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다음 주는 다음 주에 온대요

기다림

by 류해인


1. 수요일



“성준아~ 얼른 일어나서 아침 먹어~”


아침 7시. 주부 신지영의 하루는 아들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영이 방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강성준~ 시간 많이 됐어!”

“……일어났어요.”


방안에서 힘없는 목소리 한 점이 겨우 문 틈새를 통과해 흘러나왔다.

방문 앞에 덩그러니 선 채로 지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침 먹어야지~”

“……안 먹어요.”


올해로 고2가 된 하나뿐인 아들. 지영은 언제부턴가 다 큰 아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제 아빠를 닮아 유난히 까무잡잡한 피부와 팔다리뿐 아니라 손등과 발등까지 뒤덮여있는 까맣고 빳빳한 털을 볼 때면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또 뭘 그리 먹고 컸는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174cm인 제 아빠의 키를 훌쩍 뛰어 넘은지 오래였다. 고등학생이 된 뒤로 유독 말수가 줄어든 성준이 어느 날엔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귀가해서는 알려주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대뜸 하얀 종이를 내밀기에 성적이 잘 나와 자랑하려는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다. 이런저런 숫자와 그래프가 적혀있는 종이는 얼핏 보면 시험성적표와 크게 다르지 않아보였다.


그러나 종이 좌측 상단 부근에 팔다리를 쭉 뻗은 모습의 자그마한 사람이 그려진 신체검사결과표에는 성준의 똘똘한 머리가 아닌 182cm에 75kg이라는 건강한 신체만 기재되어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시험성적표와 유사한 점이 있다면, 점수가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94점. 신체점수였다.


지영은 습관적으로 이정도면 반에서 몇 등인지 물으려다 말았다. 어찌됐든, 건강해 보이는 아들이 실제로도 건강하다니 다행이었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적대국인양, 방문을 유일한 소통 통로로 두고 사랑을 속삭이는 절절한 연인처럼 지영은 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번 주에 엄마랑 약속했잖아. 이번 주부터는 꼬박 아침 먹기로! 얼른 나와. 얼른!”

“…….”


저번 주에 언급한 다음 주가 진즉에,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 주부터 이번 주로 이름을 바꿨다는 사실을 알아챈 아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강성준.”


으름장을 놓듯 어조를 바뀐 것이 민망하게 방안에선 여전히 어떠한 대답도 없었다.


“……성준아?”

“여보, 됐으니까 그만해.”


방문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두 모자의 속 터지는 실랑이가 여간 답답했는지 지영의 남편 강준기가 나섰다. 그는 일찍이 일어나 아침식사 대용 시리얼을 먹던 참이었다.


“말 없는 거 보니까, 씻으러 갔나보지.”


“……지 먹으라고 밥도 새로 안쳤더니만.” 서운한 듯 삐죽 입술을 내민 지영이 부엌으로 돌아갔다. “하여간, 성준이한테 저 방을 주는 게 아니었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릇째 들고 남은 우유를 들이키던 준기가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저 방이 가장 따듯하다고 방 바꿔준 게 누군데?”


“아니. 그땐 조금이라도 편하게 공부하라고 그랬던 거지.”


지영이 머쓱한 얼굴로 변명했다.

반면, 남편의 음성은 메마르기 짝이 없다.


“근데 지금은 그게 불만이야?”


“저 방에 화장실이 붙어있어서 그런가? ……더 얼굴 보기 힘드네.”


“당연하지. 설마 그걸 이제 안 거야? 컴퓨터도 안에 있겠다. 부족한 게 뭐가 있다고 밖으로 나오겠어. 가끔 배고플 때나 나오겠지.”


한집에 살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영 얼굴보기가 힘들다. 지영은 그런 사춘기 아들의 얼굴이 붙어있기라도 하듯이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방문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거기엔 아쉬움과 서운함이 깃들어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도 방 화장실에서 씻고 바로 학교로 가버리고. 밤에 집에 와서는 다시 방에서 씻고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계속 반복이야.”


하소연하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남편 준기가 건조한 어투로 대꾸했다.


“성준 엄마, 원래 다 그래. 성준이 쟤가 벌써 열여덟이야. 당신은 저 나이 때 안 그랬어?”


어느새 그는 약 선반에서 영양제를 꺼내 차례차례 손바닥에 올려두기 시작한다.


“……저 나이에 나는 강준기, 당신 만나서 이렇게 늙은 거잖아.” 지영이 돌연 지나간 세월을 하소연하듯 투덜댔다.


“마흔도 안 된 당신이 늙은 거면, 난 뭐냐?”


“뭐긴 뭐야. 당신도 늙은 거지. 서른여덟도 늙었는데, 마흔둘이 젊을까봐?”


아내의 말에 준기는 이마를 반쯤 덮은 앞머리를 손가락빗으로 휙 넘겼다.

“아직 봐줄만 해. 당신이 보기에는 영 아니야?”


올해로 42살이 된 준기는 실제로 옛날부터 동안 외모를 자랑했다.

깨끗한 피부와 풍성한 머리숱, 꾸준한 운동으로 단련된 신체 덕이었다.


반면, 18살에 과외선생님이었던 4살 연상의 준기를 만나, 20살이 되자마자 성준을 임신한 지영은 딱 제 나이로 보였다. 선천적으로 살이 붙지 않는 얇은 팔다리 덕택에 옷맵시는 제법 봐줄만했지만.


그마저도 꾸준한 관리부재로 켜켜이 쌓여만 가는 뱃살에 하루하루 영락없는 아줌마 몸매로 전락하고 있는 신세였다.


“……나도 운동 시작해야 되는데.”


그 흔한 뱃살 하나 없이 365일 호리호리한 몸매를 유지하는 남편을 보며 지영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술 담배도 모자라 군것질까지 멀리하는 습관과 주4회 잊지 않고 방문하는 헬스장 때문인지, 남편의 몸에선 아직 젊음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그 덕택인지는 몰라도 연애시절부터 자그마치 20년을 지켜본 사람이지만,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헬스 재미없다고 때려치운 사람이 누군데.” 영양제를 입에 털어 넣은 준기는 물통과 속옷이 담긴 쇼핑백을 챙겨들었다. “나 다니는 헬스장 오라니까. 내가 가끔 운동 가르쳐줄게.”


“…….”


“이봐. 맨날 말만 하고. ……에휴, 당신보다 네 살이나 더 먹은 남편은 운동갑니다.”


말없고 뱃살은 많은 아내를 뒤로 하고 준기는 집을 나선다.




엄마의 우레 같은 외침에 잠에서 깬 성준이 기지개를 켰다. 두 팔과 다리를 쭉 늘리곤 곧바로 팬티를 확인했다. 다행히 바싹 말라있었다.

18살이 되자마자 거짓말처럼 몽정이 시작됐다. 15살 때 처음으로 자위행위를 했다.


그때 이후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아주 건전한 방법으로 욕구를 배출해왔다. 그런데도 밤새 쌓이고 쌓인 욕구는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배출되곤 했다. 급속충전기가 따로 없다.


“……성준아, 얼른 나와. 아침 먹어야지!”


아침 댓바람부터 아들내미 밥 한번 먹여보겠다고 방문 앞에 서서 연신 큰 소리로 외쳐대는 엄마.

엄마의 성화에 성준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는 이유도 없이 한숨이 나올 때가 많았다.

한숨을 내뱉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는 걸 인지한 적도 적지 않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학교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한숨은 집에서만 터져 나왔다.


한사코 안 먹는다고 무신경한 대답을 한 성준은 그대로 침대를 빠져나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빳빳해진 아랫도리 때문에 소변을 보기가 불편했다.


변기 앞에 서서 잠시 멍하니 정면 거울을 쳐다봤다. 머리카락이 자체 생산해내는 기름 때문인지 얼굴이 한층 못생겨진 듯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건 등굣길에 길고양이에게 아침인사를 받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마냥 못난 얼굴은 아닌듯하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큰 키와 탄탄한 체격, 구릿빛 피부가 아주 듬직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성준은 영 성에 차지 않는지 거울 속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꼼꼼한 눈으로 살폈다. 그러다 돌연 여자친구 생각이 났다.

사귄지 한 달이 막 지났다. 귀여운 외모에 애교가 많은데다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스킨십에 성준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입술을 맞췄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진한 입맞춤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쪽, 하고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이 노크를 하고 잠깐 들렀다 간다는 쪽지를 남기고 간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기껏해야’가 당시 상황을 되짚어보는 지금도 기껏해야 그저 그런 수준의 기억으로 다가오리란 법은 없다.

여자친구 채희의 입술과 향기로운 샴푸 냄새가 저절로 떠올랐다. 뒤이어 성준은 첫 뽀뽀를 마친 직후 나눴던 대화까지 기억해내고 말았다.


“저기, 성준아. 다음 주 목요일에 약속 있어?”


“……목요일? 아니? 약속은 없는데, 나 영어학원……, 아니다. 수학이다.” 기습적인 입맞춤에 성준의 사고능력은 잠시 일정수준 격하된 상태였다.


“학원은 몇 시에 끝나?”


“어? 나 9시쯤?” 성준이 대답했다.


“……그럼, 끝나고 우리 집으로 올래?”


간드러지는 채희의 목소리와 수줍음과 고혹함이 담긴 표정에 성준은 아랫도리뿐 아니라 온몸이 딱딱해지고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엇이든 확실히 하고 넘어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 성준은 냉큼 좋다고 대답하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참아냈다. 대신 만전을 기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확인 질문을 날렸다.


“……어……. 집? 갑자기 집은 왜?”


“그날 부모님 안 계시거든. 같이 놀다가 다음 날 학교 같이 가면 어떨까 해서 물어봤지.”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말이 성준의 뇌로 접수됐다. 여자친구의 대답에 머릿속 생각회로가 미친 듯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같이 논다, 는 문장에 자위행위를 시작할 때부터 줄곧 기다려왔던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18세 남학생은 확실한 걸 좋아하는 법이다. 특히 그쪽 분야에서는.


하지만, 성준은 차마 묻지 못했다. 그저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그, 그럴까?”


그렇게 오고야만 이번 주.

여자친구의 제안을 들은 날은 저번 주 토요일. 분명 다음 주 목요일이라고 했으니, 이제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면…….


성준의 샅에 매달려 스멀스멀 몸집을 줄여가던 소중한 물건은 다시금 불끈 솟아올라 12시를 가리키는 지경에 이른다.




“성준아, 학교 잘ㅡ”


지영의 배웅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남편은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친 뒤 바로 출근할 것이다. 가정주부 신지영의 아침 할 일은 이걸로 끝이다.


그녀는 남편 준기가 내려놓은 커피를 잔에 담고는 거실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리곤 잠시 귀를 쫑긋 세웠다. 웅웅ㅡ 은근히 큰소리로 울려 퍼지는 부엌 냉장고 소리를 제하고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내 안심한 지영은 스마트폰을 꺼내 어플 아이콘을 눌렀다. 주식투자 어플이다.




운전 중인 준기는 상념에 빠져있다.

지난 주 금요일, 윤희에게 들은 말 때문이다.


“강 쌤, 나 임신했어요.”


퇴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옥상에 나란히 선 채로 듣는 직장 동료의 임신소식은 꽤 산뜻하면서도 시간 때우기에 적절한 화젯거리였다.


“그래? 축하해! 이야, 좋겠다. 결혼 한 달 전에 임신이면 딱 적당하네.” 커피가 담겨있는 텀플러를 난간에 올려놓은 준기가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렇죠?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아요. 사실, 슬슬 걱정되기도 했거든요. 저도 이제 서른넷이니까. 어려울 줄 알았는데 다행이죠.”


“진짜 축하해. 남자친구는? 좋아하지?”


“아직 말 안했어요.”


“왜? 식 먼저 올리고 나중에 말하려고?” 준기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점심시간에 산부인과 다녀왔거든요. 가서 정밀검사 받았는데, 결과는 다음 주에 알려준대요. 일단 지금은 테스트기로만 확인해본 거예요.”


준기는 필요 이상으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직장 동료 윤희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매사에 밝고 활기차던 그녀에게도 임신이라는 중차대한 일이 들이닥쳤을 때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 남자친구한테는 그때 말해주려고? ……뭐야, 그럼 내가 가장 먼저 들은 거야? 이거 영광인데?”


“당연히 가장 먼저 알아야죠. 애기 아빤데.”


그 대목에서 준기는 웃음을 거뒀다.

얼굴에 진공청소기를 갖다 대기라도 한 듯 웃음이 싹 사라졌다.


“……뭐? 뭐라고 했어, 지금?”


“내 뱃속에 강 선생님, 당신 아이가 있다고 했어요.”

“…….”


말없이 옥상 난간 너머 건물 숲을 내다보는 준기를 보며 윤희가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줘요?”


“아, 아니, 아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준기가 말했다. 그답지 않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무, 무슨 그런 지독한 장난을 쳐. 누가 들으면 김 선생이랑 내가 같이 잠이라도 잔 줄 알겠네.”


“잠은 같이 안 잤죠. 섹스를 해서 그렇지. 그날, 우리 했잖아요,”


섹스라는 단어에 민망해하는 중학생처럼 준기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목소리는 낮추고……. 하, 그래. 했지. 아무튼, 그때 술 마시다가 우리 둘 다 만취해서ㅡ”


“강 쌤은 술 안 마셨잖아요?” 윤희가 말을 끊고 더없이 간결한 어조로 말했다. “저만 마셨어요.”


“……그래. 뭐, 아무튼. 그랬다 치고…….” 준기가 불안한 듯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왜 그랬다 쳐요? 진짜 했다니까요? 그날 강 쌤 되게 열심히 했는데, 저도 꽤 좋았고.”


준기는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하, 그래그래……. 나는 되게 열심히 했고 김 선생 당신이 꽤 만족한 섹……, 관계를 했어. 그런데.” 그는 다시 목소리 음량을 줄였다. “분명 마지막에 밖에다…….”


임신이라는 말에는 선뜻 웃으며 축하해주던 남자가 섹스라는 단어에는 학을 떼는 이유가 윤희는 궁금했다. 보통은 반대 아닌가? 그녀는 피식 웃었다.

“뭐야, 기억하고 있네요.”


“……김 선생도 기억하지? 분명 내가 밖에다 쌌ㅡ”


윤희가 또 말허리를 잘랐다. “중간에 샜나보죠.”


“아니, 나오지도 않은 게 왜 새겠어. ……말도 안 되지.” 그렇게 말하는 준기의 얼굴에서는 젊음이 줄줄 새고 있었다. 왜인지 옥상에 올라오기 전보다 2, 3년은 족히 늙은 것 같았다.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윤희는 당연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잠금 기능이 잘 안 되나보죠. 막판에 힘 빠져서 샌 거 아니에요?”


“글쎄, 그건 그런 매커니즘이 아니라니까?”

무척 중요한 내용이 있는데 학생들에게 어디서부터 어떤 방식으로 설명해줘야 할지 막막해하는 선생님처럼 준기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럼 어떤 식으로 동작하는데요?”

질문의 내용과는 달리 전혀 궁금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멀뚱멀뚱 눈앞의 남자가 아연실색하는 광경을 관찰하고 있었다.


“수도꼭지처럼 꽉 안 잠겼다고 한 방울씩 새는 게 아니라…….” 한참 단어를 고른 준기가 덧붙였다. “거기에 새로운 문이 생기는 거야. 그전까지는 없던 문이 한순간에 팍, 하고 생기는 거라고. 문이 없는데 중간에 어떻게 나와. 나올 곳이 없잖아.”


“뭐……, 그래요. 섹스가 중요하지 그런 부분까지 꿰차고 있어야하는 건 아니니까.”

윤희는 말 그대로 이 문이든 저 문이든 무슨 상관이냐는 어투였다.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급기야 콧잔등에 땀이 송글 맺힌 준기는 땀을 훔쳐내며 말했다. “아무튼, 지금 상황이 그렇다 이거지. 그, ……결과는 언제 나온다고?”


“다음 주 목요일이요. 근데 강 선생님, 많이 놀랐나 봐요? 아무튼, 아무튼, 이러는 거 놀랐거나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 아니에요?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정곡을 족히 서너 번쯤 찔린 듯 준기의 동공이 건뜻건뜻 나부꼈다.

“응? 아니야. ……아무튼, 다음 주 목요일?” 말을 맺자마자 준기는 실소를 터트렸다. “아, 또 그러네.”


“강 쌤, 많이 놀랐네. 놀라고, 긴장하고, 둘 다 한 거 같은데?”


상념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준기는 거칠게 차를 몰아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헬스장에 가서 땀 흘려 운동할 기분이 아니다. 윤희의 말을 듣고 주말 내내 온몸의 혈관에 댐이 생긴 듯 답답했다.


자동차를 주차시키고 시동을 끄자마자 스마트폰이 울렸다. ‘○○학원 영어 김윤희’라고 저장된 번호. 준기는 냉큼 전화를 받았다.


“어, 지금 주차장. 올라갈게.”




오전 10시, 지영은 속이 탔다. 한 시간째 식탁의자에 앉은 채로 스마트폰 화면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오르내리는 차트를 볼 때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심정이었다.

그때 느릿한 걸음으로 강준걸이 말없이 나타났다.


“…….”


“아버님, 일어나셨어요?”


시아버지 강준걸은 현관 중문과 거실 사이에 위치한 좁은 방에서 지내고 있다. 지병으로 일찍이 아내를 보낸 그는 치매를 앓고 있다.


아직 초기지만, 종일 환자를 돌봐야하는 지영 입장에서는 마냥 버거울 따름이다.


그중 가장 힘든 점은 단연 생뚱맞은 질문에 대답하는 일이었다. 시아버지가 하는 질문 열에 아홉은 적절한 대답은 고사하고 질문의 의도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간혹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겠다, 싶은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을 하면 아니다, 아니야. 하며 흥미를 잃은 어린아이 같은 맥빠진 얼굴을 하고는 방으로 돌아가 버리곤 했다.


“일어났지 그럼! 앉았게!” 강준걸은 스멀스멀 닥쳐오는 안개처럼 하염없이 거실로 가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기다렸단 듯이 말을 이었다. “이제 앉았지!”


“네~ 잘 앉으셨어요. 아침은, 오늘도 괜찮으세요?”

매일 아침 이렇게 물으면서도 지영은 있는 대로 긴장했다. 명확한 이유는 댈 수 없지만 매번 그랬다.


“얘, 어멈아.”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강준걸은 대뜸 제 며느리를 불렀다.


밥 대신 과일이라도 내갈 요량으로 의자에서 일어나던 지영이 몸을 반쯤 굽힌 상태로 부름에 응답했다. “네, 아버님.”


“다음 주는 언제 온대냐?”


“……네, 네?” 지영의 목에서 힘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따로 연락 같은 건 없었냐?”


“다음 주……한테, 연락이…….”


안 그래도 깜깜하고 마구 뒤엉킨 머릿속이 강준걸의 질문 때문에 더 복잡해진 느낌이다. 그때 문득, 좁은 방에 있는 작은 TV로 홈쇼핑 방송을 즐겨보던 시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영은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아하, 아버님 홈쇼핑 하셨어요? 그게 다음 주에나 도착한대요?”


“아니이~” 강준걸은 외려 더욱 또렷한 발음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했다. “다음 주. 이번 주 바로 뒤에 오는 주. 그거 말이다. 그게 언제 오냐고.”


“……글쎄요. 아버님, 저도 잘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이면 시아버지가 던지는 질문들에게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음을 깨달은 지영은 언제부턴가 습관처럼 그 말을 덧붙이곤 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고민하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고민에 고민을 이어가며 정성껏 대답한다고 한들 말끔한 정신으로 돌아올 시아버지도 아니었다.


“……그러냐? 얘는 도대체가 왜 연락이 없어 그래.”

며느리의 시원찮고 성의 없는 대답에 흥미를 잃었는지 강준걸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이나 더 잘란다. 연락오거든 꼭 나한테 먼저 알려주고.”


그렇게 강준걸은 연극무대에 오른 배우가 주어진 대사를 하고 물러가듯 스르르 거실을 빠져나가 방으로 들어갔다.


“예……, 아버님. ……쉬세요.”

휘몰아치듯 사실감 넘치는 연기를 감상한 심정으로 지영은 소곤거렸다. 그러곤 다시 스마트폰 화면에 빨려 들어갔다.


-7.81%, -8.82%, -9.27%, -10.11%, -8.18%


등락률은 시시때때로 모습을 달리했다. 등락률이 아니라 줄어드는 수명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매수한지 한 시간이 막 지났을 뿐인데, 이백만원에 육박하는 돈을 잃은 셈이다.


“성준 엄마, 요새 주식 시작했다고 했지?”


지난 주말, 동네 정육점에 방문한 신지영에게 사장 조 씨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네? 네…….”


“내가 좋은 소스 하나 줄까?”

조 씨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주위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5년 단골이니까 알려주는 거야. 돈 있어도 못 사는 완전 고급. 알지? 원래 뭐 하나 살 때도 단골 많은 집은 가면 안 돼. 진짜 좋은 물건은 단골들 주려고 미리 빼두는 법이거든.”


주식 초짜인 지영은 흔히들 사용하는 주식 은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소스요? 저야 주시면 감사하죠.”


비싼 재료로 만든 수제소스라도 쥐어주려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조 씨가 대뜸 말했다.


“○○제약, 알지?”


그녀는 고개를 절래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신기하게도 모른다는 고갯짓에 조 씨는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래? 이 회사가 간암 치료제 만드는 제약회산데, 최근에 임상실험 성공해서 난리도 아니잖아. 알 사람들은 다 아는 거야.”


“아…….”


그 알 사람들 목록에 새롭게 본인 이름이 추가된 것에 기뻐해야하는지 난감해하던 차에 조 씨가 신이 나서는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못해도 사십 프로. 어때? 현실적이지? 이런 소스들은 죄다 무슨 최소 두 배는 뛸 거라고 말해대잖아. 근데 이건 아니야. 그만큼 더 신뢰할 수 있다는 거지.”


거기까지 듣고서야 지영은 세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첫째는 아파트 단지 내 작은 상가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조 씨가 비싼 독일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는 것.


둘째는 평소 느긋한 태도로 미루어 봤을 때 장사에 목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필시 정육점 수익에 얽매어 있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건 곧 경제적으로 꽤나 여유로운 사람일 거라는 추측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주6일, 종일 정육점에 붙어있는 사람이 부가수입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주식이 유일할 거라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마지막 셋째는…….


“사장님, 고기 빨리 주세요.”


필터 교체를 위해 정수기 회사에서 직원이 방문하기로 약속되어있다는 점을 깜박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조 씨가 건네는 앞다리 살을 급히 챙겨들고 정육점을 나섰다.


그러자 조 씨는 지영의 등에 대고 다급하게 외쳤다.

“원래 월요일이랑 화요일, 금요일에는 주식거래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무조건 수요일에 샀다가 목요일에 팔아!”


황급히 집으로 돌아온 지영은 직원이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는 순간에도, 저녁 준비 중에도, 시아버지의 엉뚱한 질문에 건성으로 호응하면서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아쉬워했다.

왜 하필 오늘이 토요일인 것인가. 다음 주는, 수요일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걸까.


월요일. 화요일.

지영은 주식 매수의 유혹을 참고 또 참았다. 이틀을 가만히 차트만 들여다보며 조 씨가 한 마지막 말의 의미를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월요일은 주말을 꾹 참고 기다린 사람들이 뇌의 절반쯤을 밖에 내놓은 상태로 매수 행진을 벌여댔기 때문에 장 마감시간이 되면 내내 높이 솟아오르던 불기둥도 싸늘한 폭포로 바뀌기 일쑤였다.


화요일은 월요일에 비하면 양반은 못 되도 중인은 족히 될 수 있음직한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 장 마감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하락세였다.


그래서 주식 매수의 최적의 타이밍이란 수요일이었어야 했는데……, 지영의 주식잔고 평가손익은 처참했다.


“그래도 아직 아니야. 내일이야, 내일.”


그녀는 결심을 다잡으며 점심준비를 위해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2. 목요일



준기는 오늘도 평소처럼 부지런히 일어났다. 아침밥과 각종 영양제를 간신히 챙겨먹고 집을 나섰다. 윤희와 함께 산부인과로 향했다.


아내에게 말은 안 했지만, 학원에는 하루 휴가를 냈다. 피가 말라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다.


“김윤희 님?”


산부인과 접수처 직원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없이 준기 옆에 앉아있던 윤희는 대꾸 없이 쭈뼛 일어났다.


“진료실로 오실게요.”


준기는 가만 눈을 감았다.

아침에 먹은 것들이 역류해 그대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이윽고 지금과 유사한 상황이 18년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미혼이었던 강준기는 어느덧 기혼이 되었다는 점과, 슬하에 고등학생 아들을 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아내가 있다는 점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아내가 있는 사람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갖는 일, 애초에 한 침대에 있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준기는 그 잘못된 일들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혼을 앞둔 직장 동료 윤희가 저녁식사를 제안했다. 고민이 있다고 했다. 표정이 어두웠다. 기혼자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가깝게 지내던 사이인지라 식사자리는 예상대로 즐거웠다. 술이 오갔다. 사실, 오갔다기보다 준기는 열심히 윤희의 술잔을 채워주기만 했다. 그녀는 넙죽넙죽 술을 받았다.


문제는 인사불성이 된 윤희를 집에 데려다줄 때 터졌다.


“김 선생, 몇 층이라고 했지?” 윤희를 부축하며 엘리베이터 앞에 선 준기가 물었다.


“우리 집은 11층! 어디라고? 11층. 왼쪽~ 비밀번호는 1234!”


평소답지 않은 맹한 모습에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뒤이어 윤희가 뱉은 한 마디에 준기는 무너지고 말았다.


“……내 남자친구는 섹스를 해도 해도 너어~무 못해요. ……젖은 적이 없어. 강 쌤은 잘해요? 하긴, 쌤은 다 잘할 거 같긴 해. 운동도, 일도, 섹스도. 얼마나 잘해요? 궁금하네.”


그렇게 둘은 침대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의 쾌락과 고삐를 푼 자제력이 준기를 이곳으로 인도했다.


“김윤희 님? 오늘은 보호자도 같이 오셨네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윤희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날 옥상에서 보여준 태연하다 못해 장난스런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인생의 변곡점을 앞둔 사람 특유의 긴장어린 얼굴이랄까.


의사는 깍지 낀 두 손을 책상에 올리자마자 본론에 들어갔다.


“두 분 다 바쁘실 테니 정밀검사 결과부터 바로 말씀드릴게요.”


준기는 다시 질끈 눈을 감았다. 심장의 떨림이 두 다리에까지 전해졌다.


“김윤희 님의 정밀검사결과, 임신이 아닙니다.”




오후 3시 20분. 지영은 십년 묵은 체증이 가신 듯 긴 한숨을 뱉었다.


+1.12%


지영의 최종 성적이다.

수수료를 제하고 나면, 20만원 남짓한 수입을 올린 것이다.


주식을 처음 접한 사람이 이틀을 투자해 얻은 수입치고 괜찮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맘 졸이며 깎아낸 수명까지 셈한다면 오히려 손해라는 게 그녀의 짧은 감상이었다.


따지고 보면 수요일 매수, 목요일 매도라고 일러준 정육점 조 씨의 말은 다 맞아떨어진 것이다. 다만, 사고파는 정확한 시간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지영의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다시는 소문에 이끌려 주식투자에 손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한 그녀는 비교적 상쾌한 기분으로 밀린 집안청소를 위해 손걸레를 집어 들었다.




오후 9시 10분.

학원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도망치듯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건물에 시한폭탄이라도 설치된 것처럼 학생들은 비명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렀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듯.


거의 마지막으로 건물을 빠져나온 성준은 돌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원하는 학생이 아니라 출소자라도 된 것처럼 깊은 회고에 빠진 표정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한숨을 거듭 내쉰 그는 걸음을 옮겼다.

매일 걷던 귀갓길이 아닌, 처음 밟아보는 길이다.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한 길이라고, 성준은 의지를 다졌다.




“그래서, 오늘 성준이 녀석은 외박을 한다고?”


“그렇다니까, 몇 번을 얘기해. 아까 저녁 먹을 때부터 말했잖아.”

지영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게 하는 남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내일 학교에서 수행평가가 있는데, 밤새 그거 준비한다고 갔다고.”


“무슨 수행평가? 그걸 굳이 밤까지 새가면서 해야 되나?”


계속되는 준기의 물음에 그녀는 미간에 종이를 끼울 수 있을 정도로 인상을 구겼다.

“나야 모르지. 애가 말을 해줘야 알지.”


“물어봐야 애가 답을 해주지.” 준기는 얼핏 들으면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않은 날선 어투로 받아쳤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애한테 관심 가지고 난리야?”


자칫 서운할 수 있는, 적어도 반나절정도는 입을 쭉 내밀고 있어도 무방할 말이지만, 준기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성준이 그 놈, 여자친구 생긴 거 아니야?”


지영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는지 과연 놀란 눈치였다.

“……에이, 설마. 나한테 말도 안 했는데?”


“당신이 성준이한테 물어봤어? 여자친구 있냐고?”


“……아니? 애가 말을 해줘야…….”

지영이 말끝을 흐렸다. 아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게 언제인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심정이 다 드러나는 아내의 표정에 어이없어하며 준기가 나무랐다.

“설마는 무슨. 전에 당신이 그랬잖아. 요새 부쩍 외모에 신경 쓰는 거 같다고.”


“그렇긴 하지…….”


순순히 인정하는 아내를 보며 준기는 혀를 끌끌 찼다. “고작 열여덟밖에 안 된 애가 벌써부터 그러면 안 되는데. 일찍 한다고 마냥 좋은 건 또 아닌데 말이야.”


아이에서 삽시간에 남자가 되어버린 아들을 떠올리던 지영은 남편의 말에 가시라도 박혀있었는지 급작스레 따지고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는 당신은? 내가 당신 자취방으로 처음 갔던 게 몇 살인지 알아? 열여덟이었어. ……기억도 안 나지? 나 2학기 기말고사 끝나고 대낮부터 불러가지곤ㅡ”


그때,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시아버지 강준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얘, 어멈아! 아직 연락 없냐!?”


집안을 가로질러 들려오는 시아버지의 쩌렁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지영은 고개를 쭉 내밀었다.


“네? 어떤 연락이요? ……아, 성준이요?”


방금까지 남편과 나눈 대화를 다 들으신 걸까, 그녀는 사뭇 걱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마지막에 한 말은 남편의 부모 된 입장에서 듣기엔 다소 거북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거 말고~ 다음 주 말이다, 다음 주. 아직 안 왔어?”


큰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쩔쩔매는 아내를 가만 지켜보던 준기가 당최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다음 주? 다음 주가 왜?”


지영이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아버님이 어제부터 계속 다음 주는 언제 오냐고 물어보셔. 모르겠다고 했더니, 이제는 연락 온 거 없냐고 하시네.”


“도대체 그게 뭔 소리야?”


휘발유 가격이 하루아침에 500원 인상됐다는 소식을 들은 택시기사처럼 준기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이내 거침없이 거실로 향했다.


“아버지, 저 잠깐 애 엄마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들어가 쉬세요.”


병색이 완연한 아버지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다정한 아들의 말로 들릴 법도 했지만, 그건 지나가는 결로 들었을 때 얘기다.


종일 집에서 한 거라곤 휴식밖에 없던 노인에게는 부적절한, 그야말로 혹할 구석이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속뜻은 그저 이상한 말은 그만 지껄이고 방해되지 않게 방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다음 주……, 다음 주 언제 오나 확인해봐야 되는데…….”

왜인지 하나뿐인 아들에게만큼은 자신감 없이 웅얼대듯 말하게 되는 강준걸이다. 언제나 그랬다.


“아이, 그러니까요. 내일 마저 얘기하세요.”


준기는 급기야 편안히 소파에 앉아 쉬고 있던 아버지의 앙상한 팔을 잡아끌듯이 들어 올리고는 다 귀찮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결론지었다.


“다음 주는 다음 주에 오겠죠. 자, 이제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시고 들어가세요.”




여자친구 채희 집에 무사히 도착한 성준은 현관 차임벨을 누르지 못하고 한참을 서서 시간을 죽였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했다.


두 마음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듯 성준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때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안 들어오고 뭐해?” 고개를 쏙 내민 채희가 갸우뚱했다.


“……어? 온 거 어떻게 알았어?”

성준이 순간 몸을 뒤로 젖히며 질문했다. 툭 튀어나온 갈라진 목소리가 그렇게 한심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채희가 재깍 대답했다. “내가 공동현관문 열어줬잖아.”


“아…….”


“들어와.” 채희가 성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

성준은 맥없이 끌려갔다.


그이후로는 자연스러운 수순이 이어졌다.


성준은 샤워를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서야 세면용품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 수 없이 화장실 샤워부스 안에 놓인 제품들을 일일이 확인해가며 사용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중요 부위를 거듭 깨끗하게 씻었다.


화장실에서 머리까지 말리고 나온 성준을 기다리는 건, 잠옷차림의 여자친구다. 은은한 거실 조명 아래 스스럽게 웃고 있는 채희를 보는 순간, 성준은 피가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


뜨거운 시선을 끈기 있게 마주한 채희는 성준의 손을 잡고 본인 방으로 데려갔다. 방에 들어서자 기분 좋은 향이 감돌았다.

이윽고 두 남녀는 한 침대에 빨려 들어갔다.


달콤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애석하게도, 성준은 여자친구와 학수고대하던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여느 성인남성과의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훌륭하지만, 사전준비 단계에서 미흡함을 보이고 말았다.


서로의 몸을 호기심어린 손길과 시선으로 바삐 탐닉하고 있을 무렵, 채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준아, 가방에 있어?”


한창 고조된 분위기에 건넨 질문치고는 무척이나 엉뚱하다고 생각한 성준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으응? 뭐가?”


“……그거, 가방에 있냐고. 아까 교복 바지엔 없던데.”


"응?"


모호한 질문을 재차 던지는 여자친구를 보며 성준은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로 응대했다.


그러자 남자친구의 무지와 무신경을 눈치 챈 채희는 슬그머니 몸을 내빼고 다시 물었다.


“…성준아, 콘돔…… 안 가져왔어?”


“…….”


그렇게 두 청춘의 밤은 불타지 못한 채 끝났다.




다음날 아침, 양말을 신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채희가 말을 걸었다.


“성준아. 그, 다음 주에 또 올래? 월요일에. 그때도 집이 비거든. ……연달아 외박은 좀 그런가? 내 말은, 안 자고 가도 되니까…….”


등교 준비를 마친 성준은 매번 조리 있게 말하던 여자친구가 더듬더듬 말하는 모습이 퍽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번에도 냉큼 좋다고, 이번에는 준비물도 잊지 않고 챙겨오겠다고, 내친김에 시청각 자료로 예습도 철저히 해오겠다고 웃으며 대답하려다 문득 떠오른 기억에 대답을 바꿨다.


“미안해서 어쩌지? 그날 할머니 제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