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서 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했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봄날의 가벼운 솜털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기지개를 켜는데 사거리 건너편에서 신호를 무시한 채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 호루라기를 불며 손짓했다. 국산 중형차가 멈칫하더니 멈춰 섰다. 차를 갓길로 빼라고 손을 흔들었다. 차 옆으로 다가가자 선팅이 까만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수고하십니다. 신호 위반으로 단속하겠습니다.”
경례를 붙였다.
“그런가요? 신호가 바뀌는 걸 못 봤는데….”
남자가 비굴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내밀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교차로 진입 이전에 황색 신호로 변경되었으며 이후, 적색신호 상태에서 교차로를 통과하셨습니다. 신호위반으로 범칙금 6만 원과 벌점 15점이 부과됩니다.”
“앞차에 가려 신호를 미처 못 봤는데….”
40대 중반의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앞차와의 간격이 있으면 다 보입니다. 면허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급해서 그런데. 한 번만 봐주시면….”
“면허증 제시해 주세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예 잠시만요.”
남자가 몸을 숙이고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지갑에서 면허증을 꺼내며 꾸물거렸다. 슬몃 웃으며 면허증을 건네주었다. 면허증 뒤로 꼬깃꼬깃하게 접힌 지폐가 있었다. 슬쩍 보니 파란색 지폐였다.
“허, 이러시면 곤란한데….”
“수고하시는데… 어떻게 잘 좀.”
남자가 손바닥을 포개며 비굴하게 웃었다. 주위를 쓱 둘러본 다음에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면허증은 대충 눈으로 훑었다.
“평소에는 잘 지키는데 오늘은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앞으로는 정말 조심하겠습니다.”
남자가 머리를 숙이며 주절주절 말했다.
“앞차에 가려 신호를 못 봤다고 하니까 특별히 봐드리는 거예요.”
남자에게 면허증을 돌려주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운전자가 황급히 차를 돌려 떠났다. 멀어지는 차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여간 저런 사람들은 규정대로 안 하고 걸리면 꼭 편법을 쓴다. 어깨를 뒤로 젖히며 또 딴 놈 없나 하면서 뒤를 쳐다보았다. 빨간색 승용차가 불법 유턴을 하는 게 보였다. 바로 호각을 불며 쫓아갔다. 옆으로 대라고 손짓을 했다. 창문이 내려가자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아줌마가 앉아있었다.
“수고….”
경례를 하며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여자가 줄줄이 말을 쏟아냈다.
“아, 제가 길을 잘 몰라서요….”
투실투실 살찐 얼굴에 턱 살을 흔들며 변명했다.
“불법 유턴으로 단속하겠습니다. 불법유턴은 범칙금 7만 원이 부과됩니다.”
“네에?”
여자가 쩔쩔매는 얼굴로 눈을 깜짝거렸다.
“면허증을 제시해 주세요.”
“제가 진짜 길을 잘 몰라서요….”
“그렇다고 불법 유턴을 하면 안 되죠.”
여자의 말을 자르며 허리에 손을 짚었다.
“정말 제가 길을 몰라서….”
여자가 굽실굽실하며 연신 변명을 늘어놓았다.
“면허증 주세요.”
목을 늘이며 손을 까딱거렸다.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이렇게 하루가 간다. 봄날의 하루가.
삐리리 전자음 소리가 나며 도어 록이 열렸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마누라가 부스스 일어났다.
“왔어?”
“응.”
“저녁은?”
“안 먹었는데.”
“씻고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아래에 섰다. 뜨거운 물줄기가 몸으로 쏟아졌다. 얼굴을 들고 물을 맞았다. 몸에 비누칠을 하며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오래 서 있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뻐근했다.
씻고 나오자 식탁에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혼자 앉아 밥을 먹었다. 마누라는 등을 돌린 채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었다.
“상규는?”
안을 두리번거리며 아들에 대해서 물었다.
“학원 갔지.”
“어, 그래?”
마누라가 다시 텔레비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묵이 찾아왔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수저가 식기에 부딪치는 소리와 텔레비전 소리뿐이었다.
오전부터 시작된 회의가 점심시간을 지나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사가 참석한 보고 회의였다. 길고 지루한 회의가 끝났다. 회의실을 나오는데 부장이 이사 옆에 붙어 섰다.
“이사님 덕에 보고서 내용이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역시 이사님 안목은 대단하십니다.”
부장이 입을 죽 찢으며 살랑거렸다.
“하여간 이 사람. 뭘 그렇게까지.”
이사가 웃음을 띠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이사님 아니었으면 이렇게 자료준비가 안 되었을 겁니다.”
부장이 머리를 숙이며 또 추켜세웠다.
“조사 잘해서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보고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아, 이사님 점심식사는 어떻게?”
부장이 손을 맞비비며 물었다.
“어, 해야지.”
“저번에 그 집으로 가실까요?”
“어, 그럴까?”
부장이 이사를 모시고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부서로 돌아오자 사무실이 텅 비어 있었다. 다들 밥을 먹으러 나간 것 같았다. 나가서 뭐라도 먹어야 하나 생각하는데 신트림이 넘어왔다. 식욕도 없고 가슴만 답답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후 하고 연기를 날리며 난간으로 다가섰다. 손으로 목을 꾹꾹 누르며 멍하니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멀리 빌딩 사이로 봄의 아지랑이가 가물거리고 있었다. 눈이 시었다.
아웃도어 차림으로 방에서 나왔다. 식탁 의자에서 멸치를 손질하고 있던 마누라가 고개를 들었다.
“산에 가셔?”
“어, 갔다 올게.”
“저녁은?”
“그전에 들어올 거야.”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자 지하철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등에 배낭을 메고 빠르게 걸었다. 지하철역에 도착하자 사물함으로 갔다. 뒤쪽의 사물함을 열어 가방을 꺼내고 배낭을 집어넣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칸막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변기 뚜껑을 닫고 걸터앉았다. 아웃도어를 벗어 가방에서 꺼낸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등산화 대신 비닐봉지에서 꺼낸 구두를 신었다. 아웃도어와 등산화는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모자를 썼다.
골목을 따라 내려오는데 묵직한 비닐봉지를 들고 가는 아줌마가 보였다. 뒤를 따라갔다. 아줌마는 쓰레기 수거함 옆에 검은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 아줌마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아줌마가 돌아보더니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아, 저요?”
“예. 방금 검은색 봉투 내려놓으셨죠?”
“아, 그게….”
아줌마가 말을 더듬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쓰레기 불법 투기로 단속하겠습니다.”
“제가 한 거 아닌데….”
아줌마가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제가 방금 봤습니다.”
“그 그게 아니라….”
“저기 CCTV 보이시죠?”
손을 들어 골목 위에 있는 방범 카메라를 가리켰다.
“저기 보면 다 나오거든요. 쓰레기 불법 투기는 벌금 300만 원이 부과됩니다. 신분증 제시해 주시고요.”
“아니, 주민등록증은 안 가져 나왔는데….”
아줌마가 눈을 깜빡거리며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말했다.
“집에 있어요?”
“아, 예. 집에 아마도….”
“집까지 같이 가시죠.”
“경찰아저씨, 잘못했습니다. 정말 한 번만 봐주세요.”
아줌마가 우는 얼굴로 팔에 매달렸다.
“어허, 이러시면 안 됩니다. 법대로 해야 한다니까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까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머리를 숙이며 사정사정했다. 후, 하고 한숨을 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줌마가 손을 비비며 발을 동동 굴렀다. 턱을 쓰다듬으며 힐끗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두 손을 모은 채 쩔쩔매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봐드리는데 다음에는 단속됩니다. 불법투기 하시면 안 됩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다시는 안 할게요.”
아줌마가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아줌마.”
“네에?”
“쓰레기는 가져가야죠.”
“아, 예. 예. 죄송합니다.”
아줌마가 검은 비닐봉지를 집어 들고는 후다닥 뛰었다. 가벼운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와 거리로 나섰다. 길가의 떡볶이를 파는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어묵을 몇 개 집어먹었다.
“장사 잘 되세요?”
입 속의 어묵을 우물거리며 주인을 쳐다보았다.
“아, 예. 그렇죠. 뭐.”
주걱으로 떡볶이를 뒤집던 주인이 머리를 끄덕였다.
“여기 괴롭히거나 그런 사람 없죠?”
“아, 이렇게 순찰 돌고 하시는데 이런데 쓸데없이 시비 거는 사람 없어요.”
주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묵 국물을 후루룩 거리며 주인을 쳐다보았다.
“떡볶이 1인분 주세요.”
주인이 건네준 떡볶이를 먹고 휴지로 입가를 닦았다.
“여기, 얼마예요?”
“아, 그냥 가세요.”
주인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얼마예요? 받을 건 받으세요.”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자 주인이 힐끗 곁눈질했다.
“천 원입니다. 천 원 주세요.”
주인의 손에 돈을 건네주며 돌아섰다.
“예. 많이 파세요.”
포장마차를 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가 오렸는지 하늘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천천히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머리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좍좍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비가 오면 다니는 사람도 준다. 이런 날 다녀봤자 소득도 없다. 눈앞의 벚나무에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할까?
오전에 결재서류를 들고 부장에게 갔다가 된통 깨졌다. 잔뜩 찌푸린 얼굴의 부장은 다시 해오라며 서류를 던졌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과장이 내 눈치를 보았다. 그 앞에 서류를 던졌다.
“야, 박 과장. 한 번에 제대로 못하냐. 꼭 내가 부장님한테 싫은 소리 들어야 해?”
“죄송합니다.”
박 과장이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움츠렸다.
“제대로 좀 하자. 제대로 좀 해.”
“예,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기대며 목을 주물렀다. 칸막이 너머로 과장이 대리를 채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리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무실 분위기가 시무룩해졌다. 오전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박 과장이 건너편에서 물었다.
“차장님, 식사하셔야죠?”
“어, 가야지.”
컴퓨터에서 고개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모니터만 보았더니 눈이 쑤셨다. 사무실을 나오자 얼른 과장과 대리가 따라나섰다.
“어디로 갈까요?”
옆에서 걷던 박 과장이 물었다.
“요 앞 설렁탕 집 가. 빨리 먹고 들어와서 아까 그거 얼른 해야지.”
“예에….”
박 과장이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회사를 나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과장과 대리가 옆으로 허겁지겁 따라붙었다. 일찌감치 나온 넥타이 부대들이 우르르 식당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 틈에 끼었다.
거리를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별 건수가 없었다. 터벅터벅 거리를 따라 내려오다 대형 마트가 보여 들어갔다. 입구 쪽에 주차장이 있었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외제차가 서 있길래 앞 유리창을 보았다. 장애인 표지가 없었다.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 후 비상등이 깜박거리며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카트를 끌고 다가왔다. 그리곤 트렁크를 열고 카트의 짐을 싣기 시작했다. 그 틈에 차로 다가갔다.
“수고하십니다. 장애인 주차구역 위반으로 단속하겠습니다.”
열심히 짐을 싣고 있던 남자가 놀란 듯 뒤돌아보았다.
“장애인 주차구역 위반은 벌금 10만 원이 부과됩니다. 신분증 제시해 주십시오.”
“아까 빈자리가 없어서 그랬는데… 금방 빼려고 했어요.”
머리를 7대 3 가르마를 탄 남자가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쳐다보니 카트에 짐이 수북했다.
“잠깐이라도 장애인 주차구역에 대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아, 정말 잠깐….”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남자가 열심히 변명했다.
“장애인 주차구역은 잠깐이라도 안 되는 거 아시죠?”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알죠, 당연히 비워 놔야죠… 지금 빼겠습니다.”
남자가 손사래를 치며 허둥거렸다. 카트의 짐을 싣던 여자가 무슨 일인가 하듯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쪽 가 있어.”
남자가 여자의 등을 떠밀었다.
“일단 면허증부터.”
손을 내밀었다.
“예에….”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등을 돌리고 주섬주섬했다. 그리곤 손에 덥석 지폐를 쥐어주었다.
“아, 수고하시는데….”
“어허, 이러시면.”
짐짓 고개를 흔들며 눈을 부릅떴다.
“휴일에도 이렇게 수고하시고 제가 허리가 아파 잠깐 세운다고 하는 것이…”
남자가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다음부턴 조심하세요.”
“예에… 알겠습니다.”
남자가 손짓으로 여자를 부르더니 재빨리 카트의 짐을 트렁크에 옮겨 실었다. 부부는 주차장에 그대로 카트를 팽개쳐두고 마트를 떠났다. 그걸 보고 슬며시 웃음이 났다. 주차장을 벗어나는데 아줌마가 아이 손을 끌고 마트 쪽으로 무단횡단을 하는 것이 보였다. 호각을 불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무단횡단으로 단속하겠습니다.”
“네에?”
아줌마가 당황한 듯 쳐다보았다.
“무단횡단은 범칙금 3만 원이 부과됩니다. 신분증 제시해 주세요.”
“주민 등록증 안 가져왔는데….”
아줌마가 우물쭈물하며 눈을 깜짝거렸다.
“지갑 안에 주민등록증 없어요?”
“제가 주민등록증 잃어버려서….”
아줌마가 더욱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아니 분실신고하고 재발급받으셔야죠.”
“네에, 제가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애가 아파서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옆에서 아이가 멀뚱멀뚱 아줌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애를 데리고 그렇게 무단횡단 하시면 어떡합니까?”
허리에 손을 짚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아, 죄송합니다.”
아줌마가 다시 꾸벅했다.
“그러다 사고 나면 큰일 나요.”
“…네, 네. 잘못했습니다.”
아줌마가 머리를 숙이며 사정했다.
“앞으로 조심하세요. 다음번에 걸리면 안 봐드립니다.”
“…네에. 잘못했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아이 손을 끌고 허둥지둥 마트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곤 팔을 흔들며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꽃샘추위가 왔는지 날씨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제복 위에 점퍼를 걸치고 상가 거리를 내려왔다. 어디선가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거리 한쪽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들이 몰려선 곳으로 다가갔다.
“경찰 왔다.”
누군가 소리치자 사람들이 좍 갈라졌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그쪽으로 다가갔다. 거리 한쪽에서 중년의 사내가 젊은 여자를 패고 있었다. 벌써 꽤 맞은 듯 여자의 얼굴은 멍이 들고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맞던 여자가 흐느끼며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람들이 다가서려고 해도 사내의 서슬에 밀렸다. 벌건 눈을 희번덕거리며 쌍욕을 내뱉었다. 여자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경찰아저씨, 어떻게 좀 해봐요.”
누군가 등을 떠밀었다. 멈칫거리며 다가갔다.
“중지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폭행죄로 처벌하겠습니다.”
“네가 뭔데? 해봐.”
사내가 고개를 홱 젖히더니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뒤로 피하며 한 발 물러섰다. 사내가 붉은 눈을 치뜨며 소리를 질렀다.
“내 마누라다. 내 마누라 내가 패는데 네가 왜 지랄이야?”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
“이 아저씨 모르는 사람이에요.”
젊은 여자가 흐느끼며 소리쳤다.
“뭐야, 이게 어디서 뻥까고 있어?”
사내가 휙 돌아서더니 다시 여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한눈에 봐도 여자와 부부로 보이지가 않았다.
“경찰아저씨 좀 말려요.”
사람들이 다시 몸을 떠밀었다. 그 성화에 밀려 주춤주춤 다가갔다. 주먹질을 하고 있는 사내의 등을 두드렸다.
“중지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폭행죄로….”
순간 사내의 주먹이 턱으로 날아왔다. 비틀하며 뒤로 물러섰다. 사내의 주먹이 계속 날아왔다. 정신없이 얻어맞았다. 남자의 발이 옆구리를 걷어찼다. 어이쿠 허리를 꺾고 있는데 어디서 호각 소리가 들리며 우르르 달려오는 발소리가 났다.
누군가 거칠게 나와 사내를 떼어냈다.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자 경찰들이 사내의 등에 올라탄 채 수갑을 채우고 있었다. 사내는 몸부림을 치며 순찰차로 끌려갔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멍했다.
“괜찮으세요?”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고개를 들자 젊은 순경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예에….”
대답하는데 입안의 침이 바싹 말랐다.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사람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순경이 붙잡아주었다. 그때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구급차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길을 터 주었다. 차에서 내린 구급대원들이 급히 젊은 여자를 싣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모두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 틈에 빠져나가려고 뒤로 움직였다. 그런데 하필 그쪽으로 순찰차가 들어왔다. 차가 서고 안에서 경찰들이 내렸다. 이런 낭패다. 그중에서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경찰이 물었다.
“지금 상황 어떻게 된 거야?”
“예. 상황 종료되었습니다.”
내 옆에 있던 젊은 순경이 뛰어가 보고했다.
“어, 그래?”
턱으로 날 가리켰다.
“누구야?”
“저희보다 먼저 현장에 오셨습니다.”
“어, 그래? 어디 소속?”
나이 든 경찰이 날 쳐다보았다.
“아, 예. 그게….”
눈을 못 마주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소속이 어디야?”
나이 든 경찰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 그게….”
바로 돌아서서 달렸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야, 잡아.”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렸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가 났다.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뒤에서 우악스러운 손이 목덜미를 낚아챘다. 바로 나이 든 경찰에게 끌려갔다.
“뭐야. 이거 가짜 아냐?”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연행해.”
찰칵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당신을 공무원 사칭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진술 거부권이 있으며, 당신의 진술은 법정에서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순경이 미란다원칙을 줄줄이 읊었다. 끽소리도 못하고 순찰차에 태워졌다. 골목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젊은 경찰 손에 이끌려 가죽잠바를 입은 사람 앞에 턱 앉혀졌다.
“뭐야?”
“공무원 사칭 혐의입니다.”
“어, 그래. 가봐.”
가죽잠바를 입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 예에?”
남자가 노트북 너머로 흘끔 쳐다보았다.
“이름?”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 예에. 김영철.”
고개를 푹 숙인 채 발아래를 쳐다보았다.
“생년월일?”
“…1969년 8월 10일.”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소?”
그냥 일상적으로 묻듯 담담한 어조였다.
“… 서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더듬거리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김영철 씨는 공무원 사칭 혐의로 조사를 받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가죽잠바가 눈을 들어 날 쳐다보았다.
“… 예에.”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대답 좀 크게 하세요. 크게.”
“… 예에.”
마지못해 조금 크게 대답했다.
“오늘이 처음 아니죠? 언제부터예요?”
“……”
수갑 찬 손을 비비다 눈을 질끈 감았다.
“… 그게 오늘 처음….”
“저희가 조사하면 다 나오거든요. 수사에 협조하시는 게 좋아요. 지금 숨기다 나중에 나오면 더 처벌받을 수 있어요. 언제부터예요?”
“… 그게 지난주부터….”
“이 양반이 진짜.”
가죽잠바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때 등 뒤에서 마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김영철 씨가 여기 있다고 해서….”
내 앞에 앉은 가죽잠바가 손을 들었다.
“김영철 씨 찾아오신 분. 이쪽으로 오세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마누라가 다가와 나와 가죽잠바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손에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상규 아빠. 아니, 당신 등산하러 간다더니….”
마누라는 놀란 얼굴로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김영철 씨는 공무원 사칭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내 앞에 앉은 가죽잠바가 설명했다.
“네에?”
마누라가 당황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며 허둥지둥 점퍼의 모자를 둘러썼다. 수갑을 차서 손이 더디게 움직였다.
“남편 분이 주말에 경찰행세하며 다니는 거 모르셨어요?”
“아뇨. 주말마다 산에 간다고….”
“남편 분이 주말에 산에 간다고 나가신 게 언제부터인가요?”
“그러니까….”
마누라가 숨을 삼키며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날 쳐다보는지 쓱 고개를 돌렸다. 수갑 찬 손을 틀어쥐고 깊이 머리를 숙였다.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마누라는 경찰서 문 앞에서 등을 돌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늦은 새벽이었다. 바깥은 칠흑처럼 깜깜했다.
“… 미안해.”
뭐라 할 말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얼른 갑시다. 내일 출근해야지.”
마누라가 휙 돌아서서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