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끄트머리―손끝 그리고 혀끝
김진수 씨에게는 여자친구가 있다.
3살 연하의 여자친구는 짙은 흑발에 단발머리가 무척 잘 어울리는 귀여운 인상이었다.
앙증맞은 얇은 입술과 둥그런 콧날, 자그마한 아몬드가 박혀있는 듯한 두 눈이 진수 씨 눈에는 하염없이 깜찍해보였다.
“아, 머리 쓰다듬지 말라니까.”
진수 씨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면 그녀는 질색하며 그를 나무랐다.
짜증 섞인 그녀의 얼굴조차 진수 씨에게는 사랑스러웠다.
여자친구를 처음 만난 장소는 진수 씨가 자주 가는 카페였다.
그는 대뜸 말을 걸어오는 여자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누, 누구세요?”
청춘을 책상 앞에서 지새우느라 연애 한번 못해본 진수 씨에게 여자는 그야말로 미지의 존재였다.
해석하고 탐구하고 이해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남들은 할 거 다 하면서도 실컷 한다는 연애가 그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위기에 빠진 나라라도 구할 수 있을 정도의 강건한 의지를 품고 평소 연모하고 있던 여성에게 마음을 표현해 본 적도 두어 번 있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럴 때마다 진수 씨는 필요 이상으로 상심했고, 분노했다. 그리곤 익숙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책상 앞은 외로웠지만 편안했다. 그가 잘 알고 잘 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책상 앞에서는 심심치 않게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게 좋았다.
거절의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좁은 연구실의 작은 책상만이 20대 청춘 진수 씨의 모든 것이었다.
작은 연구 과제 하나에도 열정을 쏟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끝까지 파헤쳤다.
그렇게 5년이 흘렀고, 진수 씨는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도 교수는 제자의 성취에 흐뭇해했다.
함께 수학했던 연구실 선후배들은 그런 그를 선망하고 시기했다.
하나같이 인생이 폈다고 말했다.
31살.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하고 높은 연봉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이런 걸 인생 폈다고 하는 건가?
진수 씨는 여전히 외로웠고, 그의 자리는 언제나 좁디좁은 네모 앞이었다. 책상이 조금 커졌을 뿐, 바뀐 건 없었다.
사무실 책상, 카페 책상, 집 부엌 식탁. 조용한 핸드폰 앞.
그랬던 그에게 신원미상의 여성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다.
평소처럼 온종일 업무에 혹사당한 머릿속을 정돈시키기 위해 카페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던 그에게.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생명체가 선뜻.
진수 씨 앞에 우뚝 선 여자는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놀라시면 제가 너무 민망하잖아요. 용기 내서 힘들게 온 건데.”
진수 씨는 여자의 목소리가 참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쇳소리가 섞인 듯하면서 청량하고 귀에 거슬리는 듯하면서 매력적인.
“잠깐 앉아도 될까요?”
여자가 물었고, 진수 씨는 자신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얼굴이 점차 달아오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여자, 정체가 뭘까.
그는 눈앞의 여자를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새것으로 보이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결코 부유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여자가 본인을 소개했다.
28세, 현재 인근 상가에 위치한 필라테스 샵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진수 씨도 관성처럼 자신의 인적사항을 늘어놓았다.
31세, 인근 회사에서 반도체 엔지니어로 근무.
진수 씨의 말에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돌연 씨익 장난스럽게 웃더니 다 알고 있다는 어투로 말했다.
“✩✩ 다니시죠?”
아니, 그걸 어떻게?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진수 씨를 보며 여자는 대놓고 웃었다.
진수 씨는 처음 보는 여자의 가감 없는 웃음이 마냥 당혹스러웠다.
“사실, 저도 이 카페 자주 오거든요. 전에 몇 번 봤어요. 카운터에서 계산하실 때마다 사원증 보여주시던데.”
매번 음료 할인을 위해 사원증을 망설임 없이 내보였던 지난날의 모습이 진수 씨는 부끄러웠다.
딱히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랬다.
여자는 그림자가 없는 빛으로만 만들어진 생명체 같았다.
밝은 표정과 목소리가 그랬고, 작은 입술을 통해 나오는 재미난 이야기들이 그랬다.
참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구나, 하고 진수 씨는 생각했다.
지루하고 평범한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구는 여자는 되도록 더 강한 빛을 만들어 구석진 곳에 옹크리고 있는 그림자 하나까지 몰아내려는 것 같았다.
자기 확신에 찬 그녀의 태도가 호감으로 다가온 건 아니었지만, 진수 씨는 평소와는 달리 묘한 성적 긴장감을 주는 대화에 기분이 들떴다.
“저기, 진수 씨. 나랑 연애할래요?”
여자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카페를 나서고 텅 빈 횡단보도 앞에 나란히 서있던 참이었다.
“……네? 뭘 해요?”
진수 씨는 두 귀를 의심했다.
여자는 그런 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데굴데굴 굴리듯 으스댔다.
“다 들었잖아요.”
그런 그녀의 입술 끝에는 태연자약한 미소 하나가 걸려있었다. 관능적이었다.
진수 씨는 당연한 태도로 서슴없이 세찬 파도와 같은 말을 내뱉는 여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중하지 못한 사람은 질색이었다. 특히나 남녀관계에 있어서.
그러나 진수 씨는 그녀가 던진 파도와 같은 말에 몸을 싣기로 했다.
지나간 버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정류장에 부르지도 않은 버스가 정차하는 지금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외로웠다.
진수 씨는 행복했다.
연애를 시작하자, 회사 동료들은 그에게 하나같이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진수 씨는 동료들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균형 잡힌 삶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삶이 덧없게 느껴졌다.
밤샘 연구와 논문에 바쳤던 청춘은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해 온 것이라는 일종의 운명론에 입각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또, 그는 거울을 자주 보게 되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피부가 한결 좋아진 것 같고, 눈빛도 또렷해져 전체적인 인상이 좋아진 것 같았다.
회사 동료들이 버릇처럼 여자친구의 어떤 면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으면, 진수 씨도 버릇처럼 대답했다.
“다 좋아요.”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볼 때 모든 면이 전부 좋아 보이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진수 씨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분명 완벽한 연기를 펼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그는 몰랐다.
“회사 사람들이랑 주말에도 연락해?”
어느 날 저녁, 자주 가는 카페에 나란히 앉아있던 여자친구가 불쑥 물었다.
진수 씨는 다소 생뚱맞은 그녀의 질문에 의아해했지만, 사실 그대로 답했다.
“팀원들이랑? 따로 연락하는 건 아니고, 그냥 단체 채팅방에 들어가 있는 거야. 난 별말 안 해. 할 말도 없고. 근데 팀원들은 자기들끼리 이것저것 얘기들 많이 하는 것 같던데? 요새는 자세히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싫어.”
“응?”
“회사 사람들이랑 연락하는 거 싫다고.”
여자친구는 화가 났을 때 짓곤 하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가차 없이 말했다.
“여자들도 있는 거 아니야?”
“……당연히 있지.”
진수 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여자친구의 의중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결코 가깝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 됐든 사회에서 만난 회사 동료였다.
매일 인사를 주고받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친절과 응원으로 엮어낸 관계였다.
“거봐, 어쨌든 여자도 있잖아. 안 그래?”
어찌 됐든 여자가 포함되어 있긴 했다. 그랬다.
점심시간이나 출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여자친구의 말대로 여자는 여자였다.
“나는 온통 여자들 틈에서 일하잖아. 수강생이며 동료 강사들까지 전부. 오빠는 내가 다른 남자들이랑 따로 연락하고 그러면 좋겠어?”
본인이 한 말에 대해 당위성을 부여하려는 듯 여자친구는 자신의 업무 환경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진수 씨는 대답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여자친구가 보는 앞에서 단체 채팅방을 삭제했다.
여자 직원들의 휴대폰 번호까지 삭제하려는 것을 업무상의 이유를 들먹이며 겨우 제지했다.
“그래, 이건 이 정도로 내가 타협해줄게.”
선심 쓰듯 말하는 여자친구가 진수 씨 눈에는 그저 귀엽게 보였다.
“고마워.”
진수 씨는 고맙다고 말했다.
이에 여자친구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는 식으로, 이번이 처음이니 봐준다는 듯이 굴었다.
“오빠, 원래 연애하면 이런 부분을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거야.”
“그런 거였구나.”
진수 씨는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낸 사람처럼 가볍게 웃으며 감탄했다.
동시에 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했다.
어느 날이었다.
여자친구와 연락이 닿질 않았다.
전화는 하염없이 신호음만 연결됐고, 줄기차게 메시지에는 답장이 없었다.
SNS 접속 기록을 살펴보니 2시간 전이 마지막 접속이었다.
평소 SNS를 즐겨하는 여자친구의 행동패턴을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었다.
진수 씨는 불안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
연락을 일부러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무언가 크나큰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밤새 기억을 더듬어도 본인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찾지 못했다.
전날 했던 데이트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진수 씨가 보기에는 가히 완벽했다.
고급 일식당에 가서 값비싼 초밥과 사시미를 먹었고, 음식과 잘 어울리는 좋은 술도 한잔 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셨고, 여자친구를 택시를 태워 집에 보낼 때에는 용기를 내어 먼저 가볍게 포옹도 했다.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확인 연락도 잊지 않았다.
잘 들어갔다는 답장도 바로 읽었다.
그녀가 잘 자라고 하기에 진수 씨는 너도 잘 자고 좋은 꿈을 꾸라고 답장했다.
잘못이랄 게 없었다.
거의 절망하다시피 좌절한 진수 씨는 고민을 거듭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잘못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잘못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사과를 하면 된다. 그 순간, 잘못이 탄생한다.
진수 씨는 전화를 받지 않는 여자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5분 후, 여자친구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뭘 잘못했는데?
진수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연결되었다가 곧바로 끊어졌다. 뒤이어 여자친구로부터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톡으로 해.
진수 씨는 문장에 담겨있는 싫증과 짜증을, 약간의 분노를 찾아냈다.
그에게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상대방의 말이나 문장에서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재주.
진수 씨는 몇 번이나 말을 이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문장을 쓰고 지우길 반복했다. 적절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친구의 분노를 잠재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침묵이 아니라 사과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오빠가 방금 미안하다고 문자 보냈잖아. 그러니까, 뭘 잘못했냐고.
여자친구는 대답을 재촉했다. 기다려주지 않았다.
진수 씨는 겁이 났다. 그녀는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기다려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빠, 나랑 연락하기 싫어? 왜 아까부터 답장이 없어?
말 그대로 청전벽력 같은 문장이었다. 진수 씨는 황급히 부정했다.
아니야. 연락하기 싫다니……,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왜 말을 못 해? 이번에도 내가 직접 말로 해줘야 돼? 왜 매번 오빠 잘못을 내가 설명해줘야 되는 건데?
휘몰아치듯 눈으로 달려드는 여자친구의 메시지에 진수 씨는 겁을 먹었다.
마치 여자친구는 그의 미안하다는 연락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굴었다. 불만을 마구 쏟아냈다.
―오빠, 어제 나랑 헤어질 때 왜 갑자기 나 안았어? 내가 전에도 몇 번이나 그런 스킨십 싫다고 했잖아. 그새 잊은 거야? 나는 오빠랑 천천히 오래오래 뜨거워지고 싶어. 나라고 뭐 그런 스킨십 처음부터 싫어한 줄 알아? 다 우리 관계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오빠가 평소에 날 얼마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모르지? 무슨 발정난 강아지처럼.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야. 여자들은 민감해서 그런 눈빛이나 무의식적인 행동 하나하나 전부 느낄 수 있다는 거 몰랐어?
진수 씨는 묘한 굴욕감을 느꼈다. 자신이 그런 음흉하고 안달난 눈빛으로 여자친구를 대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미안해.
진수 씨는 재채기처럼 그 말을 뱉었다.
무의식적으로 뱉은 그 문장 뒤에는 앞으로 조심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자친구는 짜증이 난다고 했다.
진수 씨가 어제 데이트 내내 밝게 웃고, 말도 많이 하고 애정 어린 눈빛ㅡ발정난 게 아니라ㅡ으로 그녀를 바라봤는데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진수 씨는 여자친구 기분 하나 맞추지 못하는 자신의 멍청함을 탓했다.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진수 씨는 이 연애가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날 문득, 자신은 함부로 대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야.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함과 동시에 짧은 감상을 읊조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실수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을 기점으로 여자친구의 모든 면들이 자신과는 어긋나보였다.
여자친구는 자신과 절대 원활한 연인 관계를 이어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진수 씨는 평소 여자친구의 언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역시 이상했다.
진수 씨는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다.
반면, 그녀는 진수 씨에게 언제든지 상처를 주었다.
그건 그녀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였고, 세상 어떤 일보다 손쉬운 일이었다.
어떤 때에는 버럭 악을 내질렀고, 어떤 때에는 두 팔로 그의 어깨를 밀쳤다.
잊었다하면 뺨을 맞았고, 수시로 정강이를 까였다.
뺨까지만.
진수 씨는 여자친구에게 처음 맞았을 때, 그렇게 마음속에 선 하나를 그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다투다가 따귀 하나쯤은 내어주는 장면을 본 것도 같았다.
너무 사랑해서, 사랑이 흘러넘쳐서 무심코 터져 나온 것이라고 진수 씨는 해석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진수 씨가 그어놓은 선을 쉼 없이 넘었다.
단순히 넘어올 뿐 아니라, 선 자체를 파괴해버렸다.
그녀의 매서운 손끝과 말끝은 매번 거침없이 진수 씨를 향했다.
가벼운 따귀와 폭언은 어느샌가 뺨과 귀가 얼얼하게 달아오를 만큼 강도가 세졌고, 어느 날에는 입술이 터질 만큼, 또 어느 날에는 얼굴 반쪽이 퉁퉁 부을 때도 있었다.
악귀가 빙의한 듯 사납게 욕을 내뱉는 여자친구가 무서워 순간적으로 몸이 떨려온 적도 있었다.
맞는 부위도 점차 다양해졌다. 뺨에서 가슴팍, 복부, 팔, 허벅지, 엉덩이, 진수 씨는 온몸을 맞았다.
폭력과 폭언을 쏟아낸 여자친구는 마치 악귀가 빠져나간 듯 돌변해서는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매번 사랑을 입에 담았다.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내가 오빠를 너무 사랑해서 이렇게 화도 내고 손찌검도 하는 거라고, 사랑하지 않으면 분노도 서운한 감정도 없는 거라고 그녀는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곤 했다.
어쨌든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진수 씨는 생각했었다.
사랑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것이 진수 씨가 알고 있는 사랑이었다.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었다. 아프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었다.
여자친구의 말은 곧 규칙이었고,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당연히 처벌을 받았다.
동전이 몸을 뒤집듯 냉소와 호의를 오가는 여자친구의 이중적인 모습도 당연한 줄 알았다.
진수 씨는 함부로 대해지는 것에 익숙했다.
그의 연애는 상호적이지 않았다. 일방적이었다.
여자친구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비굴하게 구는 자신이 가끔은 싫기도 했지만, 좋기도 했다.
여자친구는 그런 진수 씨를 사랑했고, 동시에 경멸했다.
사랑과 경멸이 공존하는 연애가 기형적인 결과를 낳은 것이었다.
진수 씨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자, 머리가 차갑게 식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미안하고 무참했다. 큰 배신을 저지르는 심정이었다.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이 헤어지는 그 당연한 과정을 진수 씨는 이해하지 못했다.
진수 씨의 머릿속은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들어차 혼란스러웠다.
현재의 솔직한 심정을 여자친구에게 털어놓으면 좀 나을까, 싶었다.
여과 없이 터놓고 함께 얘기를 나눴으면, 했다.
연애가 처음인 본인의 쓸데없는 고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없진 않았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초짜니까. 초짜다운 한심한 기우라면, 그것대로 여자친구의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해소시키면 될 일이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언가로부터 한걸음 내딛어 극복한 기분. 두꺼운 껍질을 깨고 나온 초월한 느낌이었다.
사람은 이렇게 성숙해지는 거구나.
늘어지는 통화 신호음을 들으며 진수 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후 다섯 번이나 더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어디가 아픈가?
진수 씨는 걱정했다.
그때, 진수 씨의 머릿속에 주소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여자친구가 주문한 배달 상품 수령하기 위해 택배기사와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던 기억 덕택이었다.
그는 고민을 시작했다.
말도 없이 집까지 찾아가는 건 아무리 연인 사이라 할지라도 큰 결례가 아닐까?
하지만, 지금 여자친구를 챙길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할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는 남자친구잖아?
내가 연락이 안 되는 여자친구가 걱정돼서 집에 찾아갔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아무렴, 그렇고말고.
장시간의 숙고 끝에 결심이 섰고 진수 씨는 집을 나섰다.
행선지는 당연히 여자친구의 집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여자친구를 만나 방금까지 자신의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던 고민들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그는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는 재빠르게 진수 씨를 목적지에 데려다주었다.
택시 안에서도 계속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그는 긴장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시간째 연락이 안 되는 여자친구가 걱정되어 결정한 방문이긴 했지만, 어찌 됐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간 여러 이유들을 대며 허락하지 않은 그녀의 사적 공간에 드디어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진수 씨는 혹시 몰라 약국에 가서 감기몸살 약을 비롯한 여러 상비약을 구입하고, 편의점에서 레토르트 죽도 구입했다.
그의 상상 속에서 여자친구는 이미 몸져누운 환자였다.
핸드폰 하나 들 기운도 없어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있을 것이다.
빌라 1층 주차장에는 4개월 전 구입한 여자친구의 빨간색 자동차가 성의 없이 주차되어있었다.
진수 씨가 칠백만 원을 보태준 그 차량은 여자친구의 이미지와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작고 귀여운 외관과는 달리 의외로 사나운 엔진 성능이 그랬다.
여자친구의 탈것을 마련하느라 1년 넘게 들었던 적금을 깨야했지만 방방거리며 좋아라하는 그녀를 보자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상 무늬만 여자친구의 자동차였지, 가장 큰 수혜자는 본인일 거라고 진수 씨는 생각했다.
자동차 면허는 가지고 있지만 운전이 익숙지 않았던 그는 여자친구가 운전해주는 차를 얻어 탈 생각에 한때 들떴던 것도 사실이었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가 한결 편해지고 다양해지겠구나, 기대했다.
그러나 진수 씨의 기대와 달리 여자친구가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왜 데이트를 할 때 차를 끌고 오지 않느냐는 그의 질문에 여자친구가 내세운 이유는 실로 다양했다.
밤길 운전의 위험성과 유류비 상승, 빌라의 고질적인 주차 자리 부족 현상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했다.
운동을 잘못해서 발등이 욱신거리는데 그래서 브레이크 페달을 제때 밟지 못할까 무섭다고 할 때도 있었다.
근래에는 길거리에 우후죽순 늘어난 공유 킥보드의 위협적인 운행을 이유로 삼았다.
여자친구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진수 씨는 가타부타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퇴근시간 회사 앞에 차를 주차시켜놓고 본인을 기다리는 여자친구.
신나는 음악을 배경으로 뻥 뚫린 외곽 고속도로를 달리는 드라이브.
창문 너머 쏟아지는 장대비를 구경하며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는 은밀한 데이트.
비용을 보태줄 적에 상상했던 여러 로망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분명 서운했지만 서운함을 표현하지 않았다.
진수 씨는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데 서툴렀고, 그 행위 자체를 일종의 죄악이라고 여겼다.
여자친구 앞에서는 좋은 소리만 해도 부족하다고 여겼다.
현관문 앞에 선 진수 씨는 긴장을 덜어내기 위해 몇 번이고 심호흡을 반복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여자친구는 문손잡이를 잡음과 동시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큰소리로 외쳤다.
“배달 왔어! 얼른 나와.”
급히 꿰입은 듯 보이는 얇은 면 티셔츠 표면으로 돌출된 유두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진수 씨는 멍한 눈으로 방심한 여자친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집 안쪽에서 굵직한 목소리와 함께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속옷 차림이었다.
“벌써 왔다고? 아이씨, 나 씻고 먹으려고 했는데. 땀 때문에 찝찝해.”
익숙해 보이는 두 남녀의 대화와 외설적인 옷차림이 진수 씨를 더없이 슬프게 했다.
더불어, 기이한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진수 씨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배달 아닌데?”
“뭔 소리야? 그럼 누가―”
남자의 말에 반응한 여자친구가 시선을 돌려 진수 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피어오른 것은 역겨움. 그리고 지독한 혐오였다.
처음 보는 여자친구의 표정에 진수 씨는 피가 끓어올랐다.
열꽃처럼 끓어오르는 감정을 못 이긴 그는 여자친구를 거칠게 밀치며 현관에 들어섰다.
“어딜 들어와! 당장 나가!”
“왜?”
진수 씨는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만해있는 그로서는 눈을 부라리고 있는 여자친구의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왜긴 왜야, 끝났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나가. 오빠랑 나, 방금 헤어졌어. 보면 몰라? 그건 그렇고, 집 주소는 또 어떻게 안 거야? 존나 어이없네.”
“모르겠는데.”
그녀는 맥없이 대답하는 진수 씨를 흘겨보며 조소를 흘렸다. 그리곤 아까부터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속옷 차림의 남자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야, 네가 이 사람 좀 끌고 나가라. 말이 안 통한다. 나가서 알아듣게 설명 좀 해봐.”
그녀의 말에 반응을 보인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진수 씨였다.
“다 알아들었어.”
진수 씨는 그런 말과 함께 죽과 약이 든 비닐봉지를 내려놨다. 그리곤 있는 힘껏 여자친구의 팔을 잡아끌어 방으로 향했다.
“뭐하는 거야! 이거 안 놔?”
진수 씨는 자꾸 입을 여는 여자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한다는데 왜 자꾸 말을 하는 걸까.
그래서 그는 그녀의 입을 막기로 했다.
진수 씨는 두 손으로 여자친구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입술을 맞췄다.
입맞춤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여자친구는 벌레 한 마리가 닿은 것처럼 질색하며 손으로 입술을 닦아낸 뒤, 따귀를 올려붙였다.
“오빠, 미쳤어!? 우리 헤어졌다고. 그니까 꺼지라고.”
진수 씨는 기뻤다. 따귀를 맞다니.
따귀는 그녀가 전하는 최상의 애정 표현이자 허락의 의미였다.
‘나를 사랑해도 좋아.’
사랑하는 이의 솔직한 표현에 기쁨을 숨기지 못한 진수 씨는 여자친구를 꼭 끌어안았다.
진수 씨는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면, 입을 맞추면, 손을 잡으면, 하다못해 미소 띤 얼굴을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여자친구가 뱉은 헤어져, 라는 말이 전부 없던 일이 될 거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는 여자친구를 꼭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발버둥치며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질과 발길질에 진수 씨는 점점 흥분했다.
여자친구가 입고 있던 늘어난 티셔츠를 들어 올리자, 그토록 고대하던 것이 드러났다.
처음 마주하는 여성의 은밀한 신체부위에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꺼져, 꺼지라고!”
“경찰 부를 거야!”
“하지 마!”
짝! 하는 파열음이 방을 울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친구에게만은 절대 화를 내고 싶지 않았던 진수 씨.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여자친구에게만큼은…….
진수 씨는 발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방금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율했다.
나도 이렇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니.
그는 다시 한 번 여자친구의 뺨을 후려갈겼다.
손바닥과 뺨이 마주칠 때마다 알 수 없는 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진수 씨를 대신해 그녀의 집에 함께 있던 속옷 차림의 남자는 잔뜩 술에 취한 사람처럼 반쯤 풀린 눈으로 침대 위에 엉겨 붙은 둘의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두 다리 사이에 깔린 채 화들짝 놀란 눈으로 제 뺨을 부여잡고 있는 여자친구를 다정하게 쳐다보며 진수 씨가 말했다.
“사랑해.”
진수 씨는 신열에 들뜬 환자처럼 파르르 떨었다.
“사랑해, 자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