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낙관

by 공책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살던 집은 한 기업의 사택이었던 아파트였다. 물론 우리 아빠가 그 기업에 다녔던 것은 아니고, 그 사택 아파트가 일반 아파트처럼 거래되던 시절에 우리가 그 집으로 이사 간 것이다.


초등학교는 조금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었지만, 중학교는 아파트 바로 앞에 있었다. 우리 아파트 정문에서 학교 정문까지 뛰면 10초쯤 걸렸을까? 그만큼 가까웠다. 비슷비슷한 기업에 다니거나 비슷한 직업의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다 같은 학교로 가서 똑같은 수업을 받았고 또 비슷한 수준의 학원으로 향했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뿐 아니라 다른 아파트에서도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비슷한 회사에 다니거나 직업을 가진 부모님을 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 비슷한 경제적 환경에서 자라는 친구들과 함께 성장했다.


물론 그중엔 집이 넉넉해서 비싼 과외를 받는 친구도 있었고, 조금 형편이 어려운 친구도 있었지만, 그런 차이를 두고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아마 나 스스로 그런 것에 무던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 내 어린 시절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그때는 학교에서 급식비, 체험학습비, 학교 앨범비 등등을 직접 걷던 시절이었다 (일부는 계좌 이체로 냈었던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현금을 들고 가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돈을 걷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다 걷고 나면 또 새로 걷을 돈이 생겼다. 또 다 걷으면 다시 돈 걷을 일이 반복됐다. 끝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 칠판 한쪽에는 ‘돈 안 낸 사람’ 명단이 적혀 있기도 했고 ('급식비 안 낸 사람' 뭐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이름이 꽤 오래 지워지지 않기도 했다.


돈을 안 낸 이유는 다양했다. 깜빡해서, 돈을 다른 곳에 써버려서, 부모님이 깜빡하셔서 등등. 흥미로웠던 점은, 돈을 걷는 책임이 있는 담임선생님도 그런 일에 그다지 열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소에 숙제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선생님조차도 돈 걷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교사로서의 적당히 느슨한 책임감과 학생들과의 적당한 공동체 정신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칠판 한쪽 구석에 이름이 지워지지 않아도 특별히 혼나거나 닦달당하는 일은 잘 없었다. 마치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누구도 진지하게 읽지 않는 급훈처럼 미납자 명단은 칠판 한쪽에 방치되듯 남아 있었다.


우리 모두는 ‘결국은 다 가져오게 돼 있어’라고 믿으며, 아무도 그것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돈을 내야 하는 기한은 존재했지만, 그 규칙을 어긴다고 해서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여긴 사람은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참 묘했다. 무질서 속의 질서, 무심함 속의 공동체정신, 그리고 침묵 속의 조용한 타협이 그 세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녔던 친구에게 들려주었더니, 그 친구는 깜짝 놀랐다. 자기 학교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곳은 집안 형편의 차이가 커서, 혹시 돈을 제때 내고 싶어도 사정이 어려운 아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을까 봐 교사들이 그런 표시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꽤 균질하고도, 어쩐지 조금은 이상한 세계 속에서 자랐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한 번도 미납자 명단의 공개를 불평등이나 차별의 문제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살다 보면 숙제를 깜빡 잊는 일이 생기듯, ‘숙제를 안 낸 사람’의 이름이 칠판에 오르듯, ‘돈 안 낸 사람’의 이름이 적히는 일도 그저 일상의 일부일 뿐이었다.


내가 자라온 세계는, 일부 경쟁이 치열한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열 의식도 적었고, 다양한 계층의 아이들이 뒤섞인 학교처럼 가난에 대한 낙인도 거의 없었다. 돈을 조금 늦게 내더라도 사람들은 “언젠가는 내겠지” 하며 느긋하게 넘겼고, 말을 잘 듣지 않거나 사춘기의 방황을 겪는 아이에게도 어른들은 “다 결국 잘 크더라”라며 무심하게, 그러나 낙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들 역시 ‘결국 어른들이 다 해결해 줄 것이다’, ‘세상은 잘 돌아간다’, '내가 조금 말을 안 들어도 어른들이 나를 품어줄 거야'는 믿음으로 세상을 신뢰했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것이 부자는 아니더라도 모두 비슷한 형편의 사람들 속에서, 탈락의 위험이 거의 없는 회사 사택이라는 안전한 세계에서만 누릴 수 있었던 이상한 나라의 낙관이었음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적 빈부 격차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우리 집이 부자는 아니었다. 다만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형편이었고, 그들이 비싸서 못 사는 것은 나도 못 샀다. 친구들이 사는 것은 나도 부모님께 계속 사달라고 조르면 결국 살 수 있었다. 그러니 격차라는 것을 실감할 일이 없었다.


TV나 인터넷에서 다른 세상을 보기도 했지만, 그건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을 뿐이다.


물론 세상에는 격차가 존재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낀 순간들도 있었다. 중학교 때, 나는 우리 집에서 좀 먼 거리에 있는 학원에 다녔는데, 그 학원은 더 잘 사는 아이들이 많은 동네에 있었다. 학원 선생님이나 그 근처에 사는 아이가 나를, 정확히는 내가 사는 동네를 조금은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들이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남이 나를 무시해도 그걸 알아챌 만큼 영특해야 상처라도 받는데 나는 그렇지 못해서 상처도 받지 않았다. 내가 또래들에 비해서도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던 것이다.


물론 우리 동네에 사는 다른 어떤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영특해서, 동네에 따라 학교나 학원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도, 직업에 따라 소득 격차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떤 친구는 이런 말도 했다.


“걔네 부모님이 의사래. 그래서 이번에 애들한테 XX에서 밥 사준대.”


나는 그 말을 듣고 ‘맛있는 밥을 사준다’는 건 이해했지만, 그 부모님이 의사라는 사실이 왜 밥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어른들은 늘 “공부를 잘해야 좋은 직업, 좋은 직장을 갖고 잘 살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공부는 그냥 시키니까 했고, 재미있어서 하기도 했고, 혼나기 싫어서 하기도 했다. 다만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 하는 공부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바보 같지만, 나는 어른이 되면 저절로 직업이 생기는 거라고 믿었다. 내 주변의 어른들 모두 일터로 향했기에, 그것이 세상사의 당연한 흐름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직업이나 직장이 사실은 치열한 경쟁의 결과라는 걸 그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다.




이렇듯 세상물정을 잘 모른 채 자랐던 나의 어린 시절은, 내 인생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무슨 일을 선택할 때도 그저 해보고 싶은 일,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을 먼저 택했다. 균질했던 그때의 세상은 나를 세상모르게 했지만, 동시에 겁도 없게 만들었다. 아마 그래서 낯선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도 그리 두렵지 않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무지와 용기는 어쩌면 같은 뿌리에서 자란 것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 대해 몰랐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두려움 없음이 나를 낯선 길로 이끌었다. 그렇게 나는 주저 없이 낯선 땅을 택했고, 겁 없이 새로운 기술을 내 평생의 업으로 받아들였다.


만약 내가 세상의 이치를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내 인생의 궤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행운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어른이 되면 저절로 직업이 생길 거야’, '결국엔 모두 돈을 내게 될 거야'라고 믿던, 그 순진하고도 어리석었던, 그 이상한 나라에서만 가능했던 낙관이 지금까지 나를 움직여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의 나는 세상이 충분히 냉정하고,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하며, 언제 어떤 이유로든 탈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내가 자라온 환경이 심어준 그 낙관과 특유의 무심함은 아직도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어려워 보이는 장애물 앞에서 무심히 눈을 감고, 저도 모르게 미래를 낙관하며, 급할수록 느긋하게 기다리고 돌아간다. 경쟁의 시대,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나는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가기 위한 정신적 유산을 크게 물려받지 못했다. 남들보다 위에 서야 한다는 경쟁심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의지도,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동기부여도 크게 없었다. 부모님이나 가족의 기대에 맞춰 내 삶이 짓눌린 기억도, 사회를 위해 헌신하겠다거나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대의를 품은 적도 없다.


그 대신 나는 그저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고 싶었고, 나만의 인생을 나만의 방식으로 써 보고 싶었다. 성공하는 삶보다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명예로운 삶보다는 자유로운 삶을 꿈꿨다. 나는 그것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치관이라 믿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믿음은 착각이었다. 내가 나의 것이라 여겼던 그 가치관은 산업화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민주화가 허락한 자유롭게 말할 권리, 한국 사회 특유의 직장 중심 공동체가 만든 사택이라는 공간, 그리고 아직은 종신고용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노동시장의 느긋함이 함께 빚어낸, 내가 자라나던 그 특수한 시대의 부산물 중 일부일 뿐이었음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크게 성공하고 싶은 욕망도,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야겠다는 욕심도 없다. 다만 내 인생을 잘 살고 싶다. 그것이 내가 한때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조금은 이상했던 그 나라를 만들고 지탱하기 위해 분투했던 수많은 이름 없는 나의 윗세대들에게 내가 바칠 수 있는 유일한 헌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동안 뜻밖의 발명이나 성공을 이루게 된다면,

그것 역시 그 이상한 나라의 낙관과 느긋함이 내 안에 남긴 흔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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