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김선범
열차 내 승객들 모두 김선범의 이야기에 한껏 집중한다.
덜컹덜컹.
지하철이 바삐 움직이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온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작기는 하지만 집도 장만하고, 나름 평탄하게 흘러갔어요. 직장도 여전히 즐거웠고요.”
어떤 이야기에서나 그렇듯 문제는 고요한 호수 깊은 곳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법이란다.
작년 겨울에 대뜸 새로운 열차가 개발됐단다.
이 지하철은 너무나 똑똑한 나머지 인간의 도움이 필요 없단다.
다시 말해, 지 혼자 출발하고 지 혼자 다음 승강장까지 가서는 지 혼자 정해진 위치에 정차한단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는 기절초풍했단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냐면서 신기해했단다.
나아가선 참으로 대단하고 기특하다며 칭찬까지 했단다.
그 똑똑한 지하철이 나타났다고 그의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저 평온하고 조용한 하루가 이어졌단다.
그렇게 새해가 되고 2월이 됐단다.
“근데 이 빌어먹고 두 번 세 번 끝없이 빌어먹을 회사에서 그 똑똑한 지하철을 구매했다고 하더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지하철을 통째로 산 게 아니라, 똑똑한 뇌만 쏙 골라서 구입했단다.
지구상 모든 것들이 그렇듯 똑똑함은 시대를 막론하고 최고의 가치란다.
그래서 그 뇌는 무척이나 값이 나갔단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자기가 지난 13년 동안 아끼고 어루만지며 운전해왔던 열차에 그 비싸고 똑똑한 뇌를 장착시키는 게 아니겠는가?
“뭐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흥미로운 내용이 연달아 이어지자 류기태는 저도 모르게 호응하고 만다.
김선범은 이번에는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내용을 이어간다.
“회사가 사온 자율주행 프로그램을 기존 열차에 설치했어요. 그리고는 대뜸 저한테 며칠 휴가를 다녀오라는 거예요.”
그거 참 좋은 회사구만, 류기태가 속삭인다.
자기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며 김선범은 분통한 듯 주먹을 불끈 쥔다.
가족들과 오랜만에 시간을 보내고 회사로 돌아오자, 첫사랑, 그러니까 열차가 전혀 딴 사람이 되어있단다.
화장법, 머리스타일, 얼굴은 그대론데 말투나 가치관 같은 것이 바뀌어있었단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며 홍지선이 묻자, 김선범이 보다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열차 내 대부분의 시스템이 자율주행 프로그램에 맞춰져있더라고요. 다시 말해서, 그 열차도 자율주행 지하철이 된 거죠.”
분명 겉모습은 이전과 다를 게 없었는데, 속을 뒤집어보면 전혀 다른 열차가 되어있던 것이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단다.
그리고 곧바로 본인에게 처한 위기를 깨닫게 됐는데 그건 바로, 더 이상 이 열차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단다.
“그럼 청소도 지하철이 알아서 해요!?”
선하나가 화들짝 놀라며 묻는다.
그건 아니란다.
청소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힘으로 한단다.
어디까지나 운전에 한하는 내용이란다.
“아, 역시.”
“다른 2호선 열차들도 전부 자율주행으로 바뀐 거예요?”
뒤이어 장석기가 질문한다.
그렇다고 답한 뒤 김선범은 크게 심호흡한다.
몸 곳곳에 진득하게 들러붙은 울분을 내보내려는 듯이 몇 번이고 반복한다.
“그렇게 회사에서 쫓겨났군요. 더 이상 기관사들이 필요 없으니까.”
손 씨가 자기도 전 직장에서 매몰차게 쫓겨나봐서 어떤 심정인지 잘 안다며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위로를 건넨다.
그건 아니라고 명확한 선을 그은 후, 김선범이 고개를 든다.
그의 눈은 내 억울함은 아직 시작도 안했음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회사가 물론 기관사들과 어떠한 상의도 없이 열차 시스템을 바꿔버린 건 잘못이지만, 나름 직원들의 처우를 위해 힘써왔단다.
먼저, 사내 모든 임원들도 안타까운 감정이 절로 든다며 대대적으로 메시지를 전해왔단다.
인류가 잘 살자고 다함께 발전을 도모해왔건만, 잘 사는 사람 따로 낙오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단다.
물론, 여기서 ‘낙오되는 사람’은 기관사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단다.
의도가 어찌됐든 수반되는 결과만 테이블 위에 잘 올려놓고 보자면, 멍청해서 인간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던 기계들이 어느덧 몰라보게 똑똑해졌단다.
콕 짚어 말해자면, [컴퓨터]가 너무 똑똑하단다.
게다가 컴퓨터는 똑똑한데다가 성격도 둥글둥글해서 어디에 가져다놔도, 누구랑 붙여다놔도 못 어울리는 법이 없단다.
그래서 어떤 호기심 많고 시간도 많은 인간이 컴퓨터와 지하철을 한 공간에 둬봤더니, 아니 글쎄 이것들이 좋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뜨거운 만남 끝에 탄생한 것이 자율주행 지하철이란다.
그걸 본 임원들은 옳다구나! 했단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도 도래했는데 자네들은 뭐 신기한 거 없냐는 식으로 굴고 있단다.
혁신, 또 혁신이란다.
결정적으로 월급은 당연하고 기왕 주는 김에 쉬는 시간도 왕창 주라는 직원들의 투정이 지겹던 참이란다.
“회사 입장에서는 굴러온 복덩어리겠네요. 근데 회사에서 처우 개선에 힘썼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 손 씨가 묻는다.
“아, 맞아요. 마저 얘기하자면…….”
그러던 차에 짜잔, 반가워, 하고 나타난 자율주행 시스템이 임원들 눈에는 더없이 예뻐 보였단다.
명령어만 입력하면 군말 없이 업무를 수행하는 건 당연지사고, 똥도 안 싸고 불만도 없는 똑똑한 물건이 등장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단다.
가장 좋은 건, 얘는 밥도 물도, 월급도 안 먹는단다.
그러한 관계로, 말을 빙빙 돌려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거 같은데, 기관사들 일자리는 더 이상 여기에 없을 거 같단다.
실직 위기에 놓인 기관사들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어디에 있냐고 따지고 들자 저기, 어디 지방에 가보면 있을 거란다.
다행히도 지하철은 서울만의 대중교통이 아니란다.
대한민국처럼 대중교통이 잘 발달된 나라도 몇 없단다.
천만다행이란다.
그중에 가장 다행인 점은 꼽자면, 서울 지하철과 지방 지하철은 똑같이 생겼다는 점이란다!
자기네들이 멋지고 근사한 전근의 다리를 놔줄 터이니, 어서 빨리 그곳으로가 멋진 운전 실력을 뽐내보란다.
“그날 오후, 시위가 시작됐어요. 2호선 기관사들이라 해봐야 몇 안 되지만…….”
그 몇 안 되는 기관사 중 한 명이 뒷말을 흐린다.
“서울에는 아예 일자리가 없었어요? 서울에 지하철 엄청 많잖아요.” 선하나는 김선범의 발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거기나 여기나 똑같겠지 뭐.”
류기태가 미국 명문대 출신다운 답변을 대신 내놓는다.
“2호선이 그렇게 됐다는 건, 다른 호선도 곧 그렇게 될 거라는 소리나 똑같아.”
“맞아요. 실제로 올해 겨울부터는 서울·경기 모든 열차에 자율주행 프로그램을 순차적으로 적용시킬 예정이래요.”
업계 종사자의 신뢰성 있는 답변에 류기태는 혀를 끌끌 찬다.
“우리나라 사람들 가만 보면, 참 순차적인 거 좋아해. 뭐든 속 시원하게 한 번에 하는 법이 없어.”
김선범이 말을 이어간다.
“시위는 하나마나였어요. 이미 열차는 아무런 이상 없이 운행됐고 승객들도 어떤 불편함도 못 느끼게 됐죠. 사실 지하철이라는 게 택시나 버스처럼 누가 운전하느냐에 운행 능력이 크게 좌지우지되는 교통수단이 아니니까요.”
선하나는 어떤 지하철을 보면 정지선 하나 못 맞춰서 한참 지체된 후에 출입문이 열린다고 나름 위로의 말을 건넨다.
“고마워, 학생…….”
김선범의 심심한 위로에 심심하게 대답한다.
“난 운전 잘했어. 정지선 하나는 잘 지켰지.”
그렇게 말한 뒤, 김선범은 돌연 바지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든다.
“오오, 핸드폰!”
오랜만에 목도한 현대문물의 결정체에 선하나가 눈을 반짝인다.
김선범이 볼륨 버튼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누른다.
“당시 임원실에서 나눴던 대화 내용을 녹음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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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 시위는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김선범: 더 할 거다. 말리지마라. 기관사들의 일자리를 보장하라.
임원: 일자리 보장? 하지 않았나. 벌써 열다섯 번 정도는 말한 것 같은데, 지방으로 가면 된다. 그만하면 괜찮은 수준으로 보장하지 않았나?
김선범: 서울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집을 버리고 갈 수 있겠나?
임원: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다 잘 살게 되어있다. 왜 가보지도 않고 거절부터 하나? 지방이 서울보다 안 좋다는 건 전부 서울사람들의 편견이다. 편견은 나쁘다. 지방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알게 되면 무척 슬퍼할 거다.
김선범: 내가 지방 출신이다. 아이만큼은 서울에서 교육시키고 싶다.
임원: 그럼 당신만 지방으로 가라. 아이와 아내는 서울에 남으면 되지 않나? 기러기부부도 있는데,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다. 시차도 같으니 안부전화 주고받기도 수월할 것 아니냐. 이참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걸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보라.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흔한 안부전화도 힘들었을 것이다.
김선범: 이곳이 미국이었으면 시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총기를 거래할 수 있다. 총은 말보다 빠르다.
임원: 무서운 소리는 그만하라.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김선범: 어쨌든, 만약 지방에서 살게 된다면, 거주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 좁은 원룸이나 고시원 같은 곳에서 지내라는 말이냐.
임원: 지방 집값은 서울처럼 터무니없이 비싸지 않다. 서울에 비하면 무척 합리적인 가격이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김선범: 그럼 회사에서 지원해줄 수 있나? 신축 아파트는 바라지도 않는다. 혼자 살기 적당한 크기면 된다. 기왕이면 깔끔한 빌라나 시내에 있는 아파트면 좋겠다.
임원: 그건 좀……, 애매한 문제다.
김선범: 그럼 사내 대출제도 혜택을 확대해줄 수 있나? 현재 수준으로는 원룸 전세 수준밖에 안 된다. 대출한도를 늘리고 이자도 조금 낮춰주면 가능할 것 같다.
임원: 그것도 좀……, 애매한 문제다.
김선범: 다 애매하다고하면, 확실한 게 도대체 무엇이냐? 어디 말해보라.
임원: 요새 원룸이나 고시원이 워낙 잘 지어져서 혼자 살기 괜찮다는 건 확실하다. 장담할 수 있다.
김선범: 장난하나? 분명 직원들의 처우 개선에 손닿는 대로 힘써보겠다고 하지 않았나?
임원: 나도 무척 애석하게 생각한다. 손이 잘 닿지 않는다. 사실 옛날부터 팔이 짧은 게 콤플렉스였다.
김선범: 화나게 하지 말라. 시위는 계속 될 거다. 개선된 합의안을 들고 와라.
임원: 그렇게 매몰차게 굴 거 없지 않나.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대화를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보자. 그동안 서로 웃으면서 일하지 않았나. 앞으로도 그래보자. 인생은 정말 길다. 굳이 얼굴 붉힐 거 있나.
김선범: 지금 당신네들만 웃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냐. 우리 기관사들한테 좋은 게 대체 뭐냐. 좋은 거라고는 없다.
임원: 지방은 공기가 좋다. 공기가 좋으면 건강도 좋아진다. 건강이 좋아지면 인생이 좋아지니 이게 바로 전부 좋은 거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인생은 길다.
김선범: 그렇게 좋으니 회사 모든 임직원이 다함께 움직이면 좋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이참에 공기 좋은 지방으로 가자.
임원: 그것이 좀……, 애매한 문제다.
김선범: 됐다. 이만 일어나보겠다. 당분간 출근할 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임원: 그게 무슨 소리인가? 너무 섬뜩한 발언 아닌가?
김선범: 요새 너무 비싸서 계란은 못 던지겠지만, 뇌가 울릴 정도로 시끄럽게 해줄 자신은 있다. 요새는 스피커가 잘 나와서 효과가 아주 좋다. 쩌렁쩌렁 잘 울린다.
임원: 오오, 그거는 괜찮다. 요새는 이어폰도 잘 나와서 ‘노이즈 캔슬링’이라는 근사한 기능이 있는데, 이게 그야말로 바깥 소음을 전부 차단해준다. 그래서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 음악을 제외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요새 트로트에 빠져있는데, 오히려 잘 됐다. 얼마 전에 아들이 선물해줬다.
김선범: ……아들은 잘 크나.
임원: 지난달에 취업을 했다.
김선범: ……축하한다.
임원: ……고맙다.
김선범: 그나저나 정말 너무하다. 회사가 직원을 버리는 법이 어디 있나.
임원: 작년 자진 퇴사율을 보면 그 말은 주어 담고 싶을 거다. 정말 처참하다. 회사 터가 안 좋은 것인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무실 이전이라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김선범: 오호, 혹시 그거 알고 있나? 나도 최근에 들은 정보다. 너무 최근에 들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임원: 오오, 무엇인가 그 최근 정보라는 것이?
김선범: 지방은 집값이 싸다는 것이다. 그러니 건물도 저렴할 것이다.
임원: ……안타깝지만 이사는 정말 애매한 문제여서 아직 결정을 못했다. 고려할 사항들이 너무나 많아서 결정을 내리는데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 대략 이십년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김선범: ……정말 너무하다. 서운할 지경이다. 아니, 이미 서운하고 이제는 비참하다.
임원: 내가 이제 하게 될 제안을 들어보면 그 말도 주워 담고 싶을 거다. 이번엔 진짜다. 기대해도 좋다.
김선범: 무척 기대가 된다.
임원: 이건 철저히 당신만을 위한 제안이다. 다른 직원들은 알면 안 된다.
김선범: 꼭 품절이 임박했다는 홈쇼핑 쇼호스트의 멘트처럼 들린다.
임원: 바로 그것이다. 자, 들어보겠는가?
김선범: 나는 나 혼자 살겠다고 그런 음흉한 제안을 받아드리는 사람이 아니다. 여태 그런 사람으로 봤다면 단단히 잘못 봤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다면 막을 의향은 없다. 다만 내 귀에는 ‘노이즈 캔슬링’이라는 근사한 기능이 없어서 외부 소리를 차단하지 못한다. 그 점 양해 부탁한다.
임원: 내가 당신에게 선보이는 제품은 바로 이것이다. ……그전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비밀을 유지해줬으면 좋겠다.
김선범: 내 입에는 나불거리는 기능이 없다.
임원: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자, 각설하고 말하겠다. 만약 당신이 시위를 그만두고 지방에서 새 일자리를 구할 경우, 꽤나 쾌적한 거주공간을 제공하겠다. 아쉽지만 아파트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강아지를 키울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할 것이다.
김선범: 나는 강아지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임원: 오오, 듣던 중 무척 반가운 소리다. 그 경우라면 더욱이 내가 하는 제안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제공될 거주공간은 다름 아닌 복층이니까. 고양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즐겁게 점프해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김선범: 그냥 복층구조로 된 원룸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가?
임원: 복층을 원룸으로 보는 건 지극히 편협한 사고이다. 엄연히 두 개의 공간이 있으니 투룸이다. 그리고 이건 정말 내 비장의 수나 다름없지만, 여기서 펼쳐보겠다. 자, 준비됐나?
김선범: 준비는 당신이 해야 한다.
임원: 난 준비되었다. 자, 만일 지금 이 자리에서 ‘오케이’라고 아주 경쾌한 목소리로 느낌표를 서너 개쯤 붙여서 대답한다면 투룸이 쓰리룸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끔은 서울에 있는 가족들을 불러 재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 봐라. 내가 이렇게나 다정한 사람이다.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김선범: 내가 기대했던 것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기대한 내가 잘못이다.
임원: ……당신이야말로 미친 거 같다. 이 제안을 거절하다니. 이런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김선범: 그 멘트도 홈쇼핑에서 자주 나온다. 자, 이제 마지막 멘트를 하면 된다.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품절됐다고 외쳐라.
임원: ……나가달라. 이제 곧 점심시간이다. 메뉴로 제육볶음이 나온다고 해서 평소보다 일찍 갈 생각이다.
김선범: 좋은 소식 감사하다. 그리고 다이어트 꼭 성공하길 바란다.
임원: 다이어트? 나는 살아생전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다.
김선범: 그런 것 같다. 다 알면서 심술 나게 하려고 물어본 것이다. 그 배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신 배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듯하다. 고지혈증, 고혈압, 고도비만, 내장지방…….
임원: ……나가달라. 혈압이 오르려고 한다.
김선범: 오오, 조심조심. 아침에 일어나면 혈압 약 꼬박 챙겨먹으라. 고혈압은 평생 관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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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범은 그날 임원과의 대화에서 호기롭게 문을 쾅 닫고 나왔지만, 다른 기관사들은 아니었다.
빨간 조끼를 입고 시위에 함께 참여했던 동료들은 임원의 제안을 넙죽 받아먹었다.
그로부터 다시 보름이 흘렀을 때, 절반 이상의 기관사들이 지방으로 떠났다.
생계를 위해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가장들의 선택을 이해 못한 건 아니었다.
동료들의 이탈이 슬펐지만, 괴롭지는 않았다.
또 다시 일주일이 흘렀을 때, 김선범은 괴로워졌고, 오해의 풍파에 고통 받아야 했다.
안부나 전할 겸 연락했던 동료에게서 욕설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치사한 새끼야, 혼자 살겠다고 주변 사람들 버리는 거냐?”
“……형,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제가 누굴 버려요?”
김선범의 무구한 목소리에 열불이 났는지 동료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다 들었어, 인마! 네가 임원들이랑 짜고 친 거. 뒤에서 얼마나 받아먹었냐? 좋겠다? 다음 주에 서울에 남아있는 애들 전부 내려온다는데, 잘했다고 돈 더 받는 거 아니야? 내가 처음에 듣고 설마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럴 줄이야. 꺼져. 앞으로 연락하지 말고 거기서 잘 처먹고 잘 처자고 살아라.”
그렇게 친한 동료와의 통화가 끊어졌고, 다시는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
그리고 동료 말대로 시위대에 남아있던 나머지 기관사들도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김선범은 홀로 남았다.
동료들 사이에서 돌고 돈 소문과 달리 그가 얻은 이득은 전무했다.
동료도 직업도 전부 잃었다.
소문을 자세히 뜯어보니 모든 게 다이어트를 해본 적 없다던 그 임원의 계략이었다.
임원은 그에게 했던 것처럼 여타 기관사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용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시위를 그만 두면 지방에서 일할 때 편히 휴식할 수 있는 거주공간을 마련해주겠다.
임원은 여기에 단 한 마디를 덧붙였다.
“김선범이한테 듣고 온 거지? 그래, 잘 생각했어.”
목적어를 쏙 뺀 그 말은 동료들의 혼란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동료들은 매 시위 때마다 앞장서서 권리를 부르짖던 김선범의 이중적인 면모에 치를 떨었다.
“그대로 저는 회사에서 해고됐어요. 아, 사실 해고라기보다 제 발로 나온 거죠.”
김선범이 애써 울음을 참으며 덤덤히 말한다.
나랑 이런 차이점이 있구나, 회사가 재정적인 문제로 이리저리 휘청거렸을 때 누구보다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꼬꾸라진 손 씨가 중얼거린다.
정리해고에 희생된 그는 퇴직금과 저축을 털어 지하철 광고업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직 번듯한 사무실은 마련하지 못했다.
집이 곧 일터였다.
광고업자는 그야말로 발로 뛰어 영업하는 것이 전부인 직업인데 사무실 월세를 지불하기에는 그의 튼실한 종아리가 아까웠다.
“그래……, 어쩐지 두 눈에 슬픔이 가득해보였어. 그런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구만.”
류기태는 정말 안타깝다는 얼굴을 아주 능숙하게 만들어낸다.
“그런데 기관사 양반, 이렇게 길고긴 이야기를 들었지만, 도무지 내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아서 말이야. 도대체 이 지하철은 왜 점거한 거요? 칼은 또 왜 그리 무식하게 휘둘렀고, 또 아까 우리더러 승객이 되어달라는 말은 뭐고. 질문이 너무 많아서 조금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