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원으로 가는 길, 빠르지만 운이 필요한 선택

by 공책

앞의 세 글에서는 이공계인이 미국에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 흔히 선택하는 세 가지 경로, 즉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방법,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는 방법, 그리고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 산업계에 진출하는 방법을 살펴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권하고 싶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혹은 다른 나라든 이공계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갖게 되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인재로 성장하기 쉽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박사 과정에 적성이 맞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하는 것은 비용이나 시간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만약 한국에서 학사 또는 석사 학위만을 가지고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싶다면, 현지 학위 대신 외국계 기업을 통한 글로벌 커리어 경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령 한국에 있는 외국계 기업 중에서는 미국 본사나 지사에서 엔지니어를 정기적으로 채용하는 곳들이 꽤 있다. 이런 회사에 취업해 일정 기간 경력을 쌓은 뒤, 회사 내부 이동을 이용해 미국으로 파견되는 경우가 있다. 또 굳이 한국 안에 있는 외국계 기업이 아니어도 된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몇몇 유럽 국가들은 이공계 인력 수요가 높고, 박사학위가 없어도 취업 비자를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다. 해외 본사를 두고 전 세계적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기업이라면 내부 이동 제도를 통해 미국으로 옮길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방식은 잘만 풀리면 가장 효율적인 경로가 될 수 있다. 이미 몸담고 있는 회사의 시스템 안에서 이동하므로 새로운 회사에 처음부터 적응할 필요가 없고, 언어·비자 절차·문화 적응 부담도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한계는, 이 과정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점이다. 회사 내부 이동은 결국 회사의 결정에 달려 있다. 한국에서 몇 년 일하면 누구나 해외로 옮길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다가도, 회사가 정책을 바꾸면 그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 결국 운에 달려 있다.


또한 L-1 주재원 비자를 통해 미국으로 가는 경우, 비자 구조상 회사에 전적으로 종속된다. 이 비자는 특정 회사가 나를 파견하는 형태라서, 해고되거나 계약이 종료되면 다른 회사로 이직해 체류를 이어갈 수 없다. 박사학위자처럼 NIW나 취업비자를 통해 독립적으로 영주권을 받은 사람이라면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만, L-1 비자 소지자는 회사의 지원이 없이는 미국에서 일할 수 없다. 즉,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는 회사에 완전히 묶여 있는 셈이다.


물론 모든 주재원이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다. L-1 비자로 안정적으로 미국에 근무하다가 회사의 지원을 받아 영주권을 취득하는 사례도 많다. 혹은 미국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더 좋은 기회를 얻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이 경로를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회사 선택과 운에 의존하는 구조라는 리스크를 명확히 인지하고 시작해야 한다.


사실 박사나 석사 학위를 통한 경로도 리스크가 있다. 박사과정 입학이 쉽지 않거나, 정작 들어가서 학위를 마치지 못하는 일도 많다. 하지만 그런 과정의 리스크는 대체로 내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논문이 막히면 주제를 바꾸거나, 공부 방향을 조정하거나, 심지어 중도 포기라는 선택도 스스로 할 수 있다. 반면 외국계 기업을 통한 경로는 내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회사가 해외 전근 기회를 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 다르다. 즉, 노력만으로 결과를 바꾸기 어려운 통제 불가능한 리스크가 존재한다.


만약 내가 박사 학위를 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유럽처럼 외국인 채용이 활발한 나라의 기업 중 미국에서 엔지니어를 많이 고용하는 회사에 취업하는 전략을 선택했을 것 같다. 그곳에서 글로벌 기업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미국으로 옮길 기회가 생기면 그때 도전하는 방식 말이다.


이 경로를 추천하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반반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공한다면 박사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비교적 수월하게 해외 커리어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회사의 결정과 외부 변수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느냐”라는 관점에서는 불안정하다.


그래서 누가 이 경로를 고민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능하지만, 운이 따라야 해. 성공하면 빠를 수 있지만, 실패하면 선택권이 없어진다. 박사 학위를 통한 독립적인 경로와 비교해 보고 스스로 판단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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