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많은 사진들 속에 유난히 개구진 사진 한 장이 눈에 띤다. 저 뒤로 타이페이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곳에서 아버지는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망고 아이스크림을 들고 서있다.
“아버지. 사진을 찍을 때마다 똑같은 포즈. 이제 좀 다르게 찍어 봐요.”
“어떻게 하면 되노?”
아버지의 손에 뭔가를 들고 촬영해보기도 했고 소품을 이용해서 찍기도 했다. 우린 아버지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고 킥킥 웃었다. 모자를 삐딱하게 걸치고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망고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짓궂은 아이처럼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었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렸다.
부산에서 초저녁에 출발한 비행기는 밤이 되어서야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했다. 대만의 밤공기는 달랐다.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습한 냄새가 우리를 맞이했다. 본격적으로 일정이 시작되는 첫날부터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류지질공원에서 여왕머리바위를 볼 때만 해도 우산을 들고 서 있을 수 있었지만 지우펀에서의 오후는 끔찍했다. 2월이라 강수량이 적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강수량은 한국의 장마급이었고 8월 한 여름의 태풍이었다. 구경은커녕 우산을 들고 다닐 수 없어서 우비를 입고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하늘을 보니 그칠 비가 아니었다. 가까운 찻집에 가서 우롱차를 마시며 주구장창 시간을 보냈다. 그야말로 우리의 가족여행 첫날은 폭망이었다.
첫날 일정을 마친 우리는 밴에서 내려 시내 중심가에 갔다. 젖은 신발을 신고 계속 다닐 수가 없으니 새 신발을 사기 위해 백화점 쇼핑을 하기로 했다. 하루 종일 맞은 비로 머리, 가방, 신발, 옷에서 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하루 종일 모두 참고 있다가 서서히 폭발하기 시작했다.
“날을 잡아도 우째 이런 날을 잡았는지”
“하필이면 대만이냐”
“내일도 비 온다는 데”
젖은 운동화를 바닥에 내디딜 때마다 ‘푹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의 불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여행을 전체적으로 계획하고 같이 가자고 종용한 나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행을 하다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지. 지나고 나면 이런 날이 더 기억에 남는다. 그 덕에 신발도 한 켤레 얻어 신잖아.”
아버지의 한마디에 우리 가족들은 더 이상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따뜻한 백화점에서 복숭아빛으로 변해버린 서로의 볼을 보며 웃었다. 마지막에 나타난 나의 편, 아버지 덕에 심술이 가득한 대만날씨는 우리에게 문제가 되질 않았다.
연속되는 궃은 날씨 속에서 드디어 여행 마지막 날이 밝았다. 대만에 와서 구름한 점 없는 그렇게 화창한 날은 처음이었다. 신베이터우역에 내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베이터우 도서관을 보기도 했고 수증기가 뿌옇게 뿜어져 나오는 지열곡을 지나 우리가 예약해놓은 온천호텔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들어간 저쪽 룸에서 수도꼭지를 크게 트는 소리가 났다. 한참을 욕조에 물을 채우고서는 아주 큰 소리가 났다. “아 시원하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나의 편이었던 아버지는 대만에서도 내 편이었다. 노란색 망고 아이스크림을 든 채 웃고 있는 아버지는 지금도 내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