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의 글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작가들은 그동안 쓴 글들을 어떻게 보관할까? 아니 보관하긴 할까? 나처럼 삭제하진 않을까? 어쩌면 이미 유명한 작가라면, 따로 보관하지 않아도 어딘가 계속 등장하기에 신경을 안쓸 수도 있다. 작가들의 진짜 숙명은 본인의 흑역사를 누군가 계속 소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몇 년 동안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은 모두 수 백 편 정도 될 것이다. 나는 긴 글을 잘 쓰지 못한다. 주로 산문을 썼는데 그 양이 어쩔 땐 열 줄을 못 넘기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 한 편 내지 이틀에 한 편을 산문으로 썼다.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대충 계산해도 500편이 넘는다. 처음엔 한 문장으로 끝나는 소설도 썼다. 헤밍웨이의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신지 않은)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처참히 실패했었다.
이슬아가 몇 년 만에 일간 이슬아를 개최했다. 이슬아의 예술을 사랑하는 나로선 축제나 다름없다. 칭다오엔 매년 한 달 동안 전 세계의 온갖 맥주를 마셔볼 수 있는 맥주 축제가 열린다. 25년 3월의 내 메일함도 똑같다. 차곡차곡 쌓이는 이슬아의 매일 글 한편 축제.. 아까워서 남들보다 하루씩 밀려 보는 중이다.
어떻게 그날 쓴 글을 타인에게 바로 보여줄 수 있을까. 블로그나 SNS에 올리는 것도 아니고 바로 독자의 이메일로 전송한다. 마치 아침에 내 입으로 직행시키는 엄마의 숟가락 같기도 하다. 무언가 내게 도착했다는 알림, 그것이 방금 막 따끈따끈하게 쓰인 내 글이라니. 아직 난 절대 못할 일이다.
2020년 여름엔 문득 장기하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그의 미공개 산문 원고를 입수하여 읽었기 때문이다. 술상을 두고 나란히 앉아 해 지는 구경이나 하고 싶게 만드는 글이었다. 그러나 나는 장기하와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아마 우린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데 그 사람도 같은 생각일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오늘자로 내 메일함에 도착한 이슬아의 따끈따끈한 첫 문단이다. 아마도 저런 글을 써내는 사람이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 글을 다 쓰고도 그간 발행했던 산문집의 글들을 전부 삭제할 예정이다. 아직도 꽤 괜찮게 느껴지는 글이라면 남길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확률이 크다. 태어나길 미니멀리스트로 태어났는데 내가 가장 후해지는 순간은 무언가를 지우거나 버릴 때다. 그간 지웠던 글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넌 꽤 잘 쓰였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사라지자!
무언가를 없애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리라. 대상이 나의 관한 것이라면, 마음가짐도 달라지는 동시에 과거의 창피함도 지우는 일인 셈이다.
아깝다는 생각은 없다. 언젠가, 이슬아의 글로 가득 채워진 내 메일함처럼, 내 글이 어딘가 쌓이는 날이 온다면, 그땐 지우지 않겠다 다짐한다. 교복을 반쯤 걸쳐 입은 채로 우걱우걱 먹던 엄마의 한 숟가락도 결국 다 소화해 냈으니 못할 일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