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문도현, 강재훈, 최병기
오전 11시 57분, 문도현 경사가 추월을 거듭하며 운전을 이어간다.
조수석에는 뒤늦게 출근한 최병기 순경이, 뒷좌석에는 신고자이자 인질 중 한 명인 소년의 아버지, 강재훈이 탑승해있다.
맞잡은 강재훈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좀처럼 진정이 안 된다.
사거리 신호에 걸려 문도현 경사는 브레이크를 밟는다.
백미러로 그의 영웅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본다.
강철 같은 두 손에 이어 어깨까지 서서히 떨리는 듯하다.
그 모습을 힘겹게 바라보는 문도현 경사는 어떤 위로를 건네야할지 모르겠다.
“저어, 문 경사님? 교통공사랑 연락이 안 되는데요?”
차에 올라서부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최병기 순경이 말한다.
“연락이 안 돼? 번호 맞아? 확인했어?” 선배 경찰이 쏘아붙인다.
“네, 맞습니다. 2호선, 서울교통공사에서 관리 운영하는 거 맞지 않습니까?”
“……맞아. 왜 이 시간에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일단 그쪽이랑 연락이 돼야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을 텐데.”
문도현 경사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다.
빠르게 굳어가는 강재훈의 얼굴을 보자 덩달아 초조해진다.
“저, 아버님. 아드님한테 다른 연락은 없나요?”
“예……. 계속 해보고 있는데 안 됩니다. 이젠 전원도 꺼져있다고 하네요.”
강재훈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지쳐있다.
“저, 선배님, 혹시 점심시간……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죠?”
최병기 순경이 스마트폰 화면을 내보이자 문도현 경사는 버럭 화를 낸다.
“아직 열두시 아니잖아! 그리고 밥 처먹는다고 모조리 자리 비우는 놈이 어디 있겠어. 진짜 그러면 사람도 아니다.”
신호가 바뀌고 그는 다시 핸들을 잡는다.
“일단 구의역으로 가보자. 뭐라도 나오겠지.”
#서울교통공사
같은 시각, 서울교통공사 고객센터 사무실은 텅 비어있다.
아직 점심시간이 2분 14초가량 남아있지만, 근무자들은 이미 사무실을 벗어나 식당으로 향한 뒤다.
주말을 하루 앞둔 날이니만큼 켜켜이 쌓인 근무 스트레스가 폭발하기 직전이다.
1분이라도 많은 점심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비대해진 까닭에 일찍이 자리를 박차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울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근무하는 집단답게 사내 규정에 따라 민원에 대응하기 위한 최소 인원의 근무자를 남겨둬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다른 직원보다 먼저 점심을 먹고 복귀한 서 모 씨는 다른 직원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벗어난다.
화장실로 향한다. 엉덩이에서 폭죽이 터진다.
서 모 씨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변기 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텅 빈 사무실에서 쉼 없이 전화가 울린다.
평소에는 사소한 궁금증을 해결하거나 불만을 토로할 목적으로 걸어오는 전화가 대부분이지만, 오늘만큼은 아니다.
지하철이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렸다는 신고가 이어져 들어오고, 그 중 하나는 천하파출소 소속 최병기 순경의 전화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서 모 씨의 폭죽이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류기태, 선하나, 채소윤, 손준겸
열띤 대화로 뜨거웠던 장내 소음이 평균 수준으로 돌아온다.
가까스로 류기태와 선하나를 진정시킨 채소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사실, 채소윤의 만류로 조용해졌다기보다 류기태와 선하나가 서로에 대한 흥미를 잃은 탓이다.
한쪽은 대학도 안 나온 새파랗게 어린 학생이랑 더 이상 문장을 주고받았다가는 다른 사람 눈에 똑같은 수준으로 비춰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고, 다른 한쪽은 암만 봐도 여든 살은 되어 보이는데 자꾸 예순다섯이라 주장하는 백발 할아버지의 계속 되는 인신공격에 지친 참이다.
“후우…….”
선하나는 긴 한숨과 함께 승객 무리와 약간 떨어진 좌석에 털썩 앉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린 소녀가 기분이 상한 나머지 자가 치유를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할 요량으로 홀로 떨어져 앉은 것으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류기태의 험하고 다소 급진적인 어휘 선택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 뿐, 상처입거나 겁먹은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아쉬운 점은 열차 내에 승객들 중 평소 선하나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해서 류기태를 제외한 나머지 승객들은 괴팍한 백발 노인에게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어린 소녀의 회복을 기원한다.
당연히 가해자에 대한 비난도 잊지 않는다.
“어르신,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손 씨가 먼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선다.
대화 상대가 고령이니만큼 예의를 지킴과 동시에 표정에도 신경 쓴다.
다만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보니 길 한복판에서 행인을 붙잡고는 하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끈덕지게 말을 걸어오는 개종 중개인 같은 억지스런 표정을 하고 있다.
중개 수수료로 헌금의 몇 퍼센트를 받을지는 하느님과 협상이 끝나지 않은 듯 보인다.
류기태가 자기는 이 문제와 하등 관련 없다는 양 대답한다.
“내가 뭘?”
다른 승객들의 시선이 모이자 손 씨는 정의의 사도처럼 당당한 얼굴로 가슴을 쫙 편다.
“어린 학생한테 그렇게 말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말했는데?”
류기태는 내용물만 충분하다면 콧구멍을 후비고 싶다는 얼굴이다.
그러나 평소 청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그의 콧구멍은 청정구역이나 다름없다.
“너무 심하게 다그치셨잖아요!”
손 씨는 선하나를 가리킨다.
반면, 선하나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열차 내 광고판을 정독중이다.
어떤 광고가 까다로운 중학생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는지 지하철 광고업자 손 씨는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지금은 연장자와 진지한 대화가 한창이니 애써 참는다.
“저렇게 어린 학생이 상처라도 받으면 어쩌시려고요.”
“상처?”
생전 처음 듣는 단어인 양 류기태는 한참을 생각하는 듯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그러곤 선하나를 향해 소리친다.
“어이, 학생. 나 때문에 상처 받았어?”
“그걸 직접 물어보면 어떡해요!”
손 씨가 기겁하며 류기태의 행동을 비난한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안 물어보면 어떻게 알아? 아무리 하버드 나왔다고 해도 그런 재주는 없어.”
손 씨의 비난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얼굴로 류기태는 다시 한 번 묻는다.
이번엔 더 큰 목소리로.
“저기 학생, 내 말 못 들었으면 가까이 와서 다시 듣고 가.”
그제야 광고에서 눈을 뗀 선하나는 손 씨와 같은 얼굴로 투덜댄다.
“싫어요. 할아버지 냄새나요. 근처로 올 생각마세요.”
“상처는 내가 받겠는데?”
류기태가 손 씨를 보며 어깨를 으쓱한다.
“…….”
손 씨는 말을 잃는다.
류기태는 시큰둥한 표정과 타인을 가르치려 들려는 어투다.
“여전히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내가 간다는 말이 아니고, 학생이 오라는 소리였어. 그리고 냄새가 난다니, 말도 안 되지. 내가 귀를 얼마나 열심히 씻는데. 아침저녁으로 빡빡 씻고 있단다.”
“할아버지가 잘 씻든 말든 관심 없어요!”
“그건 나도 그래. 근데 세상을 살아가려면 관심 없는 일에도 관심 갖는 척을 해야 하는 법이란다. 그나저나 ‘―든’ 이나 ‘―던’ 같은 종결어미를 언제 사용해야하는지 알고 있니? 이참에 내가 알려줄까?”
실시간으로 기운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처럼 지친 얼굴을 하고 있던 채소윤이 나선다.
“어르신, 혹시 국어 선생님이신가요?”
“국어 가르치는 선생이냐고? 아니? 난 그냥 하버드 졸업생일 뿐이야.”
한 번에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 류기태는 다시 선하나를 향해 외친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보렴. 냄새는 금방 없어질 거야. 원래 코는 가장 먼저 피로해지는 신체기관이거든.”
채소윤은 류기태에게 과학 선생님이냐고 물으려다 만다.
대신 선하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래, 학생. 그렇게 혼자 떨어진 곳에 있지 말고 어른들이랑 같이 있어. 아무래도 그게 좋을 거 같은데.”
채소윤까지 합심하자 더 이상은 마냥 무시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선하나는 터벅터벅 힘없는 걸음으로 승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학생, 아침 안 먹었어?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류기태는 속없이 묻는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배가 계속 꼬르륵거려요. 배고프다고요.”
선하나는 아무도 본인이 입에 담은 말의 의미를 못 알아들을 것 같았는지 똑같은 의미를 담은 문장을 줄지어 말한다.
12시간 넘게 공복이 이어지면 누구든 배가 고프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는 엄청난 사실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류기태는 태연히 묻는다.
“누가 아침을 먹고 나오기라도 하면 키가 안 큰다고 했어?”
155센티미터라는 작은 키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선하나가 류기태를 째려본다.
“몇 년 만 지나면 제가 할아버지보다 커질걸요!”
“그것 참 다행이구나!” 164센티미터의 신장을 가진 류기태가 대답한다.
“할아버지도 엄청 작거든요!”
“그런데도 너보다는 크다니 얼마나 다행이니.”
“……짜증나!”
“여하튼, 아침은 왜 안 먹고 나온 거야?” 류기태가 다시 묻는다.
“아침 먹다가 학교에 지각하면 큰일이잖아요!”
“지각을 왜 해?”
초등학생이 보건선생님에게 ‘아기는 어떻게 생겨요?’하고 묻는 아주 순수한 의문을 가진 얼굴로 류기태는 어린 학생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지각 할 수도 있죠!”
지각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는데 가능여부를 답변으로 내세운 학생을 보며 채소윤이 끼어든다.
“그러고 보니 학생,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니? 오늘 금요일인데.”
“……지각을 꼭 아침 먹었을 때만 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세 시간 전부터 이미 지각을 확정지었던 선하나의 개근상은 그렇게 저 멀리 날아간다.
“맞다, 학생아.”
류기태가 선하나를 부르고는 손 씨를 가리킨다.
“이 아저씨가 궁금하대. 네가 나 때문에 상처 받았는지. 그래서, 상처받았어?”
“아니, 제 말은 궁금하다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콕 집어 물어볼 줄은 몰랐던 손 씨는 돌연 민망해하는 눈치다.
선하나는 무슨 소리냐는 얼굴이다. “상처요? 왜요? 받아야 되는 거예요?”
“네가 먼저 나서서 받아갈 필요는 없지. 뭐 좋은 거라고.”
명쾌한 어투로 류기태가 말한다.
자고로 상처는 내 전공분야라는 얼굴이다.
#이한성
사람에게 입은 상처라면 일가견이 있는 이한성이 드디어 주위를 둘러본다.
이곳은 지구 거주민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지극히 평범한 지하철이고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다.
칼을 들고 난리치던 인질범은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졌고, 승객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다.
벌써부터 가까워졌는지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고, 몇몇은 잔뜩 열을 내며 만담을 나누듯 시끌벅적 떠든다.
당연히 무리 속에서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홀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이한성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표정만은 왜인지 결연에 차있는 중년 여성과 가지런한 자세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이는 소년이다.
나머지 한 명은 테 없는 안경을 낀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중년 남성이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고통스러운 듯 보인다.
#홍지선, 선하나
“아주머니.”
홍지선이 대뜸 말을 걸어오는 선하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왜 그러니?”
“여긴 임산부 석인데요.”
어린 학생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홍지선은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몸을 벌떡 일으킨다.
“……아, 그렇구나.”
“그렇죠. 그 자린 임신했던 사람이 앉는 게 아니라, 지금 임신한 사람이 앉는 자리에요. 아무리 열차에 인질범이 나타났다고 해도 지킬 건 지키셔야죠.”
“아, 그래. 내가 실수를 했네.”
바로 옆자리로 자리를 옮긴 홍지선은 오늘을 오늘로 끝내기 위한 방법에 대해 열심히 고민을 이어간다.
그러나 또다시 거슬리는 목소리가 정신을 사납게 한다.
본인을 류기태라고 소개한 백발 남자가 범인이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칠고 납빛에 가까운 피부와 얼굴 가득한 깊은 주름으로 보아하니 고상한 일은 아닌 게 분명하다.
공공장소에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격식 없는 남자의 태도에 얼굴이 절로 찡그려진다.
그와 동시에, 매순간 점잖고 예의바른 어투가 입에 밴 남편이 떠오른다.
지금 남편이 옆에 있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홍지선은 이뤄질 수 없는 상상을 하며 류기태에게 반감을 품는다.
#강승호
심각하고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입을 놀려대는 다양한 연령층의 승객들 사이로 여전한 침착함을 보이는 소년은 조종실 안에 있는 인질범을 떠올린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의 몸짓을 되새긴다.
전혀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움직임이었다.
단 한 톨의 계산도 가미되지 않은 것 같았다.
조금 이상한 표현이지만, 진심만이 묻어나는 움직임이었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지하철을 점거하는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 과연 아무런 계산도 없이 움직였을까?
소년이 의문을 품는다.
승객들이 하차하지 못하도록 열차를 조종하고 있으면서 정작 승객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인질범의 의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팔다리를 포박하기는커녕 어떤 위협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통신기기만 가져갔을 뿐이다.
사실 그 과정도 몹시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감도 있다.
결정적으로 지금 인질범에게는 흉기가 없다.
사용한 칼은 순순히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다.
인질범은 체격이 좋은 편도 아니고 평범한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다.
반면, 인질이 된 승객은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합심한다면 흉기가 없는 인질범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이 소년이 나선다면 그대로 인질극은 종료될 게 틀림없다. 하지만 소년은 그러지 않는다.
거듭 생각을 이어갈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라고 소년은 중얼거린다.
#고재성
인질극이 벌어진 순간부터 내내 말없이 앉아있던 남자, 고재성은 연신 안경을 들어올린다.
초조할 때 나오는 습관이다.
그는 급기야 식은땀을 흘린다. 이마에 송글 땀이 맺힌다.
그가 현재 본인의 상황을 짧고 굵은 감탄사로 요약한다.
“……X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