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프랭클 -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것.
빅터프랭클 -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는 누구나 한번 쯤 생각해 봤을 것이다. 생사의 갈림 속에서도 당신은 선과 악중에서 어떠한 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정신의학자인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저자가 직접 겪은 나치의 강제 수용소의 참혹하고도 고통스런 생활을 술회했다.
이보다 더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축장이 또 있을까? 아우슈비츠 도살장의 수감되면 병에 결렸거나 쇠약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뽑아 가스실 또는 화장터가 있는 큰 수용소로 보낸다. 수송을 할 때마다 인원은 정해져 있어 수감자에게는 모두 번호가 있고 그들은 번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수감자들에게 정해진 번호는 살갗에 문신으로 새겨지거나 바지나 윗도리, 외투에 수놓는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존엄은 사라졌고, 단지 수감자들은 OO번으로 불리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건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p.26) 저자는 그곳에서는 인간은 두 부류였다고. 돼지 아니면 성자.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도 자신의 이득과 목숨을 위해 악한 행동을 한 사람들은 그곳에서도 권력과 이득을 취하며 결국은 살아남았지만, 선한 사람들은 그 특유한 선함 때문에 대부분 희생당했으리라 생각되는 대목이다. 나의 고교시절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 문학인을 비판하는 토론을 했던 적이 있다.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토론 진행자가 이런 질문했다. “당신의 목에 총을 겨누며 참과 거짓을 말하라고 할 때, 과연 죽음이 눈앞에 와 있는 이 상황에서 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말이었다. 난 그 말이 어이가 없었다. “목숨을 내 놓은 독립운동가들도 있다. 비겁한 당신과는 다르게 반드시 대한민국 만세!라고 정의를 외칠 것이다.”라고 고등학생인 나는 생각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책을 읽으며 최악의 상황에서 나는 어떠한 인간이 될지 생각해 보았다. 앞서 말했듯 저자는 수용소에서의 인간은 두 부류 였다고 했다. 돼지 아니면 성자. 저마다 가치관은 다르겠지만 나라면 선을 이끄는 삶을 택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선을 택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는 것이기에. 선한 삶이 나에게 손해를 준다고 해도 그로 입은 상처는 나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자 자부심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인간에 대한 선과 악 외에도 불확실한 상황을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도 다룬다. 특히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을 이은 세 번째 로고테라피 심리치료 기법을 창설한다. 빅터프랭클은 동료 수감자들 중에서도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삶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저자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이를 통해 동료 수감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삶의 의미? 그것은 기나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삶의 의미라고 하니 거창한데, 나의 인생관은 사회에 공헌하며 자신에게 득이되는 삶을 사는 인생이다. 나 역시도 프로젝트형 사업을 수행하며 매년 5년 단위로 근로계약을 갱신하고 있다. 매번의 불안감과 함께 하지 않는 다면 거짓말. 나도 미래에 대해 늘 불안을 안고 산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평생직장이 없어진지 오래.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이라는 철밥통 직장을 빼면 모두들 비정규직이 70%이상을 차지하는 것 같다. 기껏 정규직이라고 해봐야,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사기업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나도 생각했다. 나름“사”자 들어가는 전문직업이라고 자부하며 직장은 없을 수 있지만, 나에게 직업은 있다. 나만의 전문성을 키워 나간다면 프리랜서라도 활동할 수 있다는 나만의 삶의 의미를 찾으며 불안감을 잠식시킨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고통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저자가 겪었던 고통과 비교할수 없겠지만 이 작품에서 전해주는 메시지처럼 극한의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고 곧 희망을 찾는 것임을 알게 해 준다.
고통과 절망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다는 것. 그것은 희망을 찾은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