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혹시 유튜버에요?

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by 류해인

#문도현, 강재훈, 최병기

서울교통공사 관제센터로 가던 문도현 경사는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붓는다.


차마 영웅의 앞이라 육성으로 할 수는 없다.


“차가 너무 막히네요.”


눈이 온전히 달린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정보를 최병기 순경이 굳이 직접 입 밖으로 늘어놓는다.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훌륭한 관찰력이다.


그는 중얼중얼하면서 허벅지 안쪽 살을 꼬집는다.


심각한 사건을 목전에 둔 상황임에도 부족한 수면시간으로 인한 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어딜 이렇게들 가는 거야. 그냥 대충 근처 식당에서 먹지.”


문도현 경사가 연신 투덜댄다.


바로 뒤에는 강재훈이 두 손을 마주잡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언뜻 보면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꽉 맞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해있다.


끌어 오르는 분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강재훈은 결국 이번 사태의 원인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직접 아이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지 않은 본인의 게으름을 탓하기 시작한다.


불규칙하고 점점 거칠어지는 강재훈의 숨소리를 인지한 문도현 경사는 너무 무책임하고 대책 없는 말이라 죄송하지만 너무 걱정 말라고 한다.


또 이런 말밖에 못해 다시 한 번 죄송하다고 중얼거린다.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이요.”


졸음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최병기 순경이 내비게이션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 중얼거린다.


“……나도 알아.”


역시 긴장과 피로에 지친 문도현 경사가 퉁명스레 대답한다.


열차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사뭇 불안감이 치민다.





#류기태, 고재성, 선하나, 김선범, 정성도, 장석기, 이한성

대화상대 목록에 첫 번째 이름을 채운 류기태는 다음, 하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지라 손발이 척척 맞기란 힘들 듯하다.


다음, 하면 누군가 알아서 본인을 소개할 거라 생각했던 류기태는 하는 수없이 특정인물을 콕 집어 말한다.

“저기, 혼자 땀 뻘뻘 흘리면서 기도하는 양반.”


혼자만의 싸움에 심취한 고재성은 본인이 불린지도 모르고 마음속으로 잔잔한 호수를 상상하고 있다.


반응이 없자 과할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선하나가 말을 건다.


“아저씨, 아저씨 차례에요.”


그러나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고재성은 고개를 푹 숙인 자세로 외부와의 단절을 택한다.


그 모습을 달갑게 여길 리 없는 선하나는 성큼 다가가 고재성의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아저씨, 무슨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해요?”


“아, 좀!”


고재성이 그제야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 더군다나 같은 범죄에 피해 받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보일 적절한 반응은 아니다.


그는 보는 사람 기분이 상할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제 이름은 고재성이고 마흔이에요, 됐죠? 저 이제 건들지 마세요! 말도 걸지 마세요!”


몇몇 승객이 다 큰 어른의 어린아이 떼쓰는 것 같은 반응에 화들짝 놀란다.


류기태는 선하나가 손에 바늘처럼 뾰족한 물건을 숨기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결론짓는다.


바늘에 찔린 사람은 누구나 화를 내기 마련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별꼴이라며 초면에 버럭 화부터 내는 사람 따위 다시는 상대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선하나는 다소 보통사람 답지 않은 방식으로 응대한다.


“왜요? 왜 아저씨를 건들면 안 되는데요? 게다가 말도 걸면 안 된다고 하고, 왜요?”


“뭐?”


상정 외의 인물과 마주쳐버린 사람처럼 고재성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인다.


선하나는 틈을 주지 않는다.


“제가 오늘 처음으로 말 걸었는데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건 반칙이죠.”


뒤에 이어지는 말은 자기 학교에도 아저씨처럼 성격이 까칠한 친구가 있는데 하도 싸가지가 없어서 혓바닥을 놀릴 때마다 그 친구 혓바닥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는 심경 고백이다.


싸가지 없는 인물로 비춰지는 것을 누구보다 경계해야 하는 직업적 특성을 가진 고재성은 하는 수없이 본인의 섣부른 언사에 변명을 늘어놓는다.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른 건 미안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그러는데,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이 필요한 시기다.


“조용한 곳에서는 똥을 더 오래 참을 수 있어요?” 선하나가 묻는다.


“…….”


침묵을 긍정의 표현으로 착각하는 인생을 살아온 선하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다.


“진짜 신기한 재주네요.”


“…….”


계속되는 침묵에 답답함을 느낀 선하나는 이 모든 특성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고재성에게 묻는다.


“혹시 유튜버에요?”


그 단어에 승객들의 관심이 더욱 집중된다.


나중에라도 핸드폰을 돌려받으면 기꺼이 구독 버튼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하겠다는 듯 눈빛들이 초롱초롱하다.


“…….”


“아저씨, 제가 말하고 있잖아요. 왜 말이 없어요? 유튜버에요?”


“조용히! ……쫌!”


선하나는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히쭉히쭉 웃는다.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면 항문이 열려서……”


“내가 더 잘 알아…….”


고재성은 힘겨운 사투를 이어가던 중 난데없이 등장한 인물이 아군이 아닌 적군이었다는 사실이 한탄스럽다.


그러나 함부로 한숨을 내쉴 수는 없다.


“역시! 유튜버구나?”


중학생은 포기를 모른다.


“의사에요, 의사! ……항문외과.”


고재성은 들숨과 날숨에 집중한다.


선하나와 고재성의 대화에 집중하던 류기태는 말없이 펜을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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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소윤: 女, 36세, 중학교 영어선생, 졸린 눈

// 고재성: 男, 40세, 항문외과 의사, 무테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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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신상을 밝힌 고재성은 더 이상의 수성은 힘들다고 판단한 성주처럼 결단을 내린다.


목소리에는 죄송스러움이 잔뜩 묻어나있다.


“저, 여러분.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배가 너무 아파서요. 화장실에 좀 가야할 거 같아요.”


그 말을 들은 류기태는 지금 우리가 범우주적 비상사태 대책회의를 하는 것도 아니니 화장실은 언제든지 가도 좋다고 한다.


다만 한 가지 확인사항이 있는데, 으레 지하철 화장실은 열차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차에서 하차해 승강장을 벗어나야 방문할 수 있는 공간임을 인지하고 있는지……?


고재성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라고 류기태는 안도한다.


역시 의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상대방의 지적수준에 대한 약간의 존중도 담는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그렇다면 혹 이처럼 빨리 달리고 있는 열차에서는 어떻게 하차할 생각인지?


그러자 화장실이 급한 항문외과 의사는 그 부분이야말로 이번 사태의 핵심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는 이 부분은 벌써 한 시간 가량 모습을 보이지 않는 조종실의 인질범과 상의해볼 생각이라고 해결방안을 전한다.


“그것 참 쉽지 않겠군.”


류기태가 걱정한다.


눈앞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남자가 전하는 계획이 그다지 희망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연장자의 걱정이 마냥 싫지 않은 고재성은 잠시 고민하더니 선하나를 향해 입을 연다.


요약하자면, 자기가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인데 자기를 대신해서 인질범에게 말을 전하는 위대한 봉사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지금 학생이 입고 있는 교복이 인질범의 동정심을 자극시킴과 동시에 옛 추억을 상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단다.


여기서 말하는 옛 추억이라 함은, 친구들의 놀림을 받을까 무서워 학교 화장실에서 큰일을 치르지 못한 지난 시절이란다.


평소라면 대차게 거절했겠지만, 다 큰 아저씨가 똥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던 선하나는 알았다고 대답한다.


잠시 후, 선하나가 조종실로 향한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신체 건강한 젊은 세 남자를 대동한다.


장석기, 정성도, 이한성이 바로 그 멤버다.


셋은 나이가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가던 참이다.


세 남자의 보필을 받으며 조종실 문 코앞에 다다른 선하나는 처음 방문하는 곳이니 만큼 조심스럽게 노크한다.


누구세요, 하는 물음도 없이 대뜸 문부터 벌컥 열린다.


“……왜.”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사춘기 소년처럼 시큰둥한 얼굴을 한 김선범이 얼굴만큼이나 시큰둥한 목소리로 묻는다.


세 동갑내기 중 나름 냉혹한 세계에 몸담고 있는 정성도는 조종실과 연결된 자그마한 철문이 있는 벽면을 응시한다.


움푹 파인 벽면에 부착되어있는 소화기가 눈에 띈다.


모든 소화기가 그렇듯 새빨갛게 물든 색이다. 그리고 잠시간 고민에 빠진다.


소화기를 빼낸 다음 소심하게 열려있는 문틈을 통해 소화분말을 주입한다면 현 사태가 비교적 간단하게 해소되지 않을까?


영화에서 흔히들 하는 짓 아니던가?


어쩌면 꼭 화재 상황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부득이한 상황에 사용하라고 어릴 적부터 주기적으로 소화기 사용법에 대해 교육을 받아온 게 아닌가하는 생각으로까지 이어가던 찰나.


소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성도의 야릇한 눈빛을 감지한 장석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힘을 준다.


그리곤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그 의미를 해석해보자면,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정도가 될 것 같다.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섣부른 행동은 위험을 초래한다는 뜻을 담은 몸짓이다.


하지만 새로 사귄 친구의 호전적인 고민을 만류하면서도 장석기는 의문을 가진다.


‘지금 우리가 인질이긴 한 건가?’


불현듯 떠오른 그 의문은 평소 온순한 성격의 장석기에게 과격한 생각 하나를 심어줬는데, 그건 다름 아닌 소화기의 사용방식에 관한 것이다.


본래 소화기는 소화분말을 분출하여 화재를 초기진압 할 때 사용하지만,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지 않던가?


3.3킬로그램에 달하는 묵직한 무게감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흉기로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실, 안성맞춤이다.


역시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수많은 성공사례를 접해온 그에게 더없이 합리적인 고민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두 남자의 고민 중 어느 것이 성공률이 높을까 숙고할 겨를도 없이 협상테이블에 오른 어린 학생과 인질범은 공식적인 대화를 시작한다.


“아아, 있잖아요, 인질범 아저씨. 저기 저 아저씨가요.”


이번 협상에 열쇠를 쥐고 있는 열다섯 선하나는 친절히 고재성이 서있는 곳을 가리킨다.


“화장실이 급하다고 해서요.”


“……화장실? 조종실에도 화장실은 없어.”


선하나는 김선범의 대답에 조종실에 화장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못 해봤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있었다면 정말 유용했을 거라는 안타까움도 전한다.


해서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한다.


“어쨌든 그래서 잠깐 지하철 좀 세워 달래요. 화장실만 금방 다녀오겠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김선범은 어림도 없다는 딱딱한 어투로 거절한다.


그리고 다음에 도착할 역은 지하 3층 깊이여서 화장실을 가려면 2개의 층에 해당하는 높이만큼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며 나름의 논리적인 근거를 댄다.


그게 누구든 막무가내로 거절부터 하고 보는 냉혈한으로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지하철 인질범과 냉혈한은 동의어가 아니다.


인질범이 내세운 근거에 선하나는 꼼짝 못한다.


조종실까지도 못 걷는 사람이 수많은 계단을 오를 수는 없을 것이다.


협상테이블에서 오가는 내용을 빠짐없이 경청하고 있던 정성도는 협상이 긍정적인 결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역시 새롭고 조금은 과격한 조치의 필요성을 두 친구에게 피력한다.


물론, 인질범을 제압하는 방안에 대한 회의 내용을 인질범이 코앞에 있는 장소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 말 대신 몸짓으로 진행된다.


정성도는 연신 소화기를 향해 손짓한다. 보다 분명한 의사표현을 위해 눈짓도 보탠다.


진즉 그의 의도를 파악한 장석기는 알겠다는 의미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공모자, 이한성의 등을 콕콕 찌른다.


인질범을 목도한 탓에 누구보다 긴장하고 고재성의 괴로움에 절절히 공감하고 있던 이한성은 고개를 살짝 돌려 두 동갑내기를 본다.


‘왜?’


하는 표정으로 용건을 묻는다.


정성도와 장석기는 각자 손가락과 턱짓을 이용하여 소화기를 가리킨다.


그 다음 빼꼼 조종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인질범을 가리킨다.


그러자 이한성은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좌우로 짧게 흔든다. 누가 봐도 그만두라는 식의 제스처이다.


새로 사귄 친구의 대담하지 못한 반응에 실망한 정성도와 장석기도 덩달아 답답한 표정을 짓는다.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에 즉각 대처하고자 동행한 등 뒤 세 남자들의 위험천만한 작당모의에도 불구하고 인질범과의 협상에 힘을 쏟는 선하나가 예정에 없던 말을 꺼낸다.


“그나저나, 인질범 아저씨. 배고프지 않아요? 점심 먹을 때 됐는데. 밥은 안 주세요? 아, 제 말은 꼭 밥을 달라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는 마세요. 그러니까 쌀로 만든 밥이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사춘기 소녀는 언제나 배가 고픈 법이다.


게다가 인질을 대표해 이 자리까지 왔건만,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 멋이 없다.


화장실 자유이용권은 지하철 승강장과 지하철 화장실 간의 지리적 이슈로 얻지 못했지만, 배를 채울 수 있으면 그거대로 괜찮아 보인다.


물론 화장실이 급한 사람에게는 속을 비우기도 전에 채우게 생겼으니 썩 반가운 소식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


인질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터질 것 같은 긴장감에 뱃속이 텅 비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참이다.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12시 50분. 한창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다.


김선범은 본인이 분명 얌전히 잘 달리고 있던 지하철을 점거한 장본인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인질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뱃속 사정까지 휘잡을 생각은 없단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을 해보겠다고 답변한다


지금 자기한테는 점심식사 말고도 앞으로의 계획 같은 생각할 거리들이 넘쳐나지만, 식사 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할 의향이 충분히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김선범의 신뢰감 있는 어투에 적잖이 안심한 선하나는 이 정도면 사람들 앞에서 면은 서겠다며 좋아한다.


그럼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길 기다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제 1차 협상은 마무리된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그 말과 함께 다시 조종실 문이 닫히고 인질범은 스스로를 좁은 조종실에 가둔다.


흡사 열차에 상주하고 있는 인질범들을 피해 몸을 숨긴 인질 같다.


“……아저씨들, 뒤에서 뭘 그렇게 쑥덕거려요?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괜히 이상한 짓하면 어쩌나 무서웠다고요.”


선하나가 불만 섞인 얼굴로 묻는다.


“도대체 왜 말린 거야?”


장석기가 조금은 새된 목소리로 이한성의 팔을 잡는다. 선하나의 물음은 들은 체도 않는다.


“갑자기 뭘?”


이한성은 무슨 소리냐는 얼굴이다.


아무리 우리가 친구라지만, 엄연히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이니만큼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을 재간은 없다는 어투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단다.


기왕이면 많이.


“소화기, 나랑 성도가 눈치 줬잖아.”


“그거 뭐? 심각한 대화하고 있는데 그러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나만 진지했어? 인질범이 알아채고 흥분하면 어쩌려고.”


이한성의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 선하나는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지금 가장 심각한 사람은 고재성이라는 그 의사일 거라는 말은 아낀다.


“그럼 언제 해? 지금 할까? 인질범이 눈앞에 있을 때가 유일한 기회였어.”


장석기는 여전히 답답하다는 얼굴이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발언에 무게감을 준다.


“네가 망설인 탓에 기회 한 번 날린 거야.”


그렇게까지 꼭 누구의 탓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냐며 정성도가 나선다.


그의 느릿한 말이 끝나자 이한성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우리 지금 같은 얘기하고 있는 거 맞지?”


“우리가 지금 소화기 얘기하지 무슨 얘기를 해.” 장석기가 비아냥대며 말한다.


“그러니까, 소화기. 소화기에 붙어있던 스티커.” 이한성이 대화주제를 언급한다.


“스티커? 소화기에 스티커가 있어?”


“……너구리 스티커, 소화기 손잡이에 붙어있었잖아. 나한테 너구리 스티커 보라고 한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왜 우리가 그 상황에서 스티커 같은 걸 보라고 하겠어,” 장석기는 이제 답답함을 넘어 속이 터지겠다는 얼굴이다.


“인질범이랑 닮았으니까!”


두 친구의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에 조금은 억울한 감정이 인 이한성이 그야말로 억울하다는 어투로 대답한다.


“인질범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그래서 나는 너구리 스티커보고 ……놀리는 줄 알았지.”


“아니, 무슨……, 우리는 소화기로…….”


장석기는 이제 포기했다는 식이다.


어릴 적부터 요리에만 열중한 탓에 영화를 통한 시청각학습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던 이한성은 소화기의 과격한 사용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새로 사귄 두 친구는 이한성의 소지품 중 온갖 일식 요리를 만들 수 있는 도구가 있다는 사실을 대화가 끝날 때까지 깨닫지 못한다.


그 도구는 너무나 날카로워서 횟감은 물론이거니와 건장한 남자도 거뜬히 썰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새까맣게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