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읽을 수 있는 유럽도시 구경
인상적인 구절 4가지
1. "스무 살 무렵부터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 곳은 주로 유럽의 도시들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좋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브루노는 진리를 확신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교황청의 권력자들은 자기네가 진리라고 주장해 온 것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죄 없는 과학자를 불태워 죽였다. 그들이 그토록 소망했던 천국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행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용서할 권리가 있는 사람도,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도 모두 죽고 없으니 말이다."
3.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모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대혁명의 전사로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했고, 자유의 깃발을 높이 흔들며 주변 군주국의 동맹을 깨뜨리고 유럽을 평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인기를 이용해 황제가 됨으로써 대혁명의 정신을 배반했다."
4. "'수학 물리학 살롱'만큼은 부러웠다. 1871년 통일할 무렵부터 나치가 집권한 시기까지 독일은 과학분야의 세계 최강국이었다. 나치가 사상과 학문연구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억압하고 유대인을 학살함으로써 걸출한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망명하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근대 수학과학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장비와 수집품을 츠빙어에 전시한 것은 변방인 작센의 지배자도 과학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2018년과 2019년 여름 나는 미국에서 박사과정 학생 신분이었는데 독일기업에서 여름 인턴을 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인턴 기간에 거의 매주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유럽 이곳저곳을 놀러 다녔다. 안 그래도 빠듯한 학생 신분에 얼마 안 되는 인턴 월급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호텔에서 숙박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아침 일찍 출발해 밤이 되어 내가 살던 셋방에 도착하는 일정이 대부분이었다.
기차표는 가장 싼 기차표를 그것도 할인을 받아 사거나 혹은 몇 달간 며칠 동안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한꺼번에 사서 이용했다. 그래서 기차를 타면 정해진 좌석이 없이 자리가 나는 곳에 아무 곳에나 앉아야 했다. 여행은 그렇게 기차를 타서 앉을만한 자리를 찾는 것부터 시작되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대강 인터넷으로 어떤 곳이 가볼 만한가 둘러보고 별다른 계획 없이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힘들면 쉬면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배가 고프면 아무 좌판대에 들러 배를 채우고, 그리고 발길 닿는 대로 또 걸었다. 걸으면서 책도 보고, 나의 미래와 꿈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왕 여행지에 왔으니 무언가를 꼭 해야겠다거나 봐야겠다거나 그런 압박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 밤이면 이곳을 떠나야 할 것이고 미래에 언제든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 거니까.
이 도시기행 책도 꼭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쓰인 글 같고, 또 그런 생각으로 읽으면 재미있다. 역사 지식이 많은 친구 하나가 가볍게 여행 갔다 와서 들려준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인상적인 구절은 유럽을 구경하면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인물이나 장소에 대한 코멘트들이다. 중세시대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과학자에 대한 존중심이나 과학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던 변방의 지배자에 대한 부러움이 느껴진다.
나도 유럽여행을 할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을 느낄 수 있었다. 가령 독일에 슈파이어라는 크지 않는 도시에 기술 박물관이 있으며 스위스 베른에는 아인슈타인의 집이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마친 후 미국에 건너온 나는 이런 의문을 자주 품었다. 왜 과학기술 혁명은 모두 서양에서 나타났을까? 다른 문명이 과학을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비참하고 끔찍하게 살해당한 중세시대 유럽의 과학자들을 보면 유럽에서는 과학이 억압당하던 어둠의 시기에도 과학이 발전했다.
내가 한국 사회를 떠나 서양사회에서 가장 많이 느낀 차이점은 이것이었다. 한국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소개를 자기가 속한 소속을 통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령 어느 회사에 과장이라던가 하는 식이다. 자신이 소속한 곳과 자신의 직급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미국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다. 대다수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자신을 소개한다. 가령 자신은 머신 러닝 엔지니어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 뒤에 필요하다면 덧붙여 무슨 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다 정도로 간략히 덧붙인다. 자신의 회사에서의 계급까지 언급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자신의 정체성이 자신의 소속이 아닌 자신의 직업과 자신이 하는 일에 있다고 느끼는 사고방식, 이런 것이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혁명적인 생각이 탄생하며, 이런 것들이 모여 과학 혁명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거나 다음 유럽 도시기행 책이 기다려진다.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을 환기시키며 읽기에 괜찮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