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지하철
“궁금한 게 많은 건 좋은 거죠.”
김선범은 어느덧 류기태의 호연지기에 감화됐는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한다.
남들에게 이렇게 속에 있는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일종의 긍정적인 효과이다.
그의 고통은 가족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대답은 언제 해주려고? 점심 먹고? 벌써 두시 반 됐어!” 류기태가 대답을 재촉한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선하나와 채소윤이 동시에 화들짝 놀란다.
“아니, 내가 체감하기에 그렇다고.”
자기도 이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길게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며 바로 대답하겠다고 김선범이 혼잣말처럼 웅얼댄다.
먼저, 지하철을 점거한 이유는……, 일단 그전에 두 번째 질문 먼저 답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단다.
칼은 왜 그리 무식하게 휘둘렀냐는 질문은……, 오늘 자기가 왜 이 지하철을 타게 됐는지 먼저 설명해야 이해가 빠를 거라고 한다.
뭐라도 좋으니 일단 설명부터 해보라고 홍지선이 답답하다는 듯 외친다.
이런 사람에게 목숨을 맡길 생각을 한순간이라도 했던 자신이 한심스럽다.
그러는 와중에 그녀의 창백한 낯빛은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중년여성처럼 보인다.
적어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상처만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시간 순서대로 오늘 본인이 저지른 짓에 대한 정리가 끝난 김선범이 드디어 답변을 늘어놓는다.
“먼저, 저는 제가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이 열차와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기 왔어요. 목적지는 따로 없었고, 그냥 되도록 오래 열차에 머무르다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근데 막상 열차에 오르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앞에서 내내 설명했듯이 이 열차는 자율주행 지하철이에요. 조종실은 있지만 그걸 직접 운전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 같은 기관사가 필요 없는 거죠. 그게 절 화나게 만들었나 봐요. 벌써 두 달이나 흘렀지만, 다시 그때 일이 떠올랐어요.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저도 모르게 조종실 칸으로 들어갔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됐어요. 마침 주머니에는 회사에 반납하지 않은 열쇠도 있었거든요.”
“계획 범행이네.” 류기태가 성급히 결론 내린다.
“……그런 거 아니에요! 일단 들어주세요.”
그렇게 조종실로 들어간 김선범은 오랜만에 만나는 조종실에 감격했단다.
동시에 분노도 했단다.
인간의 손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곳이 더 이상 더럽혀지는 꼴을 볼 수 없었단다.
결국 그는 세균 덩어리인 손을 이용해 레버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기타 여러 장치들을 조작했고 열차는 자율주행 모드에서 본래 상태인 수동주행 모드로 변환됐단다.
그리고 자신의 세심한 조작으로 출입문의 개폐 기능을 정지시키고 덩달아 더 이상 승강장에서 정차하지 않도록 했단다.
“왜 아저씨가 칼 들고 위협한 내용은 쏙 빼요?”
선하나의 지적에 김선범은 이제 하려고 했는데 먼저 언급해줘서 고맙다고 한 뒤, 자기가 바라는 건 특별한 게 아니라고 한다.
그저 승객들을 태우고 열차를 운행하는 거란다.
혹여 자기에게 걸쭉한 연민을 느껴 친구가 되어주고 싶은 감정이 든다면, 지금만큼은 감정에 충실해도 된단다.
사실 자기도 무척 외롭단다.
여태 가족이 최고인줄 알고 살아왔으나, 막상 심각한 일을 겪고 나니 가족한테만큼은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 없단다.
왜 최고인 가족한테 말을 못하냐고 선하나가 묻자, 가족이 최고라서 그렇단다.
가족만큼은 번쩍번쩍 빛나야한단다.
어떤 괴로움이나 상처도 줄 수 없단다.
더군다나 가장 때문에 훼손되는 건 있을 수 없단다.
기관사 양반은 가족을 사랑하지만 정말 희한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 같다고 짧은 감상평을 한 뒤에 류기태는 자기한테 좋은 생각이 있다고 자신 있게 외친다.
그러자 열차 내 대부분의 승객들 입에서 다시 한 번 차분히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류기태에게 재고할 것을 권한다.
좋은 생각은 좋은 생각일 때만 좋을 수 있단다.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류기태는 여러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잠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기로 한다.
5초 후, 장시간의 고민 끝에 그는 다음과 같은 수를 내놓는다.
“기관사 양반, 우리 친구할까?”
김선범은 류기태의 발언이 의미하는 바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두 눈을 껌벅이고는 대답한다.
“……저, 어르신, 올해 연세가?”
“육십하고 다섯.”
“저는 마흔하고 넷인데요…….”
김선범이 난처하다는 듯 말한다.
“그래서?” 류기태는 당당하다.
“아……, 네? 저, 아니, 그러니까. ……좋다고요.”
“다들 잘 들었지?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기관사 양반이랑 친구하는 거야.”
“……?”
[다들]로 한데 묶인 사람들은 멀뚱멀뚱 백발 노인만 쳐다본다.
“왜? 싫어? 지하철 운전할 줄 아는 친구 한 명 있으면 좋을 거 같지 않아? 단체여행 같은 거 갈 때 좋잖아. 지하철은 어디 가서 사야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류기태의 자기만족을 위한 금일 대화상대 목록은 돌연 직장도 잃은 마당에 선천적으로 외로움도 잘 타는 김선범의 새로 사귄 친구 목록으로 그 용도가 변경된다.
그 변화 과정에서 한 가지 누락된 부분이 있음을 알아챈 류기태는 냉큼 수정한다.
수정본은 다음과 같다.
본인 인적 사항이 당당히 맨 윗줄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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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기태: 男, 65세, 백수, 하버드 졸업생
// 채소윤: 女, 36세, 중학교 영어선생, 졸린 눈
// 고재성: 男, 40세, 항문외과 의사, 무테안경
// 선하나: 女, 15세, 여자중학교 학생, 까만 눈, 화가 많음
// 홍지선: 女, 55세. 주부, 까칠함, 예민함
// 손준겸: 男, 43세, 지하철 광고업자, 사각턱
// 김선범: 男, 44세, 지하철 기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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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파 보스 조광필, 형제캐피탈 사장 도상길
서울 모 병원 응급실, 한적한 골목길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도상길 사장이 눈을 뜬다.
바로 옆 침대에 누워있던 조광필 사장도 눈을 뜬다.
성별, 나이, 부상 원인과 범행 신분까지 모두 같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면 둘 사이 차이점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바로 머리숱이다.
한쪽은 0에 수렴하고 다른 한쪽은 100을 향해 발산한다.
“아이고, 대가리야." 조광필이 중얼거린다.
“아이고, 대가리야.” 도상길도 중얼거린다.
왼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동작까지는 두 사람 모두 똑같지만 손바닥에 닿는 촉감은 사뭇 다르다.
한쪽은 매끈하면서 체온이 느껴지고, 다른 한쪽은 푹신하면서 체온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오른손 팔꿈치 안쪽에는 역시 똑같은 링거바늘이 꽂혀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둘 다 오른쪽 손목에는 수갑을 차고 있다는 것이다.
“씨벌, 뭐야? 수갑?” 조광필이 소리친다.
“뭐여, 씨벌? 수갑?” 도상길도 소리친다.
“그래, 수갑이다. 이 새끼들아.” 고종한 경위가 건들거린다. “네놈들이 왜 여기 있는지 기억은 하니?”
“……제가 좀 아픈 거 같은데요, 형사님? 근데 큰 병은 아닌 거 같아요.” 조광필이 차분하게 본인의 상태를 파악한다.
“저는 좀 배고픈 거 같아요, 형사님.” 도상길도 본인의 현재 상태를 더없이 정확하게 파악한다.
도주에서 추돌사고로까지 이어져 평소와 다른 격렬한 움직임을 소화한 도상길의 목과 허리는 의료진의 특별감시대상이 되었고, 이제 곧 그의 텅 빈 뱃속도 따뜻한 관심과 음식을 요할 예정이다.
“자세한 얘기는 우리 이따 서에 가서 하기로 하고. 밥도 이따 가서 줄게. 물론, 시간 남으면.”
고종한 경위의 말에 도상길은 기왕 시간이 남을 거 풍족하게 남았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말한다.
아무렴 병원 밥보다야 경찰서 밥이 나을 것 같단다.
“야, 그건 그렇고, 아까 공원에서 네 놈들이랑 같이 있던 노란마스크.”
경찰의 말에 조광필은 바로 정성도를 떠올린다.
아무리 큰 조직이 할지라도 서열 3위의 이름을 잊을 보스는 없다.
하물며, 전체 인원이 4명인 조직의 수장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고종한 경위가 뚫어져라 두 범죄자의 눈을 응시한다.
“그놈 어디 갔어? 우리 애들 싹 다 동원해서 사무실 뒤져봐도 없던데. 따로 지령이라도 내렸어? 잘 숨어있으라고?”
사무실을 뒤져봤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실 사무실 위치는커녕 조직의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얼마나 거대할지 고종한 경위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
'우리 사무실이 경찰들이 총동원돼서 뒤져볼 정도로 컸나……?'
조광필은 의아해한다.
정성도가 어디로 갔는지 정말 모르는 일이다.
“모른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사전에 정해놓은 대기 장소 같은 곳이 따로 있을 거 아냐!”
사전에 정해놓은 건 약속 시간과 약속 장소뿐이어서 자기도 부끄럽지만 그게 말이 되는 것 같다고 조광필이 하소연한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내가 가만두나봐라. 콩밥 제대로 먹여줄게.”
범죄자들의 모른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오인한 고종한 경위는 판에 박힌 듯한 말들을 차례차례 뱉는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형사들이 하는 대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 창작물들이 고증과 사례조사가 잘된 작품들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그저 평소 범죄자를 대할 때처럼 말할 뿐이다.
식물성 단백질을 오이만큼이나 싫어하는 도상길이 질색을 표한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전부 말씀드릴게요. 대신 잊으시면 안돼요.”
“오, 그럼 물론이지. 협조만 잘해주면, 내가 정상 참작은 잊지 않고 힘써볼게.”
고종한 경위가 상대를 바꿔 공략한다.
“아뇨, 그거 말고 이따 경찰서에서 밥이요.”
“……이 새끼가.”
형량보다 끼니를 먼저 걱정하는 범죄자는 그간 만나보지 못한 고종한 경위는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잠시 생각을 정리한다.
“자, 보스는 누구야?”
“……?”
“……?”
“조직에서 보스가 누구냐고? 네놈들 대가리가 누구냐고!”
도상길은 정말 그 어느 때보다 성실히 답변할 생각이었으나, 그 질문만큼은 대답할 수 없다.
그건 조광필도 마찬가지다.
사마천파와 형제캐피탈, 두 사장은 어찌어찌 인수합병까지 이뤄냈지만, 한층 거대해진 조직의 보스를 누구로 할지는 아직 결정짓기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섣불리 결정할 수도, 결정해서도 안 되는 문제다.
모든 조직원들의 참여하에 결정할 중대 사안이다.
그런 이유로 두 후보자는 말을 아낀다.
준비하지 않은 발언을 일삼을 수는 없다.
“이것들이, 말 안 할 거야?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점점 열을 올리는 고종한 경위의 외침에도 도상길과 조광필은 서로의 눈치만 살핀다.
아무리 경쟁자라지만, 입이 무겁다는 점이 퍽 마음에 든다.
#지하철
“이제 점심 좀 먹어볼까요?”
선하나가 조심스레 제안한다.
기껏 힘들게 얻어낸 성과가 인질범과의 화해로 인해 의미가 다소 퇴색된 감이 있지만, 이 세상에 빈속을 채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몇 개 없다.
“그나저나, 뭘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승강장으로 배달해줄까요?”
손준겸이 의문을 제기한다.
그간 광고업체를 운영하면서 지하철 승강장까지 배달해준다는 음식점 광고는 본 적도, 그런 광고를 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도 없다.
“공원 한복판도 잘 찾아오는데 지하철역이 뭐 어렵다고.” 류기태는 하다하다 무슨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느냐는 말투다.
“저, 저기…….”
사연 소개를 마친 김선범은 어딘가 홀가분해 보인다.
게다가 눈앞에 새로 사귄 여러 친구들까지 있으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그렇지만 아무리 아끼는 친구들이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김선범은 열차 내에서는 취식이 불가하다는 방침을 알려준다.
“……그래? 언제 그렇게 바뀐 거야?”
류기태가 그런 얘기는 못 들었다며 미리 뉴스로 공지 같은 걸 해줬어야하는 것 아니냐, 투덜댄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열차 안에서 새우깡에 막걸리를 먹었단다.
그러자 김선범은 자기가 알기로는 서울에 지하철이 들어선 그 순간부터 발효되어왔다는 취식금지 방침의 역사에 대해 짧게 요약해준다.
취식행위가 적발될 경우 벌금이 있으니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도 해준다.
그리고 그간의 만행을 지켜보기만 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승객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라는 격려의 말도 잊지 않는다.
“……우리 뭐 먹을까? 친구 되고 처음 같이하는 식산데 기왕이면 맛있는 거 먹어야지.” 류기태가 화제를 돌린다.
“뭐, 사실 저도 이제 상관없는 입장이니 신경 안 쓰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죠. 뒷정리만 잘하고 가면 되지 않을까요?”
김선범은 전에 없던 발랄한 목소리로 친구들의 죄책감을 덜어준다.
불현듯 떠오른 죄책감에 고재성은 여길 나가기 전에 꼭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자, 하나씩 원하는 음식 말해봐. 뭐가 먹고 싶은지.”
이번에도 류기태가 나서서 친구들의 음식 취향을 묻는다.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다 잘 먹어요.” 선하나가 가장 먼저 대답한다.
“오케이. 굶으시고. 자, 다음!”
“아뇨, 아뇨! 안 먹겠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나는 [아무거나] 라는 음식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 먼저 고르고 정하면 안 될까요?”
선하나가 입술을 뾰족이 내민다.
“맘대로.”
뾰로통한 선하나의 표정이 재밌는 듯 류기태의 얼굴이 밝아진다.
이내 옆에 앉아있던 손준겸을 쳐다본다.
“자, 광고쟁이 당신은 뭐 먹고 싶어. 뒤지기 싫으면 똑바로 말해.”
43살인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기왕이면 100살이 되기 전까지는 뒤지기 싫었던 손준겸이 똑바로 대답한다.
“서브웨이 드시죠.”
대답을 들은 류기태가 머뭇거리자 선하나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든다.
“할아버지는 그게 뭔지 모르죠? 속으로 지하철을 무슨 수로 먹지? 이렇게 생각했죠?”
“……지하철을 무슨 수로 먹어? 그래도 용케 서브웨이가 지하철인지는 알고 있네?”
류기태는 어림도 없다는 듯 으스댄다.
“미국에 있을 때 많이 먹었지. 월링포드에 있는 지점도 가봤는데 나는.”
“……그게 뭔데요?”
“서브웨이 첫 직영점.”
류기태는 이제 그런 시시하고 재미도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서둘러 주문하는 게 어떻겠냐고 학생에게 묻는다.
선하나는 이번에도 지고 말았다는 분한 얼굴로 맘대로 하라고 대답한다.
“근데 주문을 어떻게 해요?”
전직 요리사답게 배달 음식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서브웨이 샌드위치만큼은 즐겨 먹었던 이한성이 현안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한다.
“젊은 양반이 주문도 안 해봤어? 어플 따로 있잖아.”
류기태가 친구를 꾸짖자 친구 장석기가 나선다.
“저희 지금 핸드폰이 없잖아요.”
그 말 한마디에 승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에 닿는다.
갑작스런 친구들의 뜨거운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김선범은 뒤늦게 그 이유를 깨닫는다.
“……아, 나한테 있구나.”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가져오겠다는 말과 함께 김선범이 조종실을 향해 걸어간다.
류기태가 홍지선을 향해 툭 내뱉는다.
“당신 얘기는 주문 먼저 하고나서 마저 듣는 걸로 하자고?”
홍지선이 대답한다. “……제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왜?”
류기태는 정말 궁금하다는 목소리다.
그렇게 중간에 틱 이야기를 끊어버리면 아쉬워서 오늘 밤 잠은 어떻게 자라는 것인지 묻는 얼굴이다.
그랬더니 홍지선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사과하기 시작한다.
류기태가 조금은 놀라며 이야기를 그만 두는 게 그렇게 사과까지 할 일은 아니라며 만류한다.
그러자 홍지선은 그게 아니라, 자기가 조금 위험한 물건을 들고 소리치며 정신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해보이는 행동을 해서 여러분을 더욱 불안하게 한 것에 대한 사과란다.
“왜 사람 헷갈리게 반대로 말을 하고 그래. ‘상당히’ 위험한 물건을 들고 소리치면서 정신적으로 ‘조금’ 불안정해보이는 행동을 한 거지.”
류기태는 홍지선의 말을 정정한 뒤, 근데 그거랑 이야기를 중간에 끊는 거랑 어떤 상관관계가 있냐고 묻는다.
홍지선은 흐릿한 미소를 짓는다.
열차에 탄 이후로 처음 보인 웃음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 얘기도 궁금해서요.”
“오호.”
류기태가 만족한 얼굴로 감탄한다.
아주 좋은 의견이라고 홍지선을 치켜세운 뒤, 실은 자기도 아까 들은 기관사 양반의 얘기가 꽤나 흥미로웠단다.
세상에 다른 사람 이야기만큼 재밌는 건 없단다.
싸움 구경이 그 다음가는 재미란다.
“다들 들었지? 당신들이 궁금하대.”
류기태가 잔뜩 신난 어린아이처럼 낄낄낄 웃는다.
김선범이 조종실 문 앞에 다다른 그때, 열차 출입문 바로 옆에 기대어 있던 검정색 가방이 그의 눈에 띈다.
한참 전부터 있던 물건이지만, 이제야 시야에 들어온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 마크가 들어간 더플백으로 아주 묵직해 보인다.
새로 사귄 친구들의 모든 것이 궁금했던 김선범은 친구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친다.
“여기 있는 커다란 나이키 가방 누구 거예요? 엄청 무거워 보이는데. 왜 바닥에 놨어요? 선반에 올려놓으세요.”
“가방? 난 빈손으로 탔고 빈손으로 내릴 생각인데?”
류기태가 말한다.
이어 다른 친구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라고 대답한다.
각자 들고 탔던 소지품은 핸드폰을 제외하고는 모두 본인과 함께 있단다.
부득이하게 핸드폰은 한때 인질범이었던 자에게 압수당했단다.
“아……, 그래요? ……그럼 뭐지? 엄청 큰 가방이에요.”
김선범이 의문을 가진다.
그 순간, 정성도의 뇌리에 한 단어가 불쑥 피어오른다.
이는 평소 범죄의 최전선에서 살아온 사람만이 떠올릴만한 것이다.
헤드폰의 음량을 최소한으로 줄여두고 내내 사람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정성도가 실로 오랜만에 말을 뱉는다.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이니만큼 파급력이 대단하다.
“폭, 탄?”
“……폭탄?”
“폭……탄?”
“폭탄……?”
정성도가 착용하고 있는 큼직한 헤드폰 때문인지 특정 단어를 옆 사람에 전달하는 놀이―고요 속의 외침―처럼 비춰진다.
승객들은 동그랗게 두 눈을 뜬 채로 옆 사람에게 말을 전한다.
“폭―탄?”
폭탄이라는 단어에 매사 침착하던 소년마저도 당황한다.
반경 1미터.
그 안에서 소년은 무적이나 다름없다.
소년을 해할 수 있는 어떠한 물리적인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폭탄은 다르다.
그 화학 기술의 결정체는 소년의 존재 자체를 단번에 지워버릴 수도 있다.
사실 범죄영화에서 폭탄을 많이 다룬다고는 하지만,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더군다나 비교적 평화로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폭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을 통틀어 ‘펑!’하고 터지는 물건을 본 기억이라고는 군대에서 본 훈련용 수류탄과 여름철 숙성된 우유팩이 전부일 게 분명하다.
그런데 검정색 가방을 보고, 그것도 완벽하게 닫혀있는 그것을 보며 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상상하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어찌됐든, 그 어려운 일을 김선범과 정성도가 해낸다.
김선범이 보고 정성도가 추측하는 진기한 광경이 벌어진다.
한 가지 비밀을 덧붙이자면, 정성도는 사실 군복무를 면제받았다.
어찌어찌해서 그리 되었다.
“폭탄!!!”
선하나의 외침으로 열차 객실은 실로 오랜만에 아비규환이 된다.
“폭타아아안!!”
“포오옥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