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류기태, 손준겸, 강승호
지하철이 승강장에 도착하지만 속도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대로 지나친다. 정차하지 않는다.
“……어? 뭐야?”
열차에 타고 있던 지하철 광고업자 손 씨가 누구에게나 들릴법한 큰 목소리로 외친다.
그의 말에 담긴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다른 승객들이 각자 뒤돌아 창문을 본다.
조용하던 열차가 삽시간에 웅성대는 소리로 가득해진다.
이때만큼은 소년의 눈동자도 흔들린다.
목적지까지는 꽤 거리가 남았지만, 열차에서 하차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버스처럼 하차 벨을 누르는 건가싶다가도 아무리 둘러봐도 벨로 추정되는 물체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건 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았다.
“가만 있어봐.”
잠자코 있던 누군가가 아무도 만류한 사람이 없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빠르게 노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육십 대 남성이다.
“내가 조종실로 한번 가볼게.”
특정한 대상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다른 승객들은 그저 멀뚱히 남자의 행동을 지켜본다.
육십 대 남자는 165센티미터 정도로 키가 작고 삐쩍 마른 체형이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과 피로해 보이는 눈, 쇳소리가 섞여있는 목소리가 썩 건강하다고 볼 순 없지만 걸음걸이만큼은 거침이 없다.
매일같이 드나드는 곳에 다녀오기라도 하듯 태연하게 조종실에 들어가 조작을 마치고 나온 남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지하철 광고판에 시선을 모은다.
역 근처 도보 5분 거리에 있다는 한의원 광고다.
눈으로는 부지런히 광고판을 좇으며 어떤 진료를 중점적으로 하는지 살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방금 본인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곱씹는다.
이윽고 열차 운행에 이상이 생겼음을 인지한 승객 중 한 명이 이리로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남자는 초조해진다.
평소 그는 절대 폭력적이거나 화를 참지 못하는 정신 질환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현재 특정 사건으로 인해 심신이 몹시 연약해진 상태이고 올바른 가치판단과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그런 일련의 상황들은 결국 그를 겁먹게 하고 만다.
충만하던 자존감과 자신감을 모조리 잃고 인생에 가장 큰 가치를 두었던 것을 가차 없이 빼앗긴 사람은 으레 의기소침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의기소침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겁먹는 경향이 있다.
또한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심리적 경향은 사람을 의외의 상황과 장소로 이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육십 대 남성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던 남자의 이름은 김선범이다.
김선범이 바삐 시선을 돌린다.
눈앞의 바닥에 엎어져있는 쇼핑백이 보인다. 그 안에 적갈색 가죽 가방이 보인다.
이내 가죽가방의 용도를 파악한다. 어떤 물건을 보관하기 위함이다.
그 물건은 다름 아닌 칼이다.
김선범은 허리를 숙여 가죽 가방을 들고 펼쳐 그중 가장 긴 칼을 빼어 든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친다.
그는 같은 의미를 담은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말하는데, 처음에는 분노에 잡아먹힌 사람의 목소리였던 것이 점차 떨려오더니 이내 부르짖음으로 바뀐다.
남자는 절규한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냐고!”
“난 잘못한 거 없어!”
잘못 운운하며 기다란 사시미 칼을 휘두르는 사십 대 남자 때문에 열차는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각자의 눈들이 담아내는 시각정보를 뇌까지 전달해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사고가 멈춰버린다.
“…….”
그렇게 5초가량 정적이 흐른 뒤, 무사히 뇌에까지 위험 신호를 전달한 승객 몇몇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으아아악!”
“뭐야아!”
그들은 소리를 내지르며 각자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몸을 피한다.
그래봤자 기둥 뒤, 출입문 옆이 전부다.
발 빠른 한 남자는 열차 뒤 칸으로 도망가려 하지만 소용없다.
이미 김선범의 조작에 의해 다른 칸으로 이동할 수 있는 문은 잠긴 상태다.
승객들은 1224호 칸에 고립된 것이다.
“여기 문이 잠겨있어요!”
남자가 외친다.
남자의 상황 전달이 끝나자 대부분의 승객들이 혼비백산 김선범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덜덜 떨려오는 다리로 조금씩 뒷걸음질 친다.
본디 공포라는 감정은 비논리적이다.
눈이 시각 정보를 뇌로 전달하는 그 찰나의 순간도 거치지 않고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게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공포는 학습될 수 있다.
여기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진 한 소년이 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그 혼란의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한 사람은 소년뿐이다.
어떤 물리적인 위협에도 대응할 수 있는 눈과 몸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불과 20분 전에 똑같은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자 소년은 지하철은 정말 위험한 교통수단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아가서는 매번 병원에 갈 때마다 직접 자동차를 운전해 데려다주시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느낀다.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두 귀에 헤드폰까지 쓴 상태로 음악에 심취해있던 사마천파 서열 3위 정성도는 난데없이 펼쳐진 승객들의 격한 달리기에 불쾌해한다.
공공장소에서는 항시 차분하게 행동하고, 혹 자연재해와 같은 위급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 기본…….
정성도는 시선 끝에 위치해있는 한 남자를 본다.
뭐라 중얼대며 열심히 무언가를 휘두르고 있는 김선범을 본다.
자세히 보니 사시미 칼이다.
인재(人災)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학습하지 않은 정성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른 승객들이 하는 것처럼 달린다.
엄연히 폭력 조직 내 서열 3위라는 근사한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지만, 무기를 지닌 상대에게 맨손으로 덤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성도는 아까 공원에서처럼 애용하던 연장이 어디 갔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이한성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한 남성의 손에 이끌려 졸지에 달려간다.
잔뜩 겁먹은 승객들이 모여 있는 곳에 서있고서야 사태를 알아챈다.
그가 집에서 챙겨온 쇼핑백이 객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 안에 있던 여러 종류의 칼들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가죽가방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한 자리가 비어있다.
이한성은 김선범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어쩐지 눈에 익은 칼이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 씨, 이 열차는 내꺼야! 아무한테도 안 줘!”
김선범이 소리친다.
어느새 눈물은 마르고 악에 바친 목소리다.
열차 내 승객들은 김선범의 외침에 반응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방금 들려온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려 애쓴다.
첫째, 아무도 움직이지 말 것을 권고함.
둘째, 지금 바삐 움직이고 있는 지하철을 본인 것이라고 주장함.
마지막 셋째, 아무도 내 것―지하철―을 가져갈 수 없다고 경고함.
승객들 중 가장 나서기 좋아하는 한 남성이 사태 파악을 끝냈는지 소리친다.
참고로 그는 지하철 광고업에 종사 중이다.
“다들 움직이지 마세요! 인질범이 시키는 대로 하면 모두 안전할 겁니다!”
“인질범!”
“지하철 인질범이래요!”
“살려주세요!”
우연히 김선범이 서있는 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좌석에 앉아있던 소년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지자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꺼낸다.
수신된 문자를 확인한다. 당연히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다.
―어디쯤이니? 잘 가고 있니?
아버지의 물음에 소년은 정직하게 답변한다.
/네, 이제 막 시청역 지났어요.
김선범의 주의력은 소년의 행동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상실된 상태다.
덩달아 승객들이 본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인질범>이라는 단어의 폭력성에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반면, 답장을 송신한 소년은 너무 무심했나, 하고 뒤늦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연달아 문자를 보낸다.
평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득이한 상황이 닥쳤을 때나 벌어질 일이다.
인질범이라고 추측되는 누군가가 지하철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은 아무리 못해도 ‘부득이한’ 경우일 거라고 소년은 결론짓는다.
그리하여, 소년은 다음과 같이 보충설명을 덧붙여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낸다.
/지하철에 인질범이 있어요.
오전 11시 22분, 그렇게 열차 내 소식이 외부로 전해진다.
#문도현, 도상준, 한재천, 문지성
잠에서 깬 한재천이 눈을 뜬다.
무성한 앞머리가 시야를 방해하지만 평소 사리 분별에 능한 편이라 금방 현 상황을 파악한다.
가장 먼저 새로운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함께 땀 흘렸던 도상준 전무의 번들번들한 살구색 두피와 펑퍼짐한 등판을 보며 반가움을 느낀다.
곧이어 눈을 뜬 곳이 퍽 유쾌한 장소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위기감을 느낀다.
차갑고 좁은 마룻바닥을 철창이 감싸고 있었을 때 즐거웠던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금의 사태를 파악한 한재천이 유치장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도상준 전무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꽤 우람한 복부 지방을 내밀고 있는 남자와 문지성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보인다.
‘문지성?’
한재천의 사고흐름에 잠시 정체구간이 생긴다.
이내 정체가 풀리고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성이?문지성?야,막내야!”
“……막내?”
한재천의 말에 문도현 경사가 고개를 든다.
“……뭐야? 너도 저놈들이랑 한패였어? 이거, 실망감이 물씬 밀려오는데?”
아차 싶었던 한재천은 방금 들은 말은 못 들은 걸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그러니 섣불리 실망하지 말란다.
경찰의 입에서 어떠한 대답도 나오지 않자, 이러지 말고 사이좋게 악수를 나누는 것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오해를 자연스럽게 봉합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재차 묻는다.
유치장 철창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악수만큼 멋진 게 또 있을까 싶단다.
문도현 경사는 말없이 도상준 전무와 한재천이 유치장으로 인계될 당시 전달받은 내용을 떠올린다.
두 범죄 조직 간 접촉에 대한 사전정보를 입수해 경찰인력을 대거 투입해 현장 급습.
그곳에 있던 조직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체포했다고 했다.
그 중 두 명은 응급실행 구급차를 탔다. 다른 두 명은 강력계 유치장행 경찰차를…….
어쩌면 문지성이 도주 중이라는 나머지 조직원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 문도현 경사는 쑥쑥 잘 밀고 나아가던 추리를 제자리에 멈춰 세운다.
따지고 보면 오늘은 비번 아닌가.
비번에 수사라니.
게다가 지금은 형사 신분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사무실만 지키고 있으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배가 부른 상태다.
수사고 뭐고 다 귀찮았던 문도현 경사는 문지성에게 한마디 툭 내뱉는다.
“어이, 문지성이. 다시 들어가 있어.”
그렇게 한재천은 사마천파 막내이자 탈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조력자라고 할 수 있는 문지성을 유치장으로 끌어들인다.
정말이지 눈물겨운 동료의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사마천X형제캐피탈> 조직원 중 세 명이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다.
이는 조직구성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이다.
“……이제 어쩌지?”
상황이 어지간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다 허기도 점점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음을 깨달은 도상준 전무가 소곤댄다.
새로운 직장동료가 그렇게 묻자, 한재천은 아무 걱정 말라고 한다.
그러곤 지금과 같은 문제에 봉착해본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보건대 현재 상황은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로 바뀔 수 있단다.
고로 잘만 해석하면 마냥 나쁜 상황도 아니란다.
작은 예를 살포시 들어보자면, 지금 얼핏 보면 경찰이 우리를 잡아두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경찰 인력을 사무실에 묶어두고 있는 거라고 볼 수도 있단다.
그만큼 외부 수사 인원에는 공백이 생기는 것이고, 그 공백은 남은 조직원들의 도주를 한결 수월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될 게 분명하단다.
“오, 맞아요.”
문지성이 한재천의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 그리곤 자기는 지금까지 다소 불리한 각도로만 해석해왔다고 고백한다.
큰일 중에서도 이만한 큰일은 없을 거라고 여겨왔단다. 그런 와중에 저 형사가 끓여준 라면은 참 맛났단다.
조직 막내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들은 한재천은 그럴 수 있다고, 이제부터라도 여러 각도로 해석하는 연습을 하면 된다고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조금만 떨어져서 말을 해달란다.
입에서 라면 냄새가 진동을 한단다.
도상준 전무는 새로 사귄 폭력조직 동생가 흔히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이 아닌 독자적인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이에,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상황을 보다 유리한 각도로 보려면 어찌해야할지 그 방법을 다른 예시를 통해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는 문지성에게는 조금만 더 가까이 와달란다.
라면 냄새라도 맡으면 뱃속이 조금이나마 진정될 것 같단다.
한재천은 도상준 전무의 말에 전혀 실례가 아니라고 답한다.
이제는 같은 식구나 다름없으니 그런 노하우쯤은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단다.
원하면 속옷도 공유할 수 있단다. 근데 아무래도 사이즈가 안 맞을 것 같단다.
아무튼 그 얘기는 차차하기로 하고, 이 시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본인도 아직 그 노하우를 모른다는 것이란다.
내내 불리한 각도로 보는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어떻게 해야 본인에게 유리하게 작용될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단다.
그러니 이제 다 같이 힘을 합쳐 시도해보잔다.
“오오, 좋아요!”
두 형님의 말에 따라 세심하게 엉덩이 위치를 조정한 문지성이 냉큼 대답한다.
#강재훈
같은 시각, 여전히 정비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강재훈은 아들의 문자를 받는다.
곧바로 흥분한다. 평소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자를 읽는데 1초, 자동차 정비공에게 근처 경찰서 위치를 묻는데 2초, 두 다리를 움직이는데 다시 1초, 그는 당장 경찰서로 달려간다.
112라는 무지막지하게 긴 번호를 누를 시간 따위 없다.
그는 몸이 시키는 대로 일단 무작정 달린다.
#문도현
야간 근무 후 3시간 남짓한 짧은 수면에 연신 해롱대던 문도현 경사는 괜스레 의자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범죄자들 앞에서 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고통의 신음소리를 참아내며 몸 이곳저곳을 늘리고 뻗는다.
잘못된 자세 때문에 잠잠해야 할 근육들이 놀라고, 자극받아야 할 근육들이 얌전히 웅크린다.
그럼에도 문도현 경사는 바삐 몸을 움직인다.
배불뚝이 서른여섯인 지금도 팔팔한 현역 선수 못지않은 근력을 자랑한다.
고등학생 시절 대통령배 대회에서 수상한 금메달을 비롯한 온갖 상장과 메달이 집안 곳곳 못 박힌 벽에 내걸려있기도 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스트레칭과 신체 관리에 있어서는 남부럽지 않은 무지함을 자랑했기에 신체구조상 어색함을 발견하지 못한다.
빳빳하게 굳어버린 그의 몸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강재훈
반면, 올해로 쉰하나가 된 강재훈은 지치지 않고 달린다.
쉼 없이 담금질한 몸은 단번에 그를 경찰서로 옮겨준다. 어디로 가야할지 강재훈은 잠시 머뭇거리지만, 이내 경로를 조정하여 다시 두 다리를 움직인다.
#문도현, 강재훈, 도상준, 한재천, 문지성
어느 정도 잠이 달아남을 느낀 문도현 경사는 다시 의자에 앉는다.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린다. 화들짝 놀란 탓에 잔재해있던 잠기운이 모조리 사라진다.
덩달아 문도현 경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이이익!”
유치장에 쥐 죽은 듯이 찌그러져 있던 세 남자들도 기겁한다.
사무실로 들어선 강재훈은 공무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남자에게 달려가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한다.
유치장의 세 남자들은 생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에 관심을 보인다.
인질극은 그들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TV에서나 볼법한 상황에 흥분한다. 그리고 수차례 아들을 언급하는 신고자에게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진다.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유치장 수감자들의 눈에 강재훈은 그저 한 소년을 둔 아버지에 불과하다.
짧은 기간 번쩍 빛난 복싱 선수를 기억해 줄만큼 세상은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만큼은 아니다.
잠시나마 그 선수를 보고 꿈을 키웠던 한 남자에게는 다르다.
그는 그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의 강철 같은 주먹과 단단한 등을, 불리한 신체 조건에도 과감히 밀어붙이는 투지와 누굴 상대하건 치열하게 빛나는 그 두 눈을 기억한다.
소년에서 청년, 이제 막 중년이 된 남자에게 어릴 적 영웅이란 그런 것이다.
문도현 경사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려온다.
그는 다시 열다섯 꼬맹이가 된다.
#김선범, 손준겸, 류기태
오전 11시 30분, 서울 2호선 HYH-8981열차 1224호 승객들은 이어지는 대치 상황에 지쳐간다.
“저, 저기요? ……인질범님?”
현재 상황을 지하철이 아닌 바깥 세상에 광고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광고업자 손 씨가 인질범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때 대뜸 육십 대 남성이 끼어든다.
“지하철에서 인질극이라니. 나름 창의적인 시도였어.”
그리고는 너무 창의적이라서 아무도 시도하지 못할뿐더러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할 생각 자체를 못할 것 같다는 의견도 덧붙인다.
상반기 목표가 징역살이인 사람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거란다.
“……저어, 선생님? 제가, 제가 할게요!”
손 씨가 두 손과 얼굴의 모든 주름을 동원해가며 육십 대 남성을 만류한다.
“맘대로.”
육십 대 남성이 어깨를 으쓱한다.
“……저 인질범님?”
하고 되묻는 손 씨의 태도는 가히 필사적이다.
“뭐!? 왜?!”
김선범은 홧김에 저지른 행동이 불러온 여파에 당황하면서도 가시지 않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왜! 왜! 도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
호소할 때나 쓸법한 낱말을 사용하는 인질범을 보며 손 씨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음……, 저기, 그건 저희가 하고 싶은 말 아닐까요? 그러니까 인질로 잡혀있는 저희가 질문할 내용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