보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모든 의식은 오직 '나'라는 한 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곧 세계의 화면이 통째로 꺼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딘가에서 이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 사람은 다 죽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리는 없어"


정신의 깊은 곳에서, 나는 여전히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특별한 존재로 느껴진다.

이반 일리치는 이 정서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인물이다.

죽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몸과 의식에 스며드는 실체로 그려진다.



4. 죽음을 숨기는 사회

톨스토이가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상류 사회와, 21세기 한국 사회의 겉모습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죽음을 사회에서 밀어내려 한다는 점에서는 놀라울만큼 닮아 있다.


죽음은 여전히 흉하고, 불길하고, 가능한 아이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아야 할 것, 병원이라는 전문 공간 안에 가두어야 할 것으로 취급된다.


우리는 장례 문화를 효율적으로 정리하고, 병원에서 죽음을 관리하며, 각종 기계장치과 의료기술로 죽음을 최대한 늦추려 한다.

이반의 동료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죽음을 일상의 중심에서 가능한 멀리 밀어두려는 문명 속에 산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그렇게 끝없이 미루고 감추는 사회일수록 삶은 더 불안해진다. 죽음은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넣을수록, 죽음은 갑작스레 튀어나와 우리를 덮친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우리에게 죽음은 가혹하다.


톨스토이의 시대처럼, 우리에게도 죽음은 여전히 '감추고 숨겨야 할 것',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것', '잘못된 삶에 대한 일종의 형벌'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말한다.

죽음은 어느 특정한 잘못의 대가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예고된 조건이라고.



5. 삶과 죽음의 변증법

알베르 카뮈는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톨스토이 역시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을 통해 삶과 죽음이 서로를 비추는 한 쌍임을 보여준다.


소설의 구성은 이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1장: 타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반의 사망 소식. 무덤덤한 장례식. 인사 이동과 카드놀이에 더 관심 있는 동료들

2~3장: 성공한 법조인 이반의 삶. 무난하고 출세지향적인,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경력과 안정된 생활. 하지만 결혼 생활은 공허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그를 괴롭힌다.

4~12장: 옆구리의 통증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급격한 붕괴. 고통과 분노, 절망이 뒤섞인 시간.


4장을 기점으로 죽음을 애써 외면하던 삶과, 죽음을 직접 마주하게 된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세계다.


흥미로운 것은 이반이 마지막 순간에 도달했을 때, 작가는 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고통 속에서 끊잆없이 지나온 삶을 변명하던 그는, 마지막에 이르러 비로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죽음은 나의 삶 전체를 거울처럼 비추는 빛이 된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파괴하는 적대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한 쌍의 개념으로 겹쳐진다.


그런데 이 장면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눈에는 그저 끝없이 비명을 지르다가 숨이 끊어진 망인의 모습만이 담길 뿐이다.

이반이 내면에서 발견한 빛은,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사람들에게조차 끝내 전달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지,

그리고 각자의 죽음은 결국 각자의 내면에서만 완성되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6. 우리의 시대에서, '좋은 죽음'은 무엇일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거창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집요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죽음을 향해 살고 있는가?"


우리가 죽음을 부정할수록, 삶은 점점 외부 기준에만 맞춰지기 쉽다.

타인의 시선, 승진, 연봉, 집의 인테리어 같은 것들

이반이 새로운 집을 꾸미며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삶'을 연출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질문은 바뀐다.

좋은 죽음은 아마도, 고통 없이 평온하게 떠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봤을 때, '그래도 이삶은 나였다'고 말하려면 어떤 삶이 살아야할까.


톨스토이의 소설은 여기까지 데려다 준 뒤, 나머지 해답은 각자의 몫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반 일리치의 비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질문은 우리에게로 되돌아온다.


"언젠가 반드시 올 그날 죽음의 문턱에서, 나는 내 삶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까? 지금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죽음을 부정하는 시대에 이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톨스토이가 남겨놓은 이 거친 거울 앞에서

조심스럽게 나의 삶의 모양을 확인해 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북리뷰]편안함의 습격: 오늘 나는 불편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