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하버드는 뭐가 다른데요?

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by 류해인

#문도현, 강재훈, 최병기

오후 12시 10분, 길가에 차를 세운 문도현 경사 일행은 서둘러 구의역 역사 안으로 들어간다.


“아드님이 여기서 탔다고 하셨죠?”


문도현 경사의 말에 강재훈이 고개를 끄덕인다. 차 안에서의 불안한 기색은 온데간데없다. 불안은 상황을 해결하는데 가장 쓸모없는 것이다.


“CCTV 먼저 확인해보시죠.”


문도현 경사를 필두로 역사 내 관리 사무실로 향하던 그때 최병기 순경이 그를 불러 세운다.


“경사님! 연락됐습니다! 서울교통공사요!”


후배의 말에 핸드폰을 뺏어든 문도현 경사가 외친다.


“저는 천하파출소 소속 문도현 경사라고 합니다!”


통화 상대는 한껏 경계하는 목소리다. 언제든 뱃속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빚어낸 듯 보인다.


―……파출소요? 경찰이세요?


“네네!”


문도현 경사는 일목요연하게 현재 상황을 전달한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경찰의 말에 귀 기울이던 교통공사 직원은 심각한 일이, 그것도 본인 근무 시간에 발생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저어……, 경찰관님? 여기 말고 관제…… 센터로 연락해보시겠어요?


뒤이어 이런 말도 덧붙인다.


―여기는 고객센터에요.


직접 관제센터 번호를 불러주는 친절함을 베푼 고객센터 직원은 이로써 본인에게 할당된 모든 업무를 마쳤다는 듯 산뜻한 어투로 마무리 인사를 건넨다.


―그럼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지금까지 서울교통공사 고객센터였습니다.


인질 사건이라는 말을 전했음에도 태평한 고객센터 직원의 처사에 욕할 겨를도 없이 문도현 경사는 관제센터로 전화를 건다.


다행히 한 치의 편법도 없이 사내규정을 준수하고 있던 관제센터 직원은 신호가 울리자마자 수화기를 집어 든다.


―네, 서울교통공사 관제센터입니다.


문도현 경사는 불과 1분전에 했던 설명을 반복한다.


다행히 관제센터 직원 양 모 씨는 사태의 심각성을 곧바로 인지한다.


―잠깐만요. 바로 확인해볼게요. 금일 오전 10시 59분 열차라고 하셨죠? 구의역이요?


긴 침묵이 이어진다.


스피커폰으로 대화 내용을 듣고 있던 강재훈은 불끈 쥔 주먹에 힘을 빼지 못하고 있다.


관제센터 직원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열차랑 연결이 끊어져있네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한 걸로 보여요.


“그럼 열차 내 CCTV 영상도 확인할 수 없다는 건가요?”


최병기 순경의 물음에 직원은 퍽 난처하다는 듯 어물거린다.


―아, 저기……, 지하철에 설치된 CCTV에는 실시간 송출 기능이 없어요.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어떤 기능이 있는데요?”


문도현 경사가 묻는다.


―……현재는 녹화 기능만 되고 있어요.


“그럼, 현재 열차 내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당연한 사실을 재차 언급함으로써 문도현 경사는 상황이 아주 안 좋게 흘러가고 있음을 내비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녹화 용도로만 사용할 거면 도대체 왜 설치한 겁니까!”


결국 가만히 있던 강재훈이 나선다.


최병기 순경이 강재훈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인다. 이내 직원에게 묻는다.


“그럼 처음에 말씀하신 연결이 끊어졌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요? 어떤 연결을 말하는 거죠?”


―아아, 서울교통공사 관제센터에서 서울 모든 지하철을 통제하도록 되어있어요. 쉽게 말하면, 중앙통제실에서 각 열차의 기본적인 상태나 운행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거죠. 부득이한 상황에서는 강제로 운행을 종료시키거나 재개시킬 수도 있고요.


“그 말인즉슨…….”


문도현 경사는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네……. 연결이 끊어져서 지금 해당 열차가 어디쯤인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네요.


“……최악이네요. 일단 저희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주소 좀 알려주시겠어요?”


관제센터 주소를 받아 적은 일행은 다시 자동차로 향한다.


이 시점에서 문도현 경사는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른다.


첫 번째 실수는 구의역 CCTV 영상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영상을 확인했다면 소년과 함께 열차에 탑승하는 한 남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성이 고종한 경위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노란색 마스크, 노란색 헤드폰, 큰 키, 하얀 얼굴의 도주자와 똑같은 인상착의를 한 남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했다면 당연히 고종한 경위에게 연락을 취했을 테고, 도주자를 쫓고 있던 경찰인력들을 대거 인질극 사건에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경찰이 투입된다 해도 당장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현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적절한 대응일 게 틀림없다.


여기서 문도현 경사의 두 번째 실수가 드러난다.


그건 바로 관할 내 경찰인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 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고종한 경위에게도 적용되는 실수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 강력범죄를 다루는 강력계 형사로 일했던 문도현 경사가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은 어디까지나 긴장감이 그 원인이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곧바로 출근해 피곤에 찌든 컨디션으로 강력계 사무실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난데없이 등장한 어릴 적 영웅과의 조우로 전에 없던 고양감에 휩싸여있었다.


그리고 영웅의 입에서 전해져 들어오는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범죄까지 합심하여 문도현 경사의 사고를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반면, 동료들과 열심히 도주자의 행방을 좇고 있던 고종한 경위는 가장 아끼는 후배가 드디어 다시 열정을 품고 업무에 임하게 된 것에 감격하는 통에 더 윗선에 보고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 결과, 이번 사건은 평소 잘해오던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와 이번만큼은 잘해보려는 사람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 난항을 겪는다.


나아가서는, 전(前) 형사 문도현 경사와 경찰 경력 7개월 차, 최병기 순경, 전 복싱선수 현 인질의 아버지인 강재훈. 이렇게 세 남자가 서울 한복판에서 발생한 인질사건을 해결해야 되는 지경에 이른다.





#고종한

같은 시각, 탐문수사를 이어가던 고종한 경위는 본인이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라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관할 내 인력이 부족하면 타 서에 인력충원을 요청하면 될 일이다.


“팀장님! 여기 목격자가 있습니다.”


부하직원의 말에 고종한 경위는 더 이상의 자책을 멈춘다.


‘그 놈이 형사 생활만 몇 년인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문도현 경사가 알아서 잘 하겠거니 한다.


에이스가 괜히 에이스가 된 건 아니다. 하지만, 에이스도 가끔 실수를 하는 법이다.





#채소윤, 강승호

애정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다소 과격한 대화를 나누는 손녀와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선하나와 류기태의 목소리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채소윤은 그들을 뒤로 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소년에게 다가간다.


“……저, 안녕? 고등학생이니?”


“네.”


소년은 링 위에서 상대방을 견제하거나 거리를 잴 때처럼 잽을 날리듯 짧게 답한다.


채소윤 본인도 왜 이 소년에게 말을 걸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이 객실 안에서는 이 소년 옆에 붙어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까 구의역에서 탔지?”


“네.”


묻는 말에 선뜻 대답해주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느낌을 주는 소년의 대답에 채소윤은 더욱 관심 있게 소년을 살핀다.


처음 본 청소년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공감대형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린다.


“사실, 아까 지하철 타기 전에 네가 어떤 강도를 때려잡는 걸 봤어.”


“강도 아니에요.”


“……강도가 아니었다고? 협박당하고 있던 거 아니었니? 그렇게 보였는데.”


“네. 그 사람이 걷다가 제 어깨를 쳐서 넘어졌는데 제가 죄송하다고 사과하니까 갑자기 칼을 휘둘렀어요. 그래서 피한 거예요. 그냥 피하고 칼을 내려놓게 한 거예요.”


채소윤은 그냥 피하고 그냥 상대방이 들고 있는 칼을 내려놓게 하는 방법치고는 상당히 전문적인 솜씨였다고 말하려다 만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상대방이 칼을 들고 있었는데, 무섭지 않았니?”


그녀는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고 있던 남자의 몸짓을 떠올린다. 절로 소름이 돋는다. 괜스레 목을 부여잡게 된다.


“아까 인질범이 들고 있던 사시미 칼 봤지? 그것도 진짜 무섭더라.”


반면 소년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왜요? 저는 생선이 아닌데요?”


그 순간 채소윤은 깨닫는다.


생선이 아닌 인간의 눈이란 이런 것이라고, 이런 눈을 가진 인간이 최고가 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진작 망해버렸을 거라고.


그래서 그녀는 ‘복싱 선수니?’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때론 구태여 나서서 본인을 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본인을 소개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근데 어디 가고 있던 거야?” 채소윤이 소년에게 묻는다.


“병원이요.”


“병원? 어디 아프니!?”


인질 중에 환자가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한 채소윤은 돌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요. 근육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가는 거예요.”


반면 소년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아, 지금 아픈 게 아니고?”


“네. 전 아파본 적이 없어요.”


소년의 대답은 왠지 무성의하게 들린다.


채소윤은 소년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고는 다행이라고 중얼거린다.





#고재성

반면, 인질 중 전혀 다행이지 않은 남자가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름은 고재성이고 올해로 40세가 되었다.


통증은 가실 생각이 없다.


기필코 두 눈으로 세상의 빛을 담아내고 떠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미 등은 땀으로 젖은 상태다.


죽을 둥 살 둥 힘을 주고 있던 탓이다. 정신을 한껏 집중해야 한다.


방심은 금물이다.





#류기태, 선하나, 손준겸, 채소윤

류기태가 연설하듯 가다듬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아, 저기 말이야.”


홀로 고통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고재성.

마찬가지로 홀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는 홍지선.

다양한 주제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정성도와 장석기.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 둘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한성.

끊길 듯 조용조용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채소윤과 소년.

여전히 류기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선하나.

그런 선하나에게 요즘 학생들은 어떤 지하철 광고에 관심이 있는지 묻고 싶은 손 씨까지.


그들 모두의 시선이 류기태의 힘없는 백발에 꽂힌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류기태라고 하고, 예순다섯이 됐어.”


사람들은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대충 보아하니, 내가 제일 연장자인 거 같으니까 말은 편하게 할게.”


“이미 충분히 편해 보이는데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선하나 뿐이다.


류기태는 어린 학생의 말은 사뿐히 무시하고 다음 내용을 이어간다.


“사실 나한테 작은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오늘 만났거나 대화한 사람들 이름을 적는 거야. 간단한 인적사항 같은 것도 추가하면 더 좋고.”


“그걸 왜 적으십니까?”


비즈니스를 할 때에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확인하고 드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손 씨가 묻는다.


“내 일기 같은 거야. 이래야 내가 오늘 누굴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할 수 있거든. 내가 하버드에서 수학하던 시절부터 들여온 습관이지.”


“하버드대 수학과는 한국에 있는 대학이랑 뭐가 달라요?”


선하나는 이 늙고 추레한 할아버지가 하버드 출신이라는 것에 의심을 한가득 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질문한다.


하버드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찾아드는 벗어날 수 없는 호기심 때문이다.


“저기, 학생. ……하나라고 했지?”


채소윤이 선하나의 어깨를 부여잡는다.


사실 아까부터 까마득한 어른에게 빽빽 큰소리로 말대꾸하는 게 조금은 거슬리던 참이다.


“잠깐이라도 조용히 집중할 수 없을까? 그리고 수학 공부를 했다는 게 아니고, 그냥 공부했다는 뜻이야. 수학하다.”


예상치 못한 지적에 당황한 선하나는 열차 내 모든 어른들을 적으로 삼겠다는 의지표명의 일환으로 채소윤의 처진 눈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며 말한다.


“……아줌마야말로 집중 좀 하세요.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그렇게 졸고 있으면 어떡해요.”


어린 학생의 자그만 입을 타고 흘러들어온 문장 중 채소윤의 심기를 후벼 파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만 짐짓 괜찮은 척 위장하고 그녀는 어른스럽게 대꾸한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학생 상황이랑 내 상황이랑 똑같을 거 같은데.”


“어느 못생긴 아저씨가 지하철 승객들을 인질로 삼고 있죠! 보면 모르세요?”


조종실 철문을 가리키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학생을 보며 채소윤은 가소롭다는 눈으로 바꿔 끼운다.


“아, 다행히 눈은 달려있네. 난 또, 하도 까매서 그림인줄 알았네.”


“요, 요즘 애들 다! 전부 다 이렇게 화장하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하나가 뜨끔했는지 더듬거린다. 오늘 아침 화장실 거울 앞에서 투자한 시간이 순식간에 무용한 것이 된 것이다.


“내가 너보다 학교 오래 다녔어. 난 그렇게 화장하는 애들 못 봤는데?”


채소윤은 실제로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 뻔뻔한 제스처가 선하나를 더욱 자극한다.


“지금 대학 나왔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정말 대단하셔라!”


“누가 대학 자랑을 해?”


하버드대 졸, 류기태가 끼어든다.


“예, 아니에요.”


채소윤은 본인도 어른이지만 더 나이든 어른에게만 보이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류기태에게 얌전히 있으라는 뜻을 내보인다. 그리고 다시 본래 대화상대에게 눈을 돌린다.


“나도 학교 다니기 싫어. 억지로 다니고 있는 거야.”


돌연 채소윤이 체념조로 중얼거린다.


선하나는 채소윤의 문장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어휘 사용을 지적하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의문을 던진다.

“……지금도 학교를 다닌다고요? 대학원 뭐 그런 거 말하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 고작 중학교에 재학 중인데 대학을 졸업한 것도 모자라 대학원까지 간 사람을 어떻게 상대해야할까, 고민하는 얼굴이다.


“……선생이야. 학교 선생.”


채소윤은 버르장머리 없는 걸로 모자라 말까지 많은 골치 아픈 학생을 눈앞에 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


선하나는 학교가 아닌 장소에서 선생님을 만난 것이 유쾌할 리 없다.


두 여자의 대화가 다소 어색하게 흘러가는 기미를 포착한 류기태가 손벽을 친다.


“좋아, 내 특별히 선생 이름을 첫 번째로 적어줄게.”


“……진짜 적으신다고요?”


채소윤이 류기태의 손에 들린 작은 수첩과 펜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의 펜은 딸깍 소리와 함께 이미 준비를 마친 모습이다.


“자자, 이름.”


류기태는 모든 것이 바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듯 만족의 웃음을 입술에 내건다.


“부끄러워 할 거 없어.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적을 거야. 이런 게 또 나중에 보면 다 추억이야. 진짜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니까?”


“……채소윤이요.”


학생 주임 선생님 손에 이끌려 교무실로 끌려온 학생처럼 우물쭈물 채소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중학교 영어 선생이고, 나이는…… 서른…… 넷이요.”


“만으로?”


철저히 본인만을 위한 사소한 기록일지라도 정확함을 빼놓을 수 없었던 류기태는 확인 질문을 던진다.


“생일은 지났고?”


“네……, 만으로.”


언젠가부터 나이를 언급하는 것이 죄를 고하는 것처럼 부끄러워진 채소윤의 목소리가 바닥을 긴다.


“생일은 아직…….”


“오케이, 좋아.”


그렇게 류기태의 특색 있는 글씨체로 작성된 대화상대 목록이 탄생한다.


이 목록은 어찌된 영문인지 몇 시간 후, 모 경찰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그 경찰이 한때 잘 나가는 형사였고, 더 오래전에는 촉망받는 복싱 선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원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적어서 한데모여 택시를 타기에도 돈이 아까울 지경이었지만, 오늘 이 사건을 기점으로 택시를 과감하게 부를 수 있는 수준이 된다.


다만 경찰의 손을 타면서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건 다름 아닌 류기태가 그날 대화를 나눈 대화상대 목록이 정체불명의 인질범에게 붙잡힌 인질들의 신상정보가 적힌 인질 목록이 된다는 것이다.


// 채소윤: 女, 36세, 중학교 영어선생, 졸린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