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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

by 임정연

프랑스 사람들은 해 질 녘을 이렇게 부른다. 개와 늑대의 시간. 땅거미가 내리고 어둑해지면 개인지 늑대인지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는다. 우리 삶에도 그런 시간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혼돈의 시간이며 박제의 시간이며 라비린토스를 헤매는 미노타우로스의 시간들. 태초의 시간이며 최후의 시간들. 그런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1


어린 시절 당신의 삼촌은 말했다. 밤에 함부로 밖에 나가지 말아라. 밤에는 머리 긴 혼령들이 나와 마루며 다락을 돌아다닌단다. 당신이 살았던 검은 기와집은 소리를 품은 집이었다. 마룻바닥을 디딜 때 대문이 열리고 닫힐 때 다락에 올라설 때 당신 귀에 들리던 비의적인 소리들. 바람이 심하게 부는 어두운 밤을 당신은 특히 무서워했다. 그런 날은 수십 명의 귀신들이 방문 앞으로 몰려와 흐느끼는 것 같았다. 당신은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숨을 삼켜야 했다. 당신의 귀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긴 머리카락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껍질 속으로 숨는 소라게처럼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오줌을 지리기도 했고 속옷이 젖을 정도로 차가운 땀을 흘리기도 했다. 어린 당신은 그런 날은 삼촌이 미워졌다. 당신에게 머리 푼 귀신 얘기를 해준 사람은 삼촌이었다. 삼촌은 일곱 살 당신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옆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엔 지금도 왕이 산단다. 이 왕이 죽을 때가 가까워 오면 어디선가 수많은 귀신들이 몰려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운다는 거야.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희디흰 얼굴을 숙인 채 말이야. 파르스름한 입술에선 휘파람처럼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지. 그런 날은 밤새도록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는 거야. 삼촌은 당신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 뒤부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밤이면 어린 당신은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왕이 죽어가고 있겠구나. 왕이 죽으면 누가 제일 슬플까 생각했다. 울부짖는 귀신들의 소리는 당신에게 무섬증을 일으켰다. 당신은 일본 왕이 안 죽어도 좋으니 바람이 멈추기를 바랐다.

별이 죽은 사람들의 눈동자라고 얘기해 준 것도 삼촌이었다. 토방에 앉아 어린 당신을 무릎에 앉힌 삼촌은 손가락으로 별을 가리켰다. 사람은 죽으면 영혼은 하늘로 사라지지.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행복했던 땅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어 하지. 바로 그 사람들의 눈동자가 별이 되어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 거야. 네가 나쁜 짓을 하면 누군가가 널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렴. 어린 당신은 삼촌이 말한 죽음이라는 것이 무언지 알지 못했다. 영혼이라는 말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당신이 어른들의 지갑에서 동전을 훔쳐낸 것을 저 별들이 다 보았겠구나 생각하자 귀뿌리가 달아올랐다. 어린 당신은 별도 졸리면 분명 잠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론 별이 잠들었을 때 동전을 꺼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별이 언제 잠드는지 당신은 결코 알지 못했다.


2


당신은 어스름에 차를 몰고 국도를 달리고 있다. 당신은 해 질 녘을 좋아한다. 마치 생의 한때처럼 짧은 일몰이 지면 순식간에 밤이 찾아온다. 당신이 밤을 무서워했던 날들은 사라지고 잊혔다. 당신은 이제 서른네 살이다. 청바지를 좋아하고 페르시안블루 셔츠를 좋아하고 짐 자무시를 좋아하고 데이비드 란쯔의 피아노 연주를 듣길 좋아한다. 그 외에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더 있다. 갓 뽑아낸 커피를 좋아하고 종이 냄새를 좋아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당신의 키는 일 미터 칠십오가 조금 넘고 머리카락은 약간 곱슬이다. 당신은 아침이면 턱에 세이브 거품을 묻히고 질레트 면도날로 천천히 털을 깎았다. 하루라도 면도를 하지 않으면 당신의 턱과 입술 옆은 수염으로 뒤덮였다. 당신의 털은 빳빳하고 거칠었다. 털이 자라지 않는다면 얼마나 편할까 자주 당신은 생각했다.

두 달 전에 당신은 사귀던 여자와 헤어졌다. 당신을 사랑했고 한 때 당신의 아이까지 가졌던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떠나갔다. 수원시립 교향악단에서 첼로를 켜는 여자였다. 음악을 하는 여자치고 드물게 까다롭지 않은 여자였다. 당신의 생일날 여자는 집에 들러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들곤 했다. 잡채나 구절판이나 개성만두 같은 것들이었다.

둘 다 좋아해서 여자가 곧잘 만들던 음식은 구절판이었다. 여자는 밀전병 대신에 새콤달콤하게 재워놓은 무로 쌈을 만들었다. 소고기, 당근, 오이, 석이, 표고버섯, 죽순을 가늘게 채 썰어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재빨리 볶아냈다. 달걀흰자와 노른자도 나누어서 지단을 부쳐서 채 썰었다. 여자는 말했다. 옛날 사람들이 구절판을 먹었던 것은 서로 뜻이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기 위해서라고. 그 말을 하는 여자의 눈은 조금 슬퍼 보였다. 당신은 음식을 만들 때 여자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꼭 활을 쥐고 첼로를 연주할 때 짖던 표정과 비슷했다. 언젠가 시립 교향악단에서 정기 연주회가 있을 때 당신은 여자에게 알리지 않고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악단의 뒷줄에 앉아 있던 여자는 눈을 감은 채 활을 켜고 있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여자는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 얼굴은 당신이 늘 보던 여자의 표정과 다른 데가 있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와인을 마시며 쌈을 싸서 먹었다. 여자는 초간장에, 당신은 겨자즙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했다. 구절판에 곁들인 와인 때문에 요리는 퓨전 스타일이었다. 요리사인 부친의 손맛을 여자도 갖고 있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여자는 설거지는 질색을 했다. 식탁을 치우고 접시를 닦는 것은 언제나 당신 몫이었다. 여자가 꼭 손이 많이 가는 음식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과 함께 동대문 좁은 골목을 걸어 올라가 뜨거운 팬에 볶아주는 곱창볶음도 곧잘 먹었다. 종로 악기점에 들렀다가 길에서 서서 먹던 어묵이나 김밥 따위도 좋아하던 여자였다.

그러나 여자가 결코 이해할 수 없던 것이 있었다. 당신이 혼자 여행을 가거나 방에 틀어박히거나 휴대전화를 꺼놓고 주말을 보내거나 하는 따위였다. 연인이라면 주말을 같이 보내야 한다고 여자는 말했다. 여행도 반드시 같이 가야 되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연인들은 서로의 모든 것을 나누는 사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었다. 당신은 여자를 사랑했지만 여자의 생각엔 동의하지 못했다. 모든 관계엔 거리가 있어야 했다. 여자를 더 사랑하기 위해 당신은 혼자 지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여자는 당신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자는 첼로 줄이 끊어진 것 같은 절망적인 표정을 띠고 당신을 떠나갔다. 여자와 당신은 구절판의 의미처럼 되지 못했다.

당신은 차를 몰고 강의를 끝낸 대학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당신은 아직 시간강사였다. 전임이 되는 것이 다음 당신의 목표였다. 그러나 시간강사 3년 만에 당신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세 군데 뛰고 있는 대학에서 전임이 될 가능성은 제로였다. 재단이 원하는 돈을 갖다 줄 형편도 아니고 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신은 가라앉은 눈으로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도로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차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국도의 밤은 조용했다. 11월이었다. 벼를 베어낸 논바닥 사이로 찬바람이 불어갔다. 당신은 이제 바람이 귀신들의 울음소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람은 바람이고 이별은 이별일 뿐이었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라고 했던 성철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것은 본래 그 자리의 본질일 뿐이다. 바람은 바람이고 이별은 이별이다. 이제 그녀를 잊어야 한다. 당신은 문득 중얼거렸다.

누군가 국도 옆에 서 있었다. 긴 외투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당신은 차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바퀴 달린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든 여자였다. 차가 멈추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가스등처럼 흐릿했다. 여자는 붉은 외투를 입고 있다. 목에 감은 머플러가 펄럭거렸다. 밤바람이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을 휘감아 솟구치게 했다. 여자의 머리칼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여자가 손가락으로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설마 내려서 가방을 받아주기를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신은 유리창을 내리고 여자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세요?”

여자가 뭐라고 웅얼거렸는데 들리지 않았다. 여자가 걸어와 차 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쿨렁, 당신의 등으로 스며들었다. 여자는 뒷좌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서울까지는 두 시간가량 달려가야 했다. 말벗이라도 되려면 조수석에 앉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앞에 앉으세요.”

여자가 미끄러지듯 조수석으로 들어왔다. 왠지 부피가 느껴지지 않는 몸이었다.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보고 나서 액셀을 밟았다. 3년 동안 이 국도를 다녔지만 누군가를 태워주기는 처음이었다. 손을 흔드는 사람들은 가끔 있었지만 차를 세우지는 않았다. 자동차 안이야말로 가장 사적인 공간이었다. 낯선 사람과 앉아 그 존재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말이 없었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앞을 보고 있었다. 역시 불편했다. 여자를 태운 것을 당신은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이유를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살다 보면 알 수 없는 일도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설명될 수 없는 일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 밤이 꼭 그랬다. 여자가 타자 공기의 밀도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은 콘솔박스를 뒤져 테이프를 찾아 넣었다. 란쯔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침묵이 조금 견딜만해졌다. 당신은 잠자코 자동차가 달려가는 앞만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는 추운지 몸을 떨었다. 당신은 히터의 온도를 높였다. 자동차는 달려갔다. 국도의 잎이 져버린 황량한 길을.


3


당신은 나중에 알았다. 삼촌이 다니던 학교에서 왜 쫓겨났는지, 소읍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들어와야 하는 당신의 집으로 왔는지를. 삼촌은 도시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첫 발령지였다.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었던 삼촌은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매도 들지 않았고 화도 잘 내지 않았다. 말소리도 조용했고 웃음소리도 크지 않았다. 검은 속눈썹이 눈동자에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삼촌의 역사 시간은 인기가 있었다. 아이들은 수업시간을 기다렸다. 틈틈이 들려주는 얘기들 때문이었다.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야사들을 아이들은 재미있어했다.

삼촌은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어린 당신과 놀아주거나 방에 앉아 책을 읽었다. 우체부가 올 시간에는 방문을 밀고 내다보았다. 토방에 앉아 있거나 마당을 서성이기도 했다. 삼촌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우체부가 그냥 스쳐 가는 날은 삼촌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당신이 쳐다보면 삼촌은 마당의 목련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린 당신은 우체부가 원망스러웠다. 삼촌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 우체부 탓인 것 같았다. 부쩍 말수가 줄어든 이유도 분명 우체부와 관련 있어 보였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어느 새벽이었다. 옥수수 대가 부러지는 소리에 당신은 눈을 떴다. 무섬증이 들었지만 당신은 방문을 살짝 밀었다. 옥수수 밭은 뒤 곁에 있었다. 흰색 와이셔츠를 풀어헤친 삼촌이 밭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삼촌이 몸을 솟구칠 때마다 옥수수 대가 후드득 무너졌다. 삼촌은 새를 쫓는 허수아비 같았고 바람에 펄럭이는 돛배 같았고 하늘을 타고 오르는 연 같았다. 삼촌의 얼굴로 땀이 흘러내렸다. 삼촌은 무릎을 꿇고 엎어지듯 옥수수 밭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땅에 문질러댔다. 검은 하늘에 금화 같은 달이 던져져 있었다.

어느 날 삼촌은 짐을 꾸렸다. 삼촌은 먼 항구도시로 떠난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삼촌은 말했다. 사월이었다. 집 앞마당에 목련이 영글고 있었다. 삼촌은 당신에게 목련은 나무의 연꽃이라고 말했다. 삼촌은 힘없는 목소리로 당신을 불렀다.

“내가 떠난 다음에 혹 내 앞으로 편지가 오거든 이 나무 밑에 묻어줄래? 종이는 금세 썩어 거름이 될 것이다. 지금 내 속에 있는 것들은 썩지 않아서 괴롭구나. 내년 봄에도 목련은 무사하겠지.”

삼촌은 비틀거리며 토방에 주저앉았다. 섬돌 위에는 삼촌이 신었던 검정 구두가 윤기를 잃은 채 놓여 있었다. 이곳에 내려와서 한 번도 신지 않았던 구두였다. 도시의 중학교로 출근할 때 신던 구두였다. 삼촌은 구두를 벗어두고 떠났다. 삼촌을 실은 버스가 출발했다. 당신은 삼촌을 따라가겠다며 사납게 몸부림을 쳤다. 아무리 울면서 바동거려도 어머니의 완강한 팔은 당신을 놓지 않았다. 당신은 삼촌을 소리쳐 불렀다. 이제부터 삼촌 대신에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겠다고 꼭 말하고 싶었다. 버스는 점점 멀어져 갔다. 당신은 손으로 눈을 훔쳤다. 눈물이 나는 건 먼지 때문이라고 어린 당신은 생각했다. 내년이면 학교에 들어가는 당신은 오줌을 지리지 않기로 동전을 훔치지 않기로 울지 않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당신은 먼지는 나쁜 놈이라고 욕을 했다.

삼촌이 항구도시로 떠난 다음 날 어머니는 마당에서 삼촌의 구두를 태웠다. 흰 연기가 목련나무 가지를 타고 올라갔다. 사이즈가 유난히 컸던 그 구두를 신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말렸지만 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구두를 태우면서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모자란 놈. 바보 같은 놈. 그러게 왜 남의 여자를 좋아해서. 어머니의 눈에도 먼지가 들어간 모양이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른이 울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삼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우체부를 기다렸다. 그러나 우체부는 당신의 집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당신은 목련나무 아래에 편지를 묻을 수 없었다.

어느 오후 낮잠에서 깬 당신의 귀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 여자가 교장하고 갈라설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랬대요. 노처녀 미술선생인데 상처한 교장이 먼저 프러포즈를 했다 나봐요. 그 여자가 뒤늦게 사람을 만날 줄 알았으면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고 연호를 붙잡고 그렇게 울었대요. 그 여자가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연호와 만나지도 않았을 텐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우리 연호에게 생긴 건지. 그 여자가 우리 연호의 앞날을 망쳤어요. 생때같은 내 동생…… 수화기를 든 어머니가 흐느꼈다. 당신은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며칠 전 삼촌이 목련나무 앞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 내 속에 있는 것들은 썩지 않아서 괴롭구나’

삼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항구 도시에서 살았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그의 흰 피부는 거무스름해지고 턱에는 빳빳한 털이 자라났고 언제나 검은 장화를 신고 다닌다고 했다. 앉은자리에서 막걸리를 사발로 마셨고 목소리도 커지고 웃음소리도 호탕했다. 삼촌은 책도 읽지 않았고 영화도 보지 않았으며 집에 그 흔한 텔레비전도 없었다. 삼촌은 그곳 바닷가에서 새우 잡는 김 씨로 살아갔다. 삼촌은 모든 인연을 끊어버렸다.


4


양평을 지나 서울로 들어오기까지 당신과 여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잠을 자기도 했고 일어나서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앉아있었다. 처음의 서먹하던 느낌은 덜했지만 혼자 있을 때보다 편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음악이 끝나면 콘솔 박스에서 다른 테이프를 찾아 넣었다. 음악은 침묵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었다. 가까운 전철역 앞에 여자를 내려주면 될 것이다. 차가 올림픽 대로로 들어섰다. 강물에 불빛이 붉은 머리타래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강물을 보고 있었다.

“전철역 앞에 내려주면 되겠어요?”

당신이 여자에게 물었다. 강물을 보고 있던 여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왔다. 여자의 눈이 베어진 생선아가미처럼 붉었다. 당신은 놀라 숨을 멈췄다.

“갈 데가 없어요.”

“……?”

당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자는 외투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서 코를 풀었다. 당신은 난감해졌다.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타고 온 여자가 갈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니.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휴지를 만지작거렸다.

“갈 곳이 없다고 했는데도 타라고 해서…….”

당신은 처음에 여자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여자의 표정도 말투도 진지했다. 당신은 흘끗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이걸 어쩐다. 당신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여자가 말했다.

“오늘만 재워 주세요.”

참 난처한 일이었다. 당신은 거절도 승낙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가 처음부터 어긋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지 당신은 알지 못했다. 차는 어느새 당신이 살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다. 떨어져 내린 낙엽들이 바퀴에 짓밟혔다. 당신은 오피스텔 골목에 차를 세웠다. 여자가 중얼거렸다.

“부담되면 갈게요.”

당신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 여자가 뒷좌석에서 가방을 끌어냈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가방이었다. 저렇게 무거운 가방을 끌고 어디로 가려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도 갈 데가 없다고 하는 여자의 대답이 당신은 황당하다.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은 오피스텔 2층이다. 계단을 오를 때 당신은 여자가 든 가방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문을 여는 동안 계단의 자동 타이머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허둥거리다가 열쇠를 떨어뜨렸다.

당신은 손을 씻고 돌아와 냉장고를 열었다. 당신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 당신이 차가운 식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 여자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얹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당신은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식탁에 갖다 놓고 여자를 불렀다. 그러나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식탁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당신의 목으로 우유 넘어가는 소리, 빵을 씹는 소리, 유리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말고는 방안은 조용했다. 여자는 소파에 놓인 방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연인이군요.”

여자의 눈이 책상에 놓인 사진을 보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끝낸 첼리스트와 찍은 사진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 모든 사진을 치웠었다. 그런데 저 사진이 남아있었던가. 당신은 새삼스럽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목으로 넘어가던 샌드위치가 걸려 기침이 터져 나왔다. 당신이 우유를 들이켜는 동안 여자의 혼잣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고통스러워요.”

여자의 눈길이 당신을 향해 있었다. 좀 전처럼 여자의 눈은 붉었다. 역삼각형의 얼굴아래 둥근 콧날과 조금 큰 듯한 입술. 미인의 얼굴은 아니었다. 당신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여자가 잘 수 있도록 침대 위에 놓인 물건을 치웠다. 소설책과 화집과 서양 철학사, 따위의 책들이었다. 당신이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동안에도 여자는 외투도 벗지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가 손도 닦지 않았다. 그대로 앉아 밤을 새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당신은 잠을 자다가 놀라 눈을 떴다. 꿈속에서 첼로를 든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살갗이 비치는 희고 투명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와 당신은 기차를 타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역에서 내리니 오페라하우스였다. 태평양의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녀와 당신을 향해 불어왔다. 오페라하우스의 지붕을 쓸어내리며 첼리스트가 말했다. 다섯 살 때부터 첼로를 만졌어. 손가락이 갈라지고 터지고 아물어 굳은살이 될 때까지 활을 쥐고 연습했지. 언젠가는 이곳에서도 공연해보고 싶어. 평생을 교향악단의 단원으로 남아 있고 싶지 않아. 내게 힘이 돼 줘. 그녀의 얼굴이 간절해졌다. 순간 허공으로 오페라하우스의 지붕에서 떨어진 조가비가 흩날렸다. 봄날 벚꽃이 떨어지는 모습 같았다.

그녀가 슬픈 눈으로 당신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의 눈은 금세 붉어졌다. 내게 힘이 돼 줘, 힘이 돼 줘, 힘이…… 그녀는 당신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당신은 혼자 기차 칸에 던져져 있었다. 기차 안은 당신 외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어둠 속을 빠르게 달려갔다. 창 밖으로 엔딩 크레디트 같은 풍경들이 지나갔다. 수많은 역과 도시와 사람들과 잎이 떨어지는 어스름 거리와 자동차와 집들과 건물들과 지붕과 나무와 동굴과 한낮의 저수지와 수초가 떠 있는 늪과 거대한 산맥들과 얼룩말이 달려가는 초원과 아카시아가 흔들리는 무덤들과 비에 젖는 묘비들과 여자의 자궁에서 빠져나오는 아기들과 풀을 뜯고 있는 소들과 양 떼를 몰아가는 개들과 비가 내리는 들판과 얼어있는 호수와 민물고기가 헤엄치는 강과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과 괭이갈매기가 날아오르는 바닷가와 눈이 쌓인 언덕과 모래먼지 날리는 사막과 초식동물의 내장 같은 긴 터널을 지났다.

당신의 머리카락은 희게 변하고 얼굴은 처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이마와 입술과 콧잔등과 뺨과 턱은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당신이 비명을 질러도 기차는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앞을 향해 달려갔다. 검은 유리창 아래로 늙고 지치고 이가 빠진 당신의 얼굴이 비쳤다. 당신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피부에 닿자마자 얼어붙어서 소금 알갱이가 되었다. 당신의 두 눈에서 끊임없이 소금알갱이가 떨어졌다. 아파. 당신은 중얼거리며 어둠 속에서 눈을 문질렀다. 당신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의식이 깨어났다. 커튼 틈으로 얼음을 삼킨 것 같은 차가운 달이 빛나고 있었다. 여자는 등을 돌린 채 창가에 서 있었다.


5


“내가 얼마나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차를 세운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기도 했어요. 어느 날은 내 몸에서 흰 털이 자라기도 했고 머리카락이 파뿌리처럼 풀어져 강물로 떠내려가는 것도 느꼈어요. 그러나 눈을 뜨면 언제나 그 자리였어요.”

창으로 차가운 달빛이 흘러 들어왔다. 여자의 얼굴은 흰 나리꽃처럼 창백했다. 당신이 커피를 한 모금 삼킬 동안도 여자는 찻잔을 집어 들지 않았다. 여자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당신이 자고 있는 동안도 여자는 깨어있는 것 같았다. 여자에게서 여름밤 동굴 속 같은 찬 기운이 느껴졌다. 당신은 아직 잠이 덜 깨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 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해요.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냥 나를 스쳐 지나가요. 그들에게 나는 공기나 햇빛이나 바람 같은 존재니까요. 나를 알아본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언제부터 내가 살았는지 말해볼까요. 그건 나도 잘 몰라요. 백 년 전인지 천 년 전인지. 이 세계가 시작되는 때였는지 공룡이 화석으로 변해 가는 시기였는지. 단지 기억이 나는 것은 내가 목련나무속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 때였어요. 그전에는 공기를 타고 돌아다녔지요. 나무와 우린 기싸움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아요. 나무속에 살면서 처음으로 편안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으로 살았을 적의 기억도 모두 지우기 시작했지요. 어느 날은 이렇게 나무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 마당 귀퉁이에 있던 목련나무가 베어 지지 않았더라면. 당신 가족이 도시로 떠난 다음 그 집을 사들였던 사람이 목련나무를 베어버렸어요. 목련나무는 흰 피를 쏟으며 땅에 쓰러졌어요. 난 다시 떠돌아야 했지요. 바람과 공기 속을 구름과 달빛 속을 차디찬 겨울의 시린 날과 여름의 태양 사이를요. 난 다 보았어요.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과 죽어 가는 것과 사랑하는 모습과 냉정하게 서로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까지 도요.”

여자가 말하는 동안 당신은 두 잔의 커피를 마셨다. 방 안의 온도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추웠다. 당신은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발바닥이 얼음을 딛고 있는 것처럼 시렸다.

“국도에서 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았어요. 지나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를 세우더군요.”

“……?”

“당신이 살았던 기와집 기억나요? 사람들이 잠들면 나는 마루며 마당이며 맨 땅을 걸어 다녔어요. 당신이 잠든 방문 앞을 스쳐가기도 했지요. 삼촌의 구두를 태우던 날도 생각나는군요.”

여자의 말을 들으며 당신은 소파로 걸어갔다. 커피를 두 잔 마셨는데도 방안이 싸늘한데도 견딜 수 없게 잠이 쏟아졌다. 당신은 소파 위로 길게 쓰러졌다. 당신은 아득한 잠의 틈새, 크레바스로 떨어져 갔다. 당신의 숨소리는 가라앉고 깊어졌다. 당신 머리맡에 앉아 여자는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초가 타들어 가고 있는 걸 몰라요. 당신도. 그 누구도.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쓸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모르지요. 미련이 남으면 나중에 나처럼 돼요. 여행가방을 들고 이 세계를 돌아다녀야 돼요.”

당신의 이마로 찬 손이 내려왔다. 당신의 의식은 더 깊이 가라앉았다. 당신은 얼음처럼 단단하게 잠이 들었다.


6


당신이 삼촌을 본 것은 세월이 많이 지난 뒤였다. 고등학생이 된 당신은 삼촌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당신은 그런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용돈을 모았고 삼촌이 있는 곳의 정보를 모았다. 삼촌이 어디에 있는지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삼촌은 편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삼촌의 편지를 버리지 않았다. 옷장 서랍 맨 아래에 그것을 넣어두었다. 그해 여름 당신은 열일곱이었다. 몸에 열이 많았고 얼굴에 나무껍질 같은 여드름이 돋았다. 피부는 울퉁불퉁해졌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는 검고 여린 털들이 자라기 시작했고 목소리도 변했다. 당신은 여름방학이 되자 배낭을 꾸렸다. 집에는 수련회라는 핑계를 대었다. 당신은 주황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기차를 기다렸다. 의자는 엉덩이를 데일 듯 뜨거웠다. 한낮의 태양은 당신의 머리꼭지에 떠 있었다. 꼭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프라이팬 같았다. 당신의 목으로 흘러내린 땀이 겨드랑이를 지나 사타구니로 떨어졌다. 당신은 화단에 피어 있는 붉은 맨드라미를 보고 있었다. 꽃은 더위와 열기에 지쳐 목이 꺾여 있었다. 맨드라미의 그 붉은빛이 당신의 눈을 찔렀다. 언젠가 삼촌의 눈에서 그 붉은빛을 본 것만 같았다.

역사 담장 너머 제재소 건물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톱니바퀴가 맞물린 소리는 날카롭고 시끄러웠다. 마당에 잘린 나무들이 그득했다. 인부들이 몰고 온 트럭을 세우고 짐칸에 실었던 통나무를 끌어내렸다. 바지만 입은 남자들의 검은 등으로 뜨거운 햇빛이 꽂혔다. 남자들의 등은 번들거렸고 느릅나무껍질이 벗겨지듯 허물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건을 머리에 묶은 남자도 있었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소리를 지르는 남자도 있었다. 남자들의 거친 말투와 상소리와 웃음소리는 한 여름 태양아래 싱싱했다. 어디선가 섬뜩한 쇳소리를 내며 새가 날아갔다. 제재소 처마에 앉아 있던 새였다. 새는 나선형으로 커브를 돌아 역사 지붕에 내려앉았다.

당신의 배낭 속에는 삼촌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봉투에 있는 주소가 다였다. 삼촌을 만날 수 있을지 당신은 자신이 없었다. 기차는 달려갔다. 천장의 낡은 선풍기가 돌았지만 안은 무덥고 공기는 끈끈했다. 음식 냄새와 땀 냄새가 지독했다. 사람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계란을 까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기차 안은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은 배낭을 꼭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당신은 낯선 도시에서 눈을 떴다.

당신은 역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편지가 바람에 뒤척였다. 바닷가로 가려면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의 등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택시기사가 손짓으로 당신을 불렀다. 당신이 내민 주소를 본 기사는 저 아래로 내려가 버스를 타라고 했다. 버스는 40분에 한 대씩 오니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당신은 노인과 아낙의 뒤를 따라서 버스에서 내렸다. 당신은 고무 함지를 머리에 인 아낙에게 주소를 내밀었다. 아낙은 머리를 갸우뚱거리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아낙의 뒤를 따라 당신은 걸었다. 바람에 비릿한 갯 냄새가 번지고 있었다. 신작로는 곳곳이 파여 있었다. 조금 걷자 비포장 길이 나왔다. 노란 해바라기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누가 꺾었는지 대궁이 부러진 게 많았다. 아낙은 함지를 이고도 빠르게 걸었다. 아낙의 등뒤로 흰 알약을 으깬 것 같은 먼지가 일어났다.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자 공기가 서늘해졌다. 붉은 흙이 발 밑에서 부서졌다. 숲을 빠져나가자 제방이 나왔다. 그 너머로 파란 바닷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칠이 벗겨진 배들이 시멘트 난간에 묶여 있었다. 마을은 조용했고 개 짖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검붉게 수평선이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새들도 둥지로 돌아가는지 떼를 지어 날아갔다. 아낙이 손가락으로 어떤 집을 가리켰다. 담이 낮은 집이었다. 당신은 목을 빼고 안을 기웃거렸다. 담 안쪽 화단에 달리아가 피어 있었다. 어스름 속에서 꽃들은 웃고 있었다.

당신은 담에 기대서 한참을 서 있었다. 대문도 없는 집을 성큼 들어서면 될 텐데 왠지 망설이고 있었다. 삼촌의 집은 작았다. 쪽마루가 있는 슬레이트 집이었다. 마당을 향해 두 개의 방문이 보였다. 화단 앞에 평상이 놓여 있었다. 평상 너머로 바다가 기웃거렸다. 쑥을 태우는 냄새가 공기 속을 타고 날아왔다.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포대기에 아기를 업은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꽃무늬가 흐드러진 치마를 입고 있었다. 바닷가 여자치고는 몸매가 호리호리했다. 여자는 나이도 많지 않아 보였다. 열일곱 당신보다 서너 살 많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등에 업힌 아기가 칭얼거리자 여자는 몇 번 허리를 들썩였다. 여자는 긴 부지깽이로 모깃불을 돋우어주고 바다를 쳐다보았다. 여자가 마루에 매달린 형광등을 켰을 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조금 끄는 것 같았고 느렸다. 긴 그림자는 이쪽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당신이 왜 몸을 숨겼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은 순간적으로 담 옆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거친 숨소리를 죽이며 몸을 웅크렸다. 그림자는 당신을 지나쳐 삼촌의 집으로 사라졌다. 평상에 앉아있던 여자가 남자를 반겼다. 삼촌은 여자를 보고 웃었다. 삼촌은 마루에 앉아 장화를 벗었다. 겉옷 위에 걸치고 있던 노란 비닐 바지와 잠바도 벗었다. 그리고 여자의 등뒤로 돌아가 아기를 살폈다. 아기는 잠든 것 같았다. 삼촌은 당신의 기억보다 더 나이가 들어있었다. 큰 키는 여전했지만 얼굴은 검어지고 야위어 있었다. 잔주름도 많았다. 얼굴을 검은 수염이 가득 덮고 있었다.

삼촌은 수돗가에서 세수를 했다. 여자가 수건을 들고 와 내밀었다. 삼촌은 웃으며 얼굴을 닦았다. 삼촌과 여자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오래 같이 산 사람들 같았다. 여자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삼촌은 평상에 앉아 부지깽이로 모깃불을 돋웠다. 삼촌은 평상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삼촌의 등이 허전해 보인다고 당신은 문득 생각했다. 이번엔 당신이 삼촌에게 귀신이나 하늘의 별들에 관해서 들려줄 차례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당신은 목련나무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당신의 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가 밥상을 들고 나오자 삼촌은 일어나 받아 들었다. 삼촌과 여자는 평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여자가 간혹 무슨 소리를 하는지 삼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담에서 떨어졌다. 당신은 비틀거리며 제방을 향해 걸어갔다. 역으로 나가는 마지막 버스는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방에 앉아서 당신은 조금 울었다. 왠지 삼촌을 만나서는 안될 것 같았다. 편지 속의 삼촌은 젊은 여자와 살지도 않았고 아기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른들이란 그런 사람들이다. 당신은 삼촌이 그리웠다. 귀신 얘기를 해주고 별 이야기를 하던 그가 그리웠다. 그래서 당신은 울었을 것이다.


7


당신은 며칠 뒤 첼리스트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보스턴에 나가고 없었다. 해외 정기 연주회였다. 그녀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고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말했다. 시립교향악단은 보스턴 공연이 끝나면 뮌헨으로 건너가 다른 연주회가 있을 거라고 했다. 당신은 여전히 일주일에 세 번 지방에 내려가 강의를 했고 나머지 시간엔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당신은 어느 밤 국도를 달리다가 여자를 태웠던 장소를 지나갔다. 그곳에 여행가방을 든 여자는 서 있지 않았다. 당신은 혹시나 해서 백미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음날 당신이 눈을 떴을 때 집안에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들고 왔던 그 무거운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를 태워 준 일이나 집으로 데리고 왔던 일이나 모두 비현실적이었다. 식탁에는 두 개의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당신이 마신 잔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당신은 어둠이 짙은 국도를 달려가고 있다. 텅 빈 나뭇가지가 찬 바람에 흔들렸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목련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자박자박 부딪쳤다. 당신은 문득 삼촌이 보고 싶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대로 차를 달려 삼촌이 살고 있는 곳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열일곱 살 이후로 그를 본 적이 없다. 며칠 있으면 대학은 긴 동면에 들어간다. 삼촌을 만나러 가기에 좋은 계절이다.

당신은 어쩌면 그에게 어스름에 만났던 여행가방을 들고 다니는 여자 얘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첼리스트 얘기를 할지도. 늙어 가는 삼촌은 당신의 말을 들으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쩌면 당신은 인터넷에 들어가 뮌헨으로 가는 비행기표 티켓을 끊을지도 모르겠다. 둥근 돔 아래 객석에 앉아 첼리스트의 연주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 연주를 들으러 당신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당신은 자동차의 속도를 높인다. 차 안이 서늘해지는 것 같아 당신은 무심코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뒷좌석은 텅 비어 있다. 당신은 쓸쓸하게 웃으며 창문을 내린다. 찬바람에 섞인 눈송이들이 얼굴을 때린다. 당신은 엑셀을 더 힘주어 밟았다. 눈송이들이 세차게 몰려왔다. 당신은 지금 혼란스러운 생의 한때를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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