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제로
예전에 둘도 없는 친구다.
자유롭게 살았고, 여자들도 마음껏 만났고, 결혼도 했다가 이혼도 했다.
겉보기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참 많이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고, 표현도 많지 않았고, 무언가 속에 담아두는 사람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알겠다.
젊었을 때부터, 아니 지금도 여전히 그 친구는 고요하고 짙은 외로움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이혼했고, 또 다른 관계도 고민하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결국 집에 돌아가면 혼자다.
그 혼자라는 시간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나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대화도 나누지만, 외로움은 언제나 곁에 있다.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은, 사람들이 있든 없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은 혼자 살아내야 한다. 타자의 시선도, 가족의 존재도, 외로움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그 고요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윤리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생각한다.
타자의 윤리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혼자라는 감정’을 체험해야 한다고.
진짜 외로움을 알아야, 타자의 고통이 보이고, 그 고통에 응답할 수 있는 윤리가 시작되는 거라고.
그 친구는 아마 오래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았지만, 삶의 방식으로 보여줬던 것 같다.
자유로워 보이던 그 모습도,
어쩌면 그 혼자라는 감정을 견디기 위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모두는 혼자다.
하지만 그 혼자라는 감정 안에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씩 생겨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도 혼자이지만,
그냥 살아낸다.
살아가자는 말 대신,
살아낸다는 말로.
조용히, 조용히.
지문 : 질문이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