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순서가 준 선물

by 공책

예전 시골 농가들이 대체로 그랬듯, 내가 어릴 적 우리 할아버지의 권위는 지금 아버지들의 권위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아빠는 나에게 할아버지 댁에 도착하면 할아버지 방 앞에서 절을 하고 들어가라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곧장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곤 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내가 절을 하던 인사를 하던 아니면 그냥 말도 없이 할아버지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던 아무 상관도 안 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할아버지 댁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척들을 위해 정리해 쌓아 놓은 이불을 가지고 마음껏 논 적이 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 그 이불을 풀어헤치고 그 위에서 방방 뛰며 놀았을 것이다. 아빠는 화가 난 것 같았지만 할아버지 댁이라 나를 크게 혼내지 않고 “이따가 할아버지가 아주 혼내실 거다” 하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내게 면죄부처럼 들렸다. 할아버지는 나를 절대로 혼내시지 않을 것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는 그냥 못 본 척 지나가셨다.


하지만 이불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은 간식이었다. 할아버지 집에는 신기한 음식들이 많았다. 특히 과자와 술 같은 게 늘 할아버지 방 바로 옆에 있던 방에 쌓여 있었다. 아마도 선물 받은 것들을 쌓아 놓은 것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건 할아버지 건데, 손대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 것을 내 것처럼 만드는 법을 일찍 터득했다. 할아버지가 간식을 드실 때 옆에 슬쩍 다가가기만 하면, 할아버지는 늘 습관처럼 나에게 나눠주셨던 것이다. 마치 애초부터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것처럼 말이다.


내 뻔뻔함의 절정은 TV 앞에서였다. 그 시절 할아버지 집에 있던 TV는 단 한 대뿐이었다. 그리고 그 채널권은 집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말 그대로 할아버지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할아버지께 말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보고 싶은 거 말고 제가 보고 싶은 거 틀면 안 돼요?”


아마 사촌들 중 누구도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무례하게 굴다니, 나 아니면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할아버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말씀하셨다.


“그래. 나는 재방송 보면 되니까.”


일부러 큰 소리로 말씀하셔서 친척들이 다 듣게 하시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얘한테 권한을 넘겼으니 토 달지 말라” 하고 공표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 순간, 집안의 절대 권력이던 리모컨은 내 손에 쥐어졌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은 내가 선택한 채널을 다 함께 봐야 했다. 친척들은 이런 나의 행동을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그냥 웃어넘겼다.


돌이켜보면 참 신기하다. 지금 같으면 차마 못 할 행동들이다. 그때도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굴지 않았으니, 오직 할아버지 앞에서만 철없이 군 셈이다.


아마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의 출생 타이밍 덕분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안에는 이미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촌들이 여럿 있었고, 그들은 서로 연령대가 비슷해 서로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들이 어린이가 되었을 무렵 뒤늦게 나와 동생이 태어났다. 이후에도 몇몇 사촌들이 태어나긴 했지만,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자주 오지는 못했다. 결국 내가 할아버지에게 리모컨 권력을 달라고 요구할 어린이가 되었을 때, 나보다 나이 많은 사촌들은 이미 입시 준비로 바쁘거나 아예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와 내 동생은 꽤 오랜 시간 집안의 유일한 어린아이였고, 심지어 내가 중학생이 되는데도 어떤 친척은 나를 그저 어린아이 대하듯 대하기도 했다.


그때 나의 철없음을 그냥 웃어 넘겨준 친척들, 그리고 자신이 쥐고 있던 권위를 기꺼이 나눠주셨던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은 그저 고마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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