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자기소개는 언제나 민망하다

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by 류해인

#지하철

고재성의 뱃속상황이 진정되자 인질 일동은 진정한 평화를 되찾는다.


“자, 하던 거는 마저 해야지. 의사 양반까지 적었어. 다음은 누구야?”


류기태가 대답을 기다린다.


2초 후, 기다림에 지친 그는 선하나와 눈을 맞춘다.


“자, 학생 이름이 선하나고, 여중에 다니는 중학생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어. 더 알려줄 게 남아있지 아마?”


“그런 거 없는데요?”


호락호락하지 않은 중학생의 대답에 류기태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먼저 질문을 던진다.


“혹시 중2야?”


하버드 졸업생다운 의도가 명료한 질문이다.


철없다, 버릇없다,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유치하다, 등등 학생들 사이에서 수많은 부정적인 단어와 동의어로 통하는 그 단어를 질문에 포함시킨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할아버지 방금 저한테 욕한 거죠?”


실제 중학교 2학년 학생에게 그 단어는 짜증 버튼을 활성화시키는 명령어와 동의어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던 류기태는 살짝 당황한다.


“이게 왜 욕이야?”


중2처럼 보이는 학생에게 중2라고 묻는 것이 왜 쌍욕이 되는지 그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원래 그래요. 어르신이 이해하세요.” 채소윤이 도움을 준다. 선생님다운 끼어들기다. 이번엔 선하나를 향해 말한다. “얘, 그만해. 나쁜 뜻 아니었던 거 너도 알잖아.”


“모르겠는데요?” 중2 학생은 이미 토라질 대로 토라진 상태다.


“……그런 말투 그만하면 안 될까? 학교에서 자주 듣던 거라 밖에서까지 듣고 싶진 않은데.”


채소윤은 잘못을 저질러 교무실에 끌려온 학생을 훈육하는 것처럼 괴로워한다. 귀찮아하는 기색도 엿보인다.

“싫은데요? 제가 왜요?”


“……하던 얘기 마저 하세요.”


괜히 나섰다는 듯 물러서는 채소윤을 일별한 하버드 졸업생은 이번엔 다소 모호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뭐가요?” 반면 선하나는 중2 다운 태도로 일관한다.


“중학교 2학년 맞아?”


“맞아요! 할아버지는 그게 지금 상황에 그렇게 중요해요? 정신 사납게 왜 자꾸 묻는 거예요? 조용히 좀 하세요.”


가만히 앉아 대화를 듣고 있던 고재성은 한 마디라도 보태고 싶은 나머지 다소 적절치 않은 문장으로 끼어든다.


의사답게 똥이라는 근사한 단어를 두고 보다 점잖은 단어를 고르는 교양을 선보인다.


“학생도 화장실 가고 싶어? 갈 거면 끝에서 두 번째 칸으로 가. 맨 끝 칸은 내 화장실이야.”


“안 가요! 더러워 죽겠네, 진짜.”


선하나가 온갖 짜증을 담아 투덜댄다.


별안간 어린 학생에게 상처 입은 의사는 다시 말을 잃는다.


요란하게 킥킥대며 류기태의 펜이 슥슥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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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소윤: 女, 36세, 중학교 영어선생, 졸린 눈

// 고재성: 男, 40세, 항문외과 의사, 무테안경

// 선하나: 女, 15세, 여자중학교 학생, 까만 눈, 화가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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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인물을 추가한 류기태는 내친김에 남아있는 여자의 이름까지 적으면 되겠다고 혼잣말을 한다.


그는 홍지선을 향해 말을 건다.


“어이, 저기…… 여사님? 이라고 해야 되나? 어쨌든, 이름이 어찌 되나? 기왕이면 친절하게 나이랑 하는 일도 같이 말해주면 좋을 거 같은데.”


고재성이 똥구멍 간수를 잘 못하고 있던 긴박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앉아있던 홍지선이 싸늘하고 다소 도전적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썩 친절하지 못한 분이 친절 운운하니 조금 불쾌하네요.”


“……오호, 처음 나누는 대화치고는 퍽 유쾌하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류기태는 존대하며 한 발짝 물러선다.


“우리 잘 지내보자는 의미에서 악수나 할까요?”


어린 학생을 다그치는 걸로 모자라 쓸데없이 나서는 류기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홍지선은 얼굴만큼이나 못생긴 그의 손을 보고는 여전히 무신경한 어투로 답한다.


“홍지선이에요. 올해로 쉰다섯 됐어요. 그냥 주부에요. 악수는 싫어요.”


그녀는 못생긴 남자를 몹시 싫어한다.


특히나 늙은 남자일 경우 더 그렇다. 멋지게 늙어가던 남편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아하, 어쩐지.”


홍지선의 대답을 들은 류기태는 돌연 그렇게 말한다. 그러곤 펜을 놀린다.


“어쩐지……라뇨?”


홍지선의 물음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류기태는 손 씨를 본다.


류기태가 어떤 인물인지 대충 파악하고도 남을 만큼 시간을 보낸 손 씨는 냉큼 본인 신상정보를 읊는다.


류기태의 대화상대가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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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소윤: 女, 36세, 중학교 영어선생, 졸린 눈

// 고재성: 男, 40세, 항문외과 의사, 무테안경

// 선하나: 女, 15세, 여자중학교 학생, 까만 눈, 화가 많음

// 홍지선: 女, 55세. 주부, 까칠함

// 손준겸: 男, 43세, 지하철 광고업자, 사각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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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씨의 말이 끝나고 선하나가 급히 손을 든다.


류기태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아까 인질범 아저씨랑 했던 얘기가 생각나서요.”


툭하면 본인들이 인질이라는 사실을 깜박하는 다른 인질들이 그녀의 말에 관심을 보인다.


연장자들의 쏟아지는 관심에 기분이 좋아진 선하나는 아까 조종실 문이 살짝 열리고 그 안을 들여다본 순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운을 띄운다.


이윽고 인질범이 점심식사 제공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대목으로 넘어간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고재성은 혹시 화장실보다 점심식사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전후사정이 어떻든 간에 현 상황에 집중하기로 한다.


찌릿하던 복통은 사라졌고 불쾌하게 흐르던 식은땀도 어느덧 바싹 말라 쾌적한 상태다.


이제 약간의 음식물만 섭취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선하나의 보고가 끝난다.


좌중의 반응을 살피지만 더 볼 것도 없다.


인질들은 훨씬 더 특별한 일을 기대했다는 얼굴이다. 고작 점심식사 제공 여부로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잘했다는 칭찬까지는 아니어도 수고했다는 말 정도는 기대했던 선하나가 실망한다.


어린 학생의 기분을 살피는데 이골이 난 채소윤만이 그녀를 위로한다.


도저히 모른 체 할 수 없다.


“고생했네. 무서웠을 텐데. 잘했어.”


내친김에 소녀의 어깨도 토닥여볼까 하지만 채소윤은 두 손을 꿈쩍 하지 않는다.


대신 지나친 칭찬은 학생에게 지나친 고양감을 야기 시킬 수 있으므로 다음에는 더 잘하라는 격려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인다.


“그런데, 다음부터 식사 얘기는 용변 얘기 나오기 전에 해주면 좋겠다.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건 자연스러운데, 화장실 갔다가 밥 먹는 건 왠지 껄끄럽잖아.”


채소윤의 뒷말은 거의 듣지 않은 선하나는 학교 선생님의 칭찬에 나름 만족한다.


그리고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대답도 곁들인다.


“다음부터는 신경 써서 할게요.”


두 여자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시선이 엇나가자마자 벌컥 조종실 문이 열린다.


덜컹―!


금속성 소리에 몇몇이 크게 움찔한다.


“이런 시벌, 뭐여! ……깜짝 놀랐네.”


평소 본인 감정에 무척이나 솔직하고 남들과 감정을 공유하길 즐겨하는 류기태가 이번에도 솔직한 감정을 토로한다.


예상하지 못한 큰 문소리와 욕에 놀란 인질범 김선범의 등에 소름이 돋는다.


그는 자신 없는 걸음걸이로 열차를 가로질러 걷는다.


축 늘어진 좁은 어깨와 정신없게 움직이는 눈동자, 좁은 보폭이 김선범에게 잔재해있는 극소량의 위압감마저 휘발시킨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홍지선은 속이 터진다.


남자가 저리 빌빌대고 자신감이 없어서야 어디에 쓰겠냐며 속으로나마 열심히 흉을 본다.


아무리 봐도 믿음직스럽지 않다.


기준치를 한껏 낮춰 봐도 전문 범죄자는 아닌 듯하다.


고통 없이 한방에 남편이 있는 곳까지 데려가줄 실력 좋은 전문가를 기대했건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홍지선의 계획에 전면수정이 필요할 것 같다.


모든 인질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모인다.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시선이 한 사람의 다양한 신체부위에 닿는다.


김선범은 돌연 부끄러움을 느낀다. 꼭 런웨이에 선 모델처럼 느껴진다.


하필 열차 좌석 사이 복도처럼 생긴 공간과 밝은 조명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모델의 얼굴에 홍조가 핀다.


인질범이 조종실에서 나와 인질 무리를 향해 걸어오는 10초도 안 되는 시간동안, 소년은 결론을 내린다.


‘이 남자는 절대 사람을 해칠 수 없다.’


단련된 부분은 단 한군데도 없어 보이는 마른 체형과 자신감 없는 표정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에게서 풍기는 전체적인 인상이 그랬다.


타인의 신체능력, 나아가 공격성을 파악하는데 누구보다 적확한 눈을 가지고 있는 소년은 이번에도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결론을 짓는데 성공한다.


“안녕하세요?”


소년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짧은 대화를 통해 김선범의 심성을 모조리 간파한 선하나는 동네슈퍼 사장님을 대하듯 인사를 건넨다.


“또 보네요?”


선뜻 인사를 건네는 소녀를 보며 어른으로서의 본보기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 여덟 명의 어른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아, 앉아계세요.”


인질범은 인질들의 체력보전을 위해 계속 착석해 있을 것을 권한다.


그리고 본인도 자리에 앉는다. 제법 멀찍이 떨어진 거리지만 대화를 이어가는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인질범이 입을 연다.


“……저, 여러분, 안녕하시죠? 인사가 좀 늦었네요.”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다고 인질 중 최연장자 류기태가 대표해서 답한다.


그리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나이와 이름,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으신지? 하고 묻는다.


하고 있는 일은 <지하철 인질범>이라고 알아서 쓸 터이니 걱정 말라는 말도 덧붙인다.


혹여 지하철이 전문분야가 아니라면 범용성 있게 <대중교통 인질범>이라고 쓸 의향도 충분히 있으니 어떤 표현이 더 좋은지 고민해보고 의견을 달란다.


백발 노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인질범은 더 이상의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서둘러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아……, 저는 김선범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마흔 넷이고요.”


인질범의 나이에 손준겸은 안타까워한다.


1년만 먼저 태어났으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회사에 다니고 식당을 운영하는 친구는 있어도 인질극을 업으로 삼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참이다.


인질들은 인질범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내용을 담은 문장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어르신께서 무엇을 작성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직업을 알고 싶으신 거라면 아까 언급하신 지하철 인질범이라는 표현은 다소 부적절한 감이 있단다.


“역시! 범용성이 중요하지. 그럼, 무난하게 대중교통 인질범으로?”


류기태가 옳다구나 말하자 김선범이 죄송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며 예의바르게 류기태의 실수를 바로잡아준다.


지하철이 전문분야는 맞지만 엄밀히 따지면 본인은 인질범이 아니란다.


그러자 류기태가 그렇다면 우리는 인질범 없는 인질이 된 거냐며 붕어빵이 된 기분으로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따져야하냐고 묻기에, 김선범은 이번만큼은 사뭇 당당한 목소리로 본인 직업을 언급한다.


연애프로그램에 출연한 젊은 남녀가 직업을 밝히는 순간처럼 분위기가 고조된다.


“저는 철도기관사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하철을 운전하는 사람이에요.”


“그럼 자기가 직접 운전하는 지하철에 탄 승객들을 인질로 삼은 거예요? ……아저씨 좀 이상하게 나쁜 사람이네요?”


선하나가 얼굴을 찡그린다.


김선범은 교복을 입고 있는 어린 학생에게 학생이 한 말 중에는 몇 가지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첫째는 현재 자기는 이 지하철을 운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가장 중요해서 앞으로도 몇 번이나 강조할 생각인데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러분을 인질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이란다.


마지막 셋째는 자기는 이상하게 나쁜 사람이 절대 아니니 그런 실례가 되는 말은 삼가달란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방금 학생이 뱉은 문장 중 고쳐야 할 부분이 몇 가지 있는 게 아니라 전부 고친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맞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자기는 열 살 아들을 둔 아저씨란다.


“그 소리는 결혼을 했다는 말이네요? 대단도 하셔라.” 홍지선이 어이없다는 듯 묻는다.


“그렇죠? 물론 아이는 지금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김선범은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침울해진다.


“아픈 아들 수술비 때문에 우릴 인질로 잡아둔 거구나? 몸값으로 수술비 내려고!”


수첩에 새로운 인물을 작성한 류기태는 나름의 추측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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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소윤: 女, 36세, 중학교 영어선생, 졸린 눈

// 고재성: 男, 40세, 항문외과 의사, 무테안경

// 선하나: 女, 15세, 여자중학교 학생, 까만 눈, 화가 많음

// 홍지선: 女, 55세. 주부, 까칠함

// 손준겸: 男, 43세, 지하철 광고업자, 사각턱

// 김선범: 男, 44세, 지하철 기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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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기태의 말에 김선범은 더욱이 우울해진다.


중요한 사항이라 몇 번이고 반복해 설명할 의향은 있지만 이 정도로 단시간에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자기 말을 조금만 더 집중해서 들어달라고 하소연한다.


자기는 인질범이 아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여러분은 인질이 아니란다.


인질이 되고 싶다는 분을 굳이 나서서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럴 경우 인질범은 다른 사람으로 임명해달란다.


그리고 내 하나 뿐인 아들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건 맞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심각한 병에 걸린 건 아니니 안심하란다.


또,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만약 아들 수술비가 부족한 상황이 오더라도 선량한 시민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일 생각은 없다고 본인의 남다르지 않은 도덕관을 밝힌다.


“그럼 어디가 아파서 입원했어요?”


고재성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제창한 의사답게 인질범의 자식에게도 관심을 보인다.


“음, 그게…….”


김선범은 아버지로서 아들의 병을 밝혀야하나 고민한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는 항문, 하고 병명 대신 환부를 밝힌다.


항문이라는 말에 고재성은 항문외과 의사다운 냉철한 눈초리로 묻는다.


“항문질환이요?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대요? 그 어린 나이에 입원까지 할 정도에요?”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말하는 건 좀…….”


김선범은 항문질환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지하철이라는 공공장소는 그다지 적절한 장소가 아닌 거 같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고재성은 통상적으로는 그렇긴 하지만, 그 지하철에 항문외과 의사가 탑승해있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며 힌트를 준다.


지하철은 얼마든지 진료실이 될 수 있단다.


가끔 화장실도 되고.


김선범의 얼굴이 한층 밝아진다.


“항문외과 의사세요?”


“네, 그렇습니다. 잠실역 근처에서 병원 운영 중이에요. 나중에 아드님 데리고 한번 내원해주세요. 항문질환은 재발되는 경우가 정말 잦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재발을 바라는 건 아니고요. 보통은 그렇다는 거죠.”


김선범과 고재성의 대화에 한술이라도 뜨고 싶던 류기태는 잠시 틈이 보이자 “저기 말이야…….” 하며 냉큼 끼어든다.


항문질환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을 운영 중인 의사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류기태는 당신의 지적능력과 직업적 소명의식을 정말 대단하고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뇌에 주로 발병하곤 하는 질환을 겪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의사가 되묻기에 류기태가 다시 입을 연다.


오해는 말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라는 말을 도입부에 깔아둔다.


그리곤 그러한 질환을 갖고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이 종일 남의 똥구멍만 쳐다보며 살 수 있겠냐고 묻는다.


자기는 진즉 돌아버렸을 거라는 말도 덧붙인다.


“……지금 어르신 눈앞에 있잖아요. 멀쩡하게 살아있습니다.”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짐짓 태연하게 고재성이 말을 잇는다.


“아무튼 아드님의 쾌유를 바랍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김선범 씨.”


항문과 관련된 열띤 대화가 끝나자 오늘 처음 본 사람들 사이에서 풍기는 어색한 기류가 다시 고개를 든다.

“자, 그럼 식순에 의거해서 기관사 양반 사연이나 들어보자고.”


이번에도 류기태가 먼저 나선다.


“……사연이요? 갑자기 제 사연은 왜요?”


김선범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이제 자기는 대화에서 빠져나온 거 아니었냐는 표정이다.


어림도 없다는 얼굴을 한 류기태는 똥구멍은 똥구멍이고 기관사는 기관사인 것처럼 설사 당신이 인질범이 아니더라도 지하철을 조작하여 쉼 없이 달리게 해 승객들을 제때 하차하지 못하게 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칼을 휘둘렀잖아요.”


선하나가 류기태의 의견을 보다 탄탄하게 보완한다.


“왜 그렇게 잔뜩 화가 나서는 그랬는지 들어봐야죠. 이러다가는 궁금해서 오늘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겠어요! 그러다가 제가 내일도 지각하면 아저씨가 책임지실 거예요?”


“내일은 토요일이야.” 이한성이 어린 여동생을 타이르듯 말한다.


“어, 그러네?” 선하나의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맞아요. 저희가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가해자의 기억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불공정 거래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던 중학교 선생님 채소윤도 열을 올리며 거든다.


“……예,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뭐든 자유롭게 물어보세요. 다 대답해드릴게요.”


한때 인질범이자 인질범으로 오해를 살 뻔했던 남자는 죄송스럽고 머쓱한 미소로 이제 막 인질의 지위를 벗은 사람들에게 질문의 자유를 부여한다.


“내가 먼저 질문하지.”


언제나 1등을 원하는 류기태가 입을 연다.


“네, 어르신. 편히 물어보세요.”


김선범의 시선이 류기태의 백발과 퍼석한 피부에 가닿는다.


“어째, 오늘 집에서 나오기 전에 똥은 시원하게 쌌는가?”


안방을 드나들 듯 지나치게 편안한 자세로 류기태가 묻는다.


질문이 끝나고 대답이 나올 차례였지만, 전혀 다른 인물의 입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만들 좀 하세요!!!”


다름 아닌 홍지선이다.


지하철은 엄연히 공공장소이지만, 지쳐 보이는 중년여성의 부르짖음을 감당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 조금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홍지선의 손에는 눈에 익은 칼이 들려있다는 점이다.


“다들 무슨 정신병자들이에요? 어떻게 그렇게들 속도 없이 천하태평하게 수다나 떨고 있을 수 있어요?”


얇은 피부 덕에 홍지선의 목 핏대가 두툼하게 드러난다.


“…….”


김선범에게 향했던 좌중의 시선은 자연스레 중년 여성에게로 옮겨진다.


칼을 들고 큰소리를 외치고 있는 사람에게서 한시라도 눈을 떼기란 어려운 법이다.


총기 소지가 금지된 나라이니만큼 대한민국에서 칼은 아주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만큼은 그 설득력이 발휘되지 않는 듯하다.


내성이 이렇게나 무섭다.


열차 안에서 이뤄지는 대화 중 본인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인지한 손준겸이 냉큼 다음 순서를 진행한다.


“……저 분 사연 먼저 들어봐야 될 거 같은데요?”


류기태는 조용히 펜을 들어 <홍지선> 항목에 내용―예민함―을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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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소윤: 女, 36세, 중학교 영어선생, 졸린 눈

// 고재성: 男, 40세, 항문외과 의사, 무테안경

// 선하나: 女, 15세, 여자중학교 학생, 까만 눈, 화가 많음

// 홍지선: 女, 55세. 주부, 까칠함, 예민함

// 손준겸: 男, 43세, 지하철 광고업자, 사각턱

// 김선범: 男, 44세, 지하철 기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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