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있어야 하는 이유

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by 류해인

#도상준, 한재천, 문지성

선배의 부탁으로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문도현 경사에게 누군가가 왜 사무실을, 그것도 경찰서 강력계 사무실을 비웠냐며 질책할 수 있겠지만, 그에게는 사무실이 아예 비어있는 건 아니라는 나름의 변명이 있다.


물론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높은 확률로, 이를테면 세 명 중 세 명이 범죄자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텅텅 비어있지는 않다.


쉬지 않고 달리는 2호선 열차 내에서 인질범과의 첫 번째 협상이 마무리 됐을 무렵, 태평경찰서 강력계 사무실 유치장에 갇힌 세 남자가 잠에서 깬다.


도상준 전무가 어느새 쪼그라든 것 같은 큼직한 복부를 쓰다듬으며 입을 연다.


“배고프다.”

“…….”

“…….”


문지성과 한재천 그 누구도 동감하지 못한다.


문지성은 불과 몇 분 전에 본인을 이곳에 가둔 공무원과 사이좋게 라면을 취식했기 때문이고, 한재천은 본래 날렵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소식을 일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날렵한 몸매를 유지하는 까닭은 보다 날렵한 움직임을 구사하기 위함이고, 날렵한 움직임은 업무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대신 한재천은 날렵한 움직임을 자랑하는 칼잡이답게 조직의 막내 문지성의 새로운 칼에 관심을 보인다.


“야지성아칼멋지던데?”


“아, 저거요?”


문지성은 유치장 창살 너머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새로운 연장을 아련한 눈으로 쳐다본다.


여전히 고급스러운 검은빛을 뽐내고 있다.


“아까 여기 오기 전에 시장 칼장수한테 하나 샀어요.”


그 말이 꼭 자의로 유치장을 방문한 사람처럼 들린다는 말을 삼킨 한재천은 평소에는 손도끼를 쓰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 칼을 샀냐고 묻는다.


내심 본인에게 줄 선물이지 않을까 기대도 품어본다.


선물할 물건이 안전하고 하자가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불운하게도 경찰에게 붙잡힌 건 아닌지 나름 추측도 해본다.


바로 그렇다고 문지성은 신이 나서 대답한다.


역시 형님이라며 엄지를 척 내세운다.


구매한 물건을 처음 사용해보는 순간에 우연찮게도 바로 앞에 사람이 있었을 뿐이라고 해명한다.


그 탓에 예정에 없던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단다.


그렇지만 그 덕에 조직에서 두 번째로 존경하는 형님을 만나게 되지 않았냐며 자기는 지금 무척이나 기쁘단다.


더군다나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니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반갑단다.


근데 저 칼은 형님 선물은 아니니 꿈도 꾸지 말란다.


문지성의 밝은 얼굴을 본 한재천은 그것 참 안타깝다고, 자기도 우연히 널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단다.


그렇지만 이곳이 아닌 보다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만났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화답한다. 기왕이면 공무원도 없는 곳에서.


그러곤 저렇게 멋진 물건이 내 선물이 아닌 점은 무척이나 애석하단다.


만남장소에 대한 아쉬움과 애석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한재천이 문지성의 어깨를 토닥인다.


“근데도끼는어디갔어?”


“……도끼? 아, 제가 쓰던 거?”


문지성은 양손으로 본인의 허리를 슥 훑고 유치장 너머 사무실 책상도 살핀다.


“음, 어디 갔지? 분명 아침까지 있었는데.”


쪽지를 고정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사용한 도끼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섭섭한 지능을 가진 문지성이 도저히 모르겠다고 답한다.


문지성에게 연장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으라는 가르침을 준 한재천은 아쉬워하는 눈치다.


본인의 가르침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문지성은 한재천의 실망을 눈치 채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잠시 말을 잃는다.


사실 금일 오전까지 연장으로 사용하던 손도끼는 이미 근처에 있다는 것을,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도상준 전무가 유치장으로 끌려올 당시 소지하고 있던 서류가방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문지성이 알 리 없다.


문지성은 지금 상황이야 어찌됐든 새로 구입한 칼은 무척이나 가볍고 사용감이 좋다고 진심어린 리뷰를 남긴다.


그 말에 한재천은 관심을 보이고 나중에 꼭 한번 빌려달라고 한다.


“당연하죠! 형님 쓰시고 싶을 때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바로 드릴게요.”


문지성의 대답에 한재천은 혹시 그렇게 자유로이 칼의 사용권을 부여할 생각이면 아예 소유권 자체를 양도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넌지시 묻는다.


“형님, 그건 좀…….”


서운함을 유발할 만큼 가차 없는 말 한마디에 둘 사이가 급격히 어색해진다.


유치장에는 다시 침묵이 감돈다.


도상준 전무는 여전히 배고픔에 고통 받고 있다. 이제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배가 아플 지경이다.


근데 그 배는 아니다.





#고재성, 선하나, 류기태, 손준겸

바로 그 배.


변의가 만들어내는 복통에 시달리고 있는 고재성은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선하나 일행을 맞이한다.


“학생, ……뭐래?”


“뭐가요?”


기어코 한 문장을 더 내뱉게 만드는 열다섯 살 여학생이 얄미운 건 사실이지만 고재성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감내한다.


“……화장실. 화장실 물어보러 간 거잖아.”


“아아, 그거요? 지하철 조종실에는 화장실이 없다는데요?”


이번 협상을 통해 새롭게 습득한 지식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선하나는 사전에 협의한 내용과는 무관한 대답을 골리는 듯한 어조로 내뱉는다.


그녀의 표정이 지나치게 밝아 보인다.


이게 다 잠시 후에 전할 전달사항 때문이다. 어쩌면 곧 점심식사를 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게 전부 자기 덕이라고.


“……아니, 그거 말고……, 화장실 못 보내준대?”


“아아아, 그거요? 네. 그건 좀 힘들대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는데요?”


선하나는 고재성의 현재 상태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과민한 대장이 문제이기보다 오히려 둔감한 대장 때문에 고민 중인 사람처럼 무관심하다.


그녀의 답변은 변의에 몸부림치는 항문외과 의사의 전망을 한층 더 어둡게 한다.


“의사 양반, 이거 일이 어렵게 돌아가는데? 오줌처럼 조금씩 말려가면서 싸는 것도 안 되고, 그치?”


류기태 만큼은 다 이해한다는 얼굴이다.


“그래도 다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나도 열심히 생각해볼게.”


하지만 류기태의 진심이 고재성의 뱃속 사정을 해결해주는 건 아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심호흡을 이어가던 고재성이 더 이상은 한계라는 몸짓으로 열차 다음 칸으로 연결된 문을 두드린다.


김선범의 조작 때문에 열차 내 모든 개폐문이 작동을 멈춘 상태지만, 인간의 절심함이 기계를 감동시켰는지 문이 열린다.


사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을 예상하고 있던 김선범의 세심한 조작이 불러온 배려이다.


“……저,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고재성은 그 말을 남기고 다음 칸으로, 또 다음 칸으로 달려간다.


지하철을 사전에 설계된 용도가 아닌 화장실로 사용하려는 몰상식한 사람답지 않게 그는 열차의 끝 칸, 즉 1229호 가장 안쪽 자리까지 가서야 바지를 내린다.


“…….”

“…….”

“…….”

“…….”

“…….”

“…….”


객실에서는 불쾌한 전율이 감돈다.


고재성이 생리적 욕구를 해결코자 잠시 자리를 비우자, 좌중은 혼돈에 휩싸인다.


인질 일동은 황당함에 말을 잃는다.


서울 한복판에서 인질범을 마주치는 것만큼이나 목격하기 힘든 것이 지하철에서 변의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허허, 이것 참……. 황당하구만.”


류기태가 다른 사람들의 심경을 대변한다.


한편, 선하나는 고민에 빠진다.


식사 중에 변에 대해 얘기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과연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한창 변이 대화주제로 오른 와중에 식사얘기를 꺼내는 건 예의에 맞는 걸까?


그녀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그저 멀뚱하게 고재성이 달려 나간 문을 바라본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고재성이 돌아온다.


극심한 고통에서 해방된 사람이 그러하듯 개운하고 감격스럽기까지 한 표정을 하고 있다.

“크흠! 음……, 저기―”

하지만 그는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다시 뒤돌아 달려간다.


누가 봐도 모든 상황이 별 탈 없이 해결됐다고 섣불리 판단한 사람의 뒷모습이다.


대장과의 사투가 1차전으로 끝날 거라는 건 착각이다.


다시 5분 후, 고재성이 지친 모습으로 털레털레 걸어온다.

“벌써 끝났어요?”

선하나가 가장 먼저 말을 건다.


고재성은 어린 소녀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낀다.


반면, 어린 소녀의 머릿속에는 그저 인질범과 나눈 점심식사 얘기를 언제 꺼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뿐이다.


등에 매고 있던 지구를 내려놓은 듯한 상쾌한 얼굴로 고재성이 대뜸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제가 사람들한테 항문 건강을 지키는데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하는지 아시나요?”


어느덧 항문외과 의사다운 말도 꺼낼 만큼 여유를 찾은 것이다.

“……항문성교 금지?”


공공장소에서 대변욕구를 해결하는 의사는 생전 본 적이 없는 광고업자 손 씨는 장난스럽게 답한다.


손 씨의 장난기가 조금만 더 풍부했다면 현 상황을 광고 카피에 활용했을지도 모른다.

‘참지 못했던 고 모 씨, 이제는 잘 참아요!’


다만, 보다 명확한 정보전달을 위해 조루증 치료제가 아닌 과민성대장증후군 치료제라는 점을 분명히 표기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항문에 무리가 갈 수 있겠네요. 그럴 수 있죠.”


항문외과 의사 고재성은 의사답게 확신에 찬 부정은 삼가고 가능성을 언급한다.

“진짜 그거야?”


류기태가 부쩍 관심을 보인다. 그는 나이에 비해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아니라고 대답한 고재성은 의사로서 내원하는 환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건, 대변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누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좀 오래 싸더라도 한 번에 싸는 게 훨씬 좋을 거 같은데…….”


선하나는 주위 사람들 모두가 들릴 만큼 넉넉한 음량으로 중얼거린다.


“전 이제 2호선은 절대 안 타려고요. 버스타고 다녀야겠어요.”

“왜? 인질 됐던 거 생각날까봐?” 손 씨가 묻는다.

“아뇨. 똥냄새 밸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여러분.”

고재성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변을 내보낼 때의 그것과 유사하다. 갑작스레 밀려드는 부끄러움 때문인지 다시 복통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행히도 그 배가 아니다.



#문도현, 강재훈, 최병기

서울 시내를 뚫고 달려 서울교통공사 관제센터에 도착한 문도현 경사 일행은 곧바로 중앙통제실로 향한다.


직원에게 상황을 전달받은 관리팀 팀장 서준봉이 그들을 맞이한다.


“상황은 전부 전달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네요.”

“네, 저희 쪽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서준봉 팀장에게서 풍기는 김치찌개 냄새에 군침이 돈 게 사실이지만, 애써 모른 체하며 문도현 경사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어간다.


“열차 내 CCTV 확보도 힘들고, 무엇보다 열차와의 교신이 안 되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현재 열차 위치도 알기 힘든 거죠?”


“네, 그렇습니다. 만일 기존 열차 움직임 그대로 운행했으면 운행시간을 고려해서 위치 파악이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힘들 겁니다. 인질범이 직접 열차를 조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승강장에 정차시킬 이유가 없으니까요. 정차하지 않으니 열차는 계속 달리기만 할 거고, 또 그 속도도 알 수 없으니 현재 위치를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대충 유추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는 별 의미가 없겠죠.”


“승강장에 있는 CCTV는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나요? 승강장에 정차하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열차가 화면에 잡힐 수도 있잖아요.”


강재훈이 나선다. 그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파리하다.

“아……, 아까 유선 상으로 들으셨겠지만, 열차 내부 CCTV처럼 승강장도 실시간 송출은 어렵습니다. 이곳에서 바로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각 지하철 역 관제실에서는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뜻은 수많은 2호선 역사 관제실로 직접 찾아가 일일이 영상을 확인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인력도 시간도 충분치 않다.


이미 문도현 경사의 머릿속은 어떻게든 자기 손으로 이번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틀어박힌 상태다.


“그렇군요…….”

그때 서준봉 팀장이 고개를 일행 반대편으로 돌린 채 트림을 뱉고 후후 불어 냄새를 최대한 제거하고는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의견을 내놓는다.


참고로 말하자면 올해 마지막 남은 자식까지 대학에 입학시킨 환갑을 앞둔 그의 취미는 영화 시청이고 즐겨 보는 장르는 범죄, 첩보물이다.


“인질 중 한 명은 신원파악이 됐다고 하셨잖아요? 그 분이 사용하는 핸드폰 위치 추적은 힘들까요?”


“전원이 꺼져있는 상황이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위치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경찰의 긍정적인 답변에 용기를 얻은 서준봉 팀장은 내친김에 다른 의견도 보충해본다.


“인질이 총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만일 그 인질 전부 연락이 안 되거나 핸드폰 전원이 꺼져있을 텐데, 그 점을 수상하게 여긴 가까운 지인들이 신고 같은 걸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연락된 위치들을 조합해보면 어느 정도 범위가 좁혀질 거 같은데요. 특히 애인 있는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주고받으니까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면 바로 이상하다고 여길 거예요.”


“생각해보니 그렇겠네요!”


일행 중 가장 젊은 최병기 순경이 동조한다.


“물론, 잠깐 연락 안 된다고 바로 경찰에 신고부터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요. 그리고 저도 하나 생각난 건데, 인질한테 연락 온 시간을 기점으로 해서 2호선 열차에 탑승하고 하차한 승객들 명단, 확보할 수 있지 않나요? 교통카드 내역 확인해서 탑승기록만 있고 하차기록은 없는 사람들이 바로 열차에 갇힌 인질들이라는 소리잖아요.”


“……그렇지.”


그제야 굳어있던 머릿속이 움직이는 느낌이다.


문도현 경사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가장 확실할 거야. 일단 신고가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그거는 그거대로 확인해보자고. 설마 인질들 중에 애인 있는 사람 하나 없겠어?”




공교롭게도 인질 중 현재 여자친구나 남자친구가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점이 이들의 무사귀환을 지연시킨다.


한 순간에 인질이 된 이들의 연락이 두절됐다는 점은 별다른 특이사항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소년이 바로 그 예외다.


실제로 소년의 문자를 받은 아버지는 현재 경찰과 함께 고군분투 중이다.


하지만 나머지 인질들의 지인은 그들의 연락빈도에 대해서 어떤 어색함도 느끼지 못한다.


하필 점심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 보니 더욱이 그렇다.


그저 점심을 맛있게 먹나보다, 핸드폰을 들여다 볼 새도 없이 허겁지겁 먹어치우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