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둘, 셋, 둘, 그리고 하나

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by 류해인

#도상준, 한재천, 문지성

유치장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여간 심심했던 문지성이 굶주림에 고통 받고 힘겹게 생명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도상준 전무에게 말을 건다.


“평소에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시나 봐요?”


“……응? 난 더 이상 빠질 머리카락이 없는데…….”


연이어 계속되는 공복상태에 지칠 대로 지친 도상준 전무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러니까요! 혹시 잊으셨을까봐.” 문지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지성아,그런장난치는거아니야.”


한재천이 말린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도상준 전무의 기름 가득한 두피에 향해있다.


두피 관리에 힘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어이, 동생. 내가 지금 배가 고파서 다행인줄 알아.” 도상준 전무가 힘없이 경고한다.


“지금 같은 상황에 대비하려고 그렇게 왕창 미리 먹어둔 거 아니었어요? 전 그런 줄 알았는데! 그 정도 배면 일주일은 안 먹어도 될 거 같아요.”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겁먹는 기능을 잃어버린 문지성의 관심은 끊이질 않는다.


이게 다 민머리에 배가 볼록 부푼 도상준 전무의 개성 있는 생김새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 열 받게 할 줄도 알고 어느덧 막내도 어엿한 조직원이 되었구나, 하며 한재천이 흐뭇하고 있던 차에 도상준 전무가 하나마나한 말을 한다.


“주머니에 먹을 거 없어? 각자 잘 좀 뒤져봐. 보통 주머니에 간식거리 하나씩은 들고 다니잖아. 컵라면이나 햄버거 같은 거. 하다못해 삼각 김밥이라도.”


새로 사귄 비즈니스 파트너의 고통 섞인 부탁에 모든 주머니를 뒤진 한재천은 아쉽지만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꼭 주머니에 컵라면이나 햄버거 같은 간식거리를 챙겨 다니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전에 주머니가 넉넉한 바지부터 새로 구입해야할 성싶다.


“어이, 동생. ……너는? 너도 뭐 없어?”


도상준 전무의 물음에 문지성도 마찬가지라고 답한다. 그리고는 자기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런 것도 굶주린 배를 채우는데 용이하냐고 묻는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자그마한 열쇠다.


“열쇠를 어떻게 먹어…….”


도상준 전무는 실망한다. 그러다 혹시 열쇠모양을 한 사탕은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고 문지성의 손에 들린 열쇠를 빼앗듯 잡아채 냄새를 맡아본다.


금속 냄새다.


“에이, 그냥 평범한 열쇠잖아.”


“갑자기무슨열쇠야?”


한재천의 물음에 문지성은 자기도 모른다고 답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곳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없던 것이란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아까 사무실 책상에서 라면을 나눠먹기 전에도 없던 것이었단다.


다시 말해, 라면을 먹고 나니 어느 순간 생겨난 거 같단다.


나아가 방금 머리를 좀 더 굴리니 생각난 것이 하나 있는데, 자기가 유치장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슬쩍 챙긴 거 같단다.


열쇠가 원래 있던 자리는 사무실 책상 위였단다.


무모하리만치 낮은 지능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지만, 그 무모함이 가끔은 쓸모가 있음을 확인하는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뭐? 뭐라고?”

“뭐?뭐라고?”


두 연장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묻자 자기가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한 걸로 착각한 문지성은 역시 다른 사람 물건을 자기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게 가져왔으면 아무도 모르게 제자리에 돌려놓는 게 맞지 싶단다.


그러자 두 연장자 중 꽤 오랜 세월동안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을 고수해온 민머리가 물론 그러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 과정을 추가하면 더욱 좋겠다고 운을 뗀다.


그건 바로 열쇠를 이용해 유치장을 빠져나가는 것이란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사랑한다는 말이란다.


“아이, 뭘 그렇게까지…….”


알고 보니 사랑한다는 말에 유독 약했던 문지성은 군말 없이 유치장 철장 밖으로 손을 빼내 자물쇠를 확인한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는다.


아주 그냥 제 집을 찾은 것처럼 기분 좋게 쏙 들어맞는다.


그대로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열쇠를 돌리니 자물쇠가 그대로다.


생명의 은인이 쩔쩔매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도상준 전무는 전날 잠들기 전에 먹은 양념 치킨의 힘까지 다해 몸을 일으킨 뒤 직접 열쇠를 돌린다.


오른쪽으로 한 번.


그리고 자물쇠 몸통을 잡아당기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헤벌레, 입을 연다.


이어 문손잡이가 올라가고 끼이익, 하며 유치장 문까지 활짝 입을 벌리는 게 아니겠는가?


“오호? 이 놈 봐라?”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갑각류를 보듯 도상준 전무가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세 범죄자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다.


범죄자들이 유치장으로 들어가는 건 아무 문제가 없으나 나오는 건 퍽 문제가 된다.


게다가 기특하게도 어떤 경찰의 도움 없이 그런 일을 해치웠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들의 자의적인 출소, 소위 탈옥의 현장에는 국가 사회의 공공질서와 안녕을 보장하고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 하는 일을 하는 공무원이 단 한 명도 없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불행한 일이 하나 터지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행인 일도 하나 일어나기 마련인데, 이 순간 다행인 점은 바로 도상준 전무의 주체할 수 없는 배고픔이다.


도주 욕구 따위는 식욕으로 거뜬히 눌러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이 취하는 다음 행동은 바로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다.


“뭐 먹을까요?”


먹는 것에는, 더군다나 남의 지갑이 열리는 순간을 마다할 리 없는 문지성이 묻는다.


“배달 빠른 건 역시 중식이지.”


도상준 전무의 입에는 이미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각자 식사 하나에 요리도 부족하지 않게 세 개는 시키는 게 좋겠다며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불러보란다.


역시 저런 큼직한 배는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거구나, 중얼거리며 문지성이 자기는 바로 직전 식사 때 면을 먹은 관계로 볶음밥으로 하겠단다.


기왕 먹을 거 삼선볶음밥으로.


일이 단단히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한 한재천은 어찌 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지만, 별다른 해결책은 없다.


“어이, 재천 동생, 뭐가 좋아?”


“아,저는간짜장이요.”


한재천이 습관적으로 대답한다.


이렇다 할 해결책이 없을 때는 속을 먼저 든든히 채우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오케이, 좋아.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근처 중국집 맛은 보고 가야지.”


도상준 전무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진다.





#지하철

“…….”


홍지선은 선뜻 입을 떼지 못한다.


승객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중년 여성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노여움과 슬픔을 어찌할지 몰라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절로 짓게 되는 눈빛이다.


물론, 한사람만은 예외다.


“자, 얼른! 다들 홍지선 씨 얘기만 기다리고 있어.”


류기태는 불과 몇 분 전에 받은 불친절한 반말에 대한 코멘트는 잊은 지 오래다.


화자를 재촉하는 의미에서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받드는 시늉을 하던 그는 홍지선의 손에 들린 꽤나 위험해 보이는 물건으로 관심을 돌린다.


“근데 오른손에 들고 있는 그거, 무겁지 않나? 제법 묵직할 거 같은데…….”


오늘따라 유독 주인 손을 자주 떠나는 사시미 칼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이한성은 류기태의 발언에 아주 조금은 울컥한다.


큰소리로 지금 저 분이 들고 있는 칼은 전혀 무겁지 않고 일본 특정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고급 철과 나무로 만들어진 명품이라고 대답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저……, 어머니.”


그간 수차례 진행해온 학부모 면담 덕택에 중년여성과 대화하는데 이골이 나있던 채소윤 선생도 슬쩍 말을 보탠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일단 그거 먼저 내려놓으시고…….”


“저 어머니 아니에요.”


홍지선이 선생의 말에서 오류를 잡아낸다.


물론, 자기가 오십을 넘긴 중년여성이지만 그 뜻이 꼭 자녀를 뒀다는 뜻은 아니란다.


“오, 그럼요. 그럼요.”


채소윤 선생은 본인의 섣부른 판단에 너무 상처받지 않으시길 바란다며 홍지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본다.


“아, 그래?”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 판단할 수 있겠지만, 이어지는 다음 말은 류기태의 입을 타고 나온다.


“그럼 거기부터 시작하면 되겠네! 왜 아이가 없는지. 아까 손가락 보니까 결혼은 한 거 같던데.”


홍지선은 류기태의 말에 움찔하며 왼손 약지에 자리 잡은 결혼반지를 내려다본다.


남편에게 받은 뒤 단 한 번도 뺀 적이 없다.


“…….”


류기태의 꽤 합리적으로 보이는 조언에도 홍지선은 망설인다.


손에 힘을 꽉 주면 망설이는데 도움이라도 되는 것처럼 있는 대로 양손에 힘을 준다.


그러나 그게 아닌 듯하다.


그녀가 취하는 다음 행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닌 분노 표출이다.


“내가 왜! 왜 얘기해야 되는데! 정신병자들한테 해줄 얘기는 없어!”


나아가 그녀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정상적인 사람을 평균으로 봤을 때 당신네들은 평균이하라고, 그것도 가여울 만큼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광범위한 비난을 퍼붓는다.


악을 질러대며 칼을 빙빙 휘두르는 중년 여성을 보면서 류기태는 매정하지만 그래서 더욱 분석적으로 들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앞으로 반말 하는 거지? 이제야 좀 편하게 대화하겠네.”


그리고 여태 자기가 한 건 반말이 아니었다는 어투로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봐도 당신인 거 같다는 반론을 내놓는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은 칼을 들고 쉽사리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한단다.


당신은 그 어렵고도 무서운 일을 지금 거뜬히 해내고 있단다.


분명 옳은 말이었지만 류기태의 못생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홍지선은 보란 듯이 칼을 더 세차게 휘두르기 시작한다.


분명 위협적인 행동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처절해 보이는 모습이다.


“이게, 어? 이게? 그렇게 무서워? 어? 내가 이렇게 하면! 어!?”


아무리 봐도 무서웠던 선하나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줌마! 그만해요! 다 큰 어른이 그러면 안돼요!”


학생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과 동시에 홍지선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탈출을 시도했고 눈치도 없이 1차 시도에 성공한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그 날카로운 물건은 홍지선의 요령 없는 손목스냅 덕분에 그리 멀리 날아가지는 못했으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겁먹게 하기에는 충분히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자상을 유발하는데 탁월한 그 물건은 잘 관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명품인 탓에 무척이나 날카롭다.


짧은 비행을 마친 그것은 열차 좌석 둔부가 닿는 부분에 꽂힌다.


졸지에 상처를 입은 열차 좌석을 대신해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장석기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번쩍 빛나는 칼날을 내려다본다.


그리곤 지금도 꽤 열심히 살고 있지만 앞으로 몇 갑절은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덤으로 집에 있을 엄마 생각까지 난다.


울어야 할 사람―방금 큰 부상을 입을 뻔했던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지만, 홍지선이 와락 눈물을 쏟는다.


줄곧 배출해오던 것이라 특별할 것 하나 없었지만,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대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오열한다.


그와 동시에, 청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불분명한 발음으로 정체불명의 말을 웅얼거린다.


대강 유추해보자면, 자기는 선천적으로 비폭력적인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을 해치려 한 게 아니었다는 내용으로 귀결된다.


외려 자기가 해치려고 한 사람은 본인이란다.


요새는 그걸 자살이라는 다소 끔찍한 어휘로 명명하던데 바로 그것이란다.


그런데 자살을 계획했다고 해서 반드시 죽고 싶은 건 또 아니라며 섣부른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단다.


계획은 헛짓거리와 동의어란다.


굳이 말을 덧대자면,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유명한 격언은 이때 쓰는 말이란다.


“오오, 그럼 그걸로 마무리하면 되겠네!”


류기태는 여자의 눈물에는 관심도 없다는 얼굴이다.


그저 어서 일어나 결혼은 했는데 아이가 없는 이유로 시작해서, 인생을 서둘러 마감하려고 한 계기로 마무리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눈치다.


평소 사람들의 속을 뒤집곤 했던 그의 왕성한 헛소리가 이번만큼은 의외의 효과를 거둔다.


“……결혼한 지 28년 됐어요.”


훌쩍대던 홍지선의 사연은 햇수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생의 후반부를 과감히 생략하려고 했던 사람이 꽁꽁 숨겨뒀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머뭇거리던 그녀의 입술이 이내 재잘재잘 이야기를 쏟아낸다.


나름의 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홍지선

홍지선은 올해로 기혼이 된지 28년이 되었다.


그녀의 남편 정 씨는 동갑내기로 같은 대학에서 수학한 학과 동기였다.


스무 살에 처음 알게 된 정 씨에게 이성의 감정을 느낀 건 처음 만난 순간부터였다.


그녀에게 정 씨라는 사람이 친구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셈이다.


그는 처음부터 남자였다. 처음을 남자로 만났고 마지막까지 남자로 헤어졌다.


인생을 살면서 처음 남자로 느껴지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깊은 사랑에 빠진 연인이 나란히 걸어 향해 갈 곳은 결혼밖에 없다.


당연한 이치다. 홍지선에게는 모든 것이 당연했다.


딱 하나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하나 있다면, 바로 아이 문제였다.


너무 깊이, 또 열렬히 사랑한 나머지 결혼 전에 아이가 들어서고 말았다.


“지선아, 우리 아이 얘기하기 전에, 이거 하나만 확인하자.”


스물다섯, 연애 4년째 되던 날 홍지선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정 씨가 처음 뱉은 말이었다.


“……뭔데?”


홍지선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절대 실수한 거 아니야. 잘못은 더더욱 아니고.”


정 씨는 환하게 웃었다. 평소 홍지선이 죽고 못 사는 그 미소였다.


“그냥 우리 계획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야. 그렇잖아? 물론 순서를 앞뒤로 바꾸기도 해야겠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이거에서 ‘아이를 낳고 결혼한다’ 이걸로.”


두 남녀의 여의치 못한 상황 때문에 구체적인 수준까지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지만, 정 씨의 말 중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결혼을 약속했고, 서로를 반반씩 사이좋게 닮은 아이도 낳자고 여러 번 얘기했었다.


다만 그 시기가 몇 년 앞당겨졌을 뿐이었다.


사실, 따지고 들자면 시기가 문제였다기보다 그들의 상황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때 당시, 스물다섯의 홍지선은 졸업 후 한창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었고, 정 씨는 아직 대학생이었다.


그 역시 졸업 후 임용고시를 준비할 계획이었다.


그러한 나름의 인생 설계 속에 아이가 변수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지? 응? 지선아?”


대답이 없는 홍지선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정 씨가 되물었다.


“어? ……뭐야? 머리 안 감았네? 저번에 보름달 보고 소원 빌었다더니 이거였어? 머리 안 감아도 티 안 나게 해달라고?”


죄지은 사람처럼 의기소침해있는 여자친구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던 정 씨의 얼굴에 보다 장난기 넘치는 미소가 넘실거렸다.


“어제 자기 전에 감았거든!”


홍지선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고는 긴 머리칼을 코로 가져가며 직접 시향하기 시작했다.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난다고!”


“머리 안 감으면 나는 냄새!”


정 씨가 양손으로 홍지선의 볼을 누르고 툭 튀어나온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가슴팍에 쏙 들어간 홍지선은 씩씩거리다가도 이내 잠잠해졌다.


어린 아이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넓은 품을 내어주는 정 씨를 사랑하지 않는 건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뱃속의 아이는 그 둘에게 어떤 위기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둘은 서로를 더없이 사랑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생명이 생겨났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두 연인의 마음이 엇나가는 법 없이 하나로 합쳐졌고, 이제는 조금 덜 중요하지만 왜인지 그 무엇보다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바로 그들의 부모님이었다.


한쪽은 부모가 모두 살아있었고, 다른 한쪽은 부모가 모두 멀리 떠나있는 상황이었다. 그곳은 너무나도 멀어 죽은 뒤에나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는 홍지선의 말에 정 씨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착잡해 보이는 얼굴에서 나오는 말답게 착잡한 내용이었다.


“……두 분 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그렇구나. 그럼 다른 지원도 힘들……, 정말 힘들었겠어.”


그날 나눈 대화에서 정 씨의 부모가 긍정의 대답을 한 적은 없었다.


놀라고 또 놀라고 답답해하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부모로부터 어떠한 재정적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로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아들의 여자친구가 조금은 얄밉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딸랑 몸만 오겠다는 말 아닌가.


그렇게 취조 같은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홍지선은 다시금 느껴지는 현실감에 심히 울적해져있었다.


이럴 때면 정 씨의 능력이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정 씨가 대뜸 말했다.


“지선아, 우리한테 좋은 일 하나랑 안 좋은 일 하나가 새로 생겼어. 어떤 거부터 들을래?”


“응? 어……, 안 좋은 거?”


“오케이, 좋은 거부터.”


정 씨가 키득대며 홍지선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 결혼이랑 아이 문제에 대해서 양가 부모님한테 다 말씀드렸다는 거야. 가장 먼저 하늘에 계신 장인, 장모님한테 말씀드렸고, 방금은 우리 부모님한테까지. 이제 어른들한테 다 말했어.”


“그럼 안 좋은 거는?”


“아직 우리 부모님 말이 안 끝났다는 거지. 원래 엄마 아빠가 말이 좀 느려. 그러니까 지선이 네가 이해해줘.”

환한 미소가 걸려있는 그의 입술 끝에 미안함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홍지선이 정 씨의 볼을 토닥였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일부러 그렇게 웃는 것으로 표현을 대신했다.


“하도 오래 걸려서 우리 애기랑 같이 듣는 거 아니야?”


“그럼 더 좋지. 우리 편이 한 명 더 느는 건데. 우리가 한 명 많네. 무조건 이기겠다. 네가 엄마를 맡고, 아기한테 아빠 맡으라고 하면 되겠다.”


“그럼 너는?”


“나? 나는 응원 담당이지.”


둘 사이에 웃음이 끊이는 날은 없었다.


적어도 그해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해 8월, 임신 14주 차, 홍지선이 복통을 호소했다.


아이가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하혈이 시작됐다.


독서실에서 공부 중이던 홍지선은 곧바로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서야 소식을 들은 정 씨는 응급실 인포메이션에 그녀의 이름을 댔다.


“아…….”


당황하는 간호사의 얼굴을 보고 정 씨는 일순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입원실에 들어선 정 씨를 보자 홍지선이 활짝 웃었다.


“어, 왔어?”


그녀의 웃음을 직면하자마자 정 씨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 같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사람만이 내보낼 수 있는 아이 같은 울음이었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숨이 제때 제대로 된 곳으로 나가지 못했다.


얼굴이 흠뻑 젖기 시작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지는 않을까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홍지선의 손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처박은 정 씨는 이렇게 물었다.


울먹이다 못해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혼자야?”


“……응.”


홍지선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웃지 않으면 본인도, 눈앞에서 울부짖고 있는 이 남자도 사라질 것만 같아 웃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 남았어. 나……, 다시 혼자가 됐어.”


유산의 원인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는 그저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거라고 했다.


생명이 태어나고 지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닌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었다.


세상으로 나오는 새로운 생명을 가장 먼저 받아내고 구원하는 특별한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젊은 나이에 아이를 유산한 홍지선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 이겨냈다.


정 씨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를 사랑했다.


그 사이에 생겨났던 것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둘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다.


소식을 들은 정 씨의 부모는 홍지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몸을 잘 챙기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 그 누구도 차마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 오갔던 결혼과 아이에 대한 얘기는 쥐죽은 듯 사라졌고, 본래 일상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 대화하고 웃고 밥을 먹고 공부한다. 공부하고 밥을 먹고 웃고 대화를 한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홍지선은 회사원이 되었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엔 그녀가 가진 기억과 상처가 너무나 분명했다.


다시 1년이 흘렀다.


정 씨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지 않기엔 그가 가진 기억과 상처가 너무나 선명했다.


그해 여름, 그들의 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2년이 지난 어느 날에 둘은 부부가 되었다.


신은 버림받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까지 방해할 의향은 없는 듯 보였다.


적어도 27년 동안은.





#지하철

“…….”


홍지선의 몸이 파르르 떨려온다.


어느새 그녀의 양옆에 앉아있는 선하나와 채소윤이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다.

“네……, 조금만 이따 얘기할게요.”


홍지선이 힘겹게 코를 훌쩍인다. 그리고는 본인을 빙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묻는다.


“저, 혹시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홍지선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감명 깊게 듣고 있던 소년은 큼직한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내 건네준다.


“……고마워, 아가.”


홍지선이 소년을 보며 활짝 웃는다.


연약하지만 따스함을 간직하고 있는 미소다.


류기태는 아무런 말도 없이 펜을 꺼내 들고 수첩 내용을 수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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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소윤: 女, 36세, 중학교 영어선생, 졸린 눈

// 고재성: 男, 40세, 항문외과 의사, 무테안경

// 선하나: 女, 15세, 여자중학교 학생, 까만 눈, 화가 많음

// 홍지선: 女, 55세. 주부, 까칠함, 예민함

// 손준겸: 男, 43세, 지하철 광고업자, 사각턱

// 김선범: 男, 44세, 지하철 기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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