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로랭 <항구의 해 질 녘>
클로드 로랭
<항구의 해 질 녘> 1693년
Oil on canvas
루브르 박물관
17세기 유럽 미술의 중심은 극적 명암, 종교화, 영웅적 서사였다. 카라바조, 루벤스, 렘브란트 같은 거장의 시대.. 하지만 이 시기 풍경화는 낮은 장르로 취급되었는데"풍경은 인간의 영혼보다 중요하지 않다"라는
당시 미술 아카데미의 기준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에서 유럽 상류층의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유행하면서 여행에서 본 이상적인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려는 욕망이 생겼다. 그 욕망을 가장 잘 충족시킨 화가가 바로 '클로드 로랭'이지 않을까 싶다.
로랭의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빛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해가 지는 위치는 거의 중앙이고 그 중심에서 퍼져 나오는 빛이 물 위에 길을 만들고 그 길 위로 시간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듯 보인다.
<항구의 해 질 녘>을 보고 있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항구를 서성이는 여행자의 마음이 떠오른다. 떠날지, 돌아올지, 아직 정하지 못한 순간. 해가 지는 방향을 바라보면 어쩐지 이 풍경이 기다려주는 기분이 든다.
빛은 그 시대의 회화 속에서 단순한 시각 요소가 아니라 여행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처럼 작동했다. 로랭은 그 나침반을 처음으로 회화의 중심에 놓은 화가였다. 그래서 이 풍경은 보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고전주의 항구라는 외형을 지녔어도 그 속에 흐르는 감정, 조용한 설렘, 떠나기 전의 숨 고르기는 여전히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