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채소윤
지하철에 몸을 실은 채소윤은 눈치 채지 못하게 소년을 살핀다.
소년은 벌을 받고 있기라도 하듯 허리를 꼿꼿이 편 자세로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다.
불과 몇 분 전에 건장한 성인 남성을 일격에 쓰러트린 사람치고는 매정하리만큼 평온한 얼굴이다.
일말의 흥분이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방금 소년이 보여준 움직임은 진짜다.
채소윤은 안다. 알 수밖에 없다.
그녀는 경기도 외곽 무서우리만치 고즈넉한 마을에 거주 중이고 누구보다 복싱을 사랑하는 어느 부자와 같은 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스포츠 세계에서 남자들만 선택받으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그런 눈을 갖고 태어난 모든 이가 스포츠에 몸을 담그라는 법 또한 없다.
채소윤은 소년이 보인 모든 움직임을, 그 동작의 원리를 모두 이해한다.
어떤 근육이 어떤 식으로 동작해 힘을 전달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주먹을 내질러 상대를 제압했는지 모두 알고 있다.
그녀는 이 순간 조금이나마 운동이라는 것에, 인체가 동작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순수한 힘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본인이 선택한 선생이라는 직업에 의구심을 갖는다.
하다못해 영어가 아닌 체육선생님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나아가, 몇 시간 후면 학교에 가야한다는 사실에 새삼 괴로워진다.
게다가 시험기간이다.
아무래도 야근을 해야 할 듯싶다.
다음 주 월요일에 영어시험이 예정되어있다. 출제한 문제에 오류는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해야한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
이내 머리를 비우고 체념한다.
출근하기 싫은 건 어느 직장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녀도 그중 한 명일 뿐이다.
#선하나
어느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 본인이 선택한 직업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을 무렵, 그녀와 4칸 떨어진 좌석에 앉아 있는 선하나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한껏 집중한 모습이다.
눈의 초점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 수 없다. 고장이 나 한쪽에서만 소리가 나오는 터라 두세 배는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선하나는 인근 여자 중학교에 재학 중이다.
올해로 열다섯 살이다.
오늘은 금요일, 한창 학교에 있어야할 시간이지만, 이 학생은 지금 지하철 열차 안이다.
그 이유에 대해선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밝혀진다.
#강승호
조금 전 지하철 역사에서 흉기를 휘두르는 조직폭력배를 응징한 소년은 잊은 것이 생각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아, 맞다.”
하고, 혼잣말을 한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보낸다. 수신인은 물론 아버지다.
방금 지하철을 탔다는 소년의 문자가 송신되고 삼십 초도 되지 않아 답장이 도착한다.
―알았다. 도착하면 또 연락해라.
하지만, 소년의 아버지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아들의 문자를 받지 못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일이 그렇게 흘러간다.
#강재훈
같은 시각, 경기 외곽의 한적한 동네에 거주 중인 어떤 소년의 아버지는 아이의 연락을 받고 안심한다.
벌써 열일곱 살이나 되었지만, 혼자 서울을 쏘다니게 둔 건 처음이다.
서울, 서울이라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이던가.
서울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많으면 자동차도 많다. 자동차가 많으면 그만큼 위험하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강한 아이를 둔 아버지가 하기에는 조금 억지스러운 망상에 가깝지만, 뺑소니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편의 머릿속에서는 충분히 발현될 수 있는 생각이다.
자그마치 10년 전, 사고로 아내를 잃고 복싱을 하는 소년을 둔 한 가장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다.
정비소다. 자동차 정기점검을 하기 위함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서울에는 사람이 많고 자동차도 많은 만큼, 대중교통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하철은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 중 하나다.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사람 조심하고, 차도 조심하라고 일러뒀으나 지하철을 조심하라는 말은 못했다.
그랬어야 했다.
이 남자의 아이는 어쩔 때는 걱정이 될 만큼 무덤덤하고 말이 없지만, 아버지의 말을 아주 잘 듣는 아이였기에 만일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지하철을 조심하라고 했다면 분명 조심했을 것이다.
#강승호
매사 걱정이 많은 아버지에게 지하철에 탔다는 문자를 보낸 소년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도 아버지에게 전할까 잠시 고민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러가는 길에 칼을 들고 위협을 가하던 사람을 해치워 경찰에 인계했다는 문자를 받고 좋아할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과 표현이 적다는 것이 꼭 감정체계에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년은 누구보다 아버지에게, 특히 아버지의 감정상태에 대해 관심이 많다.
되도록 평상시 수준을 유지하길 바란다.
급격한 감정변화는 스포츠 세계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선수에게만 국한되는 내용은 아니다.
고민을 마친 소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정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머릿속을 비운다.
본인 의지대로 언제든 머릿속을 차갑게 비울 수 있다는 점이 소년이 가진 것 중 가장 탁월한 재능이다.
희소가치가 있는 재능이다. 머릿속을 한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비우는데 능한 사람은 극히 소수다.
그리고 일류는, 정점은 소수다.
너무 적어 오직 한 명이다.
#장석기
소년과 같은 지하철에 타고 있는 한 남자는 빈자리에 앉아 휴대폰 메모장에 정체모를 문장을 적는다.
한글과 영어가 적절하게 배합된 문장이 빽빽하게 들어차있다.
문장 속 단어를 재배열하고 단어가 가지고 있는 발음에 대해 고민해본다.
자칫 지루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단어는 과감히 잘라내고 비슷한 뜻을 가진 새로운 단어를 고민한다.
#홍지선, 이한성
약 한 시간 전에 서울 2호선 HYH-8981열차 1224호에 올라탄 홍지선과 이한성은 여직 곤히 잠들어있다.
그들의 목적지는 지나친지 오래다.
이들이 이토록 깊은 잠에 빠진 이유에 대해 유추해보자면, 한 명은 이른 아침부터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 기운이 다 빠져버렸기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한 명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을 영원히 미루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금 소중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고, 그는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하러 가는 길이다.
#???
오전 11시 5분.
지하철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대거 하차한다.
이번 역에서 지하철에 탑승하는 승객은 없다.
다만 지하철 문이 열리자 모자를 푹 눌러쓴 한 승객이 들고 있던 커다란 더플백을 출입문 바로 옆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뒤돌아 승강장을 빠져나간다.
어딘가로 서둘러 가는 모습이 아닌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모습이다.
오전 11시 7분.
다시 지하철 문이 열리고 꽤 많은 승객들이 하차한다.
이번 역에서도 단 한 명의 승객도 탑승하지 않는다.
신기하게 이 현상이 다음 역에서도, 그 다음 역에서도 반복된다.
오전 11시 16분.
서울지하철 2호선 HYH-8981열차가 을지로 4가역에 정차하고 다시 출발한다.
그 시점 열차의 첫 번째 칸, 1224호에는 열한 명의 승객과 정체불명의 커다란 가방만이 남는다.
나머지 칸은 텅 비어있다.
금요일 오전 시간대라는 점과 서울특별시 중심부의 주요 구간을 달리는 노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터무니없는 사건은 터무니없는 일들이 잇달아 벌어질 때 발생하는 법이다.
잠시 후 발생할 사건도 그러하다.
#문도현, 문지성, 도상준, 한재천
“그럼 시작한다. 잘 봐.”
“……네.”
문도현 경사의 말에 문지성이 귀찮은 듯 대답한다.
문지성을 정면에 세워둔 문도현 경사는 조금 전 역사 CCTV 영상 속 소년의 움직임을 떠올린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과 유연하게 휘어지는 허리와 힘 있는 주먹.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내며 똑같은 자세를 취한다.
가상의 흉기가 빠르게 가슴팍으로 들어온다. 상체를 돌려 피한다. 허리를 돌리고 왼쪽 주먹을 쭉 뻗는다.
물론, 실제로 타격을 가하지는 않는다.
건강검진 결과표의 복부비만 항목에 체크표시가 되어있는 사람치고는 제법 가벼운 몸놀림이다.
“자, 어때? 아까 본 거랑 비교하면. 똑같지 않아?”
만일 방금 문도현 경사의 움직임을 소년이 봤다면 많은 내용이 담긴 감상을 던졌을 것이다.
원체 말이 없는 소년도 복싱에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수다스러워진다.
“왜 지금 오른쪽 발이 그 위치에 있어요? 호흡은 왜 그렇게 내지르는 거예요? 호흡을 아껴 써야죠. 어깨를 그렇게 쓰면 근육이 금방 지쳐요. 허리는 또 왜 그렇게 뻣뻣해요? 무릎도 마찬가지고. 주먹을 그렇게 쥐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손목 다쳐요. 배가 그렇게 불룩하면……”
본인이 직접 겪었던 일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지능을 가진 문지성은 뇌를 거치지 않고 대답부터 한다.
“네, 똑같네요.”
그리고 그는 어느덧 상대방의 기분도 맞춰줄 정도로 성장한다.
“근데 형사님, 복싱하셨어요? 되게 잘하신다.”
행인에게 대뜸 칼을 휘둘러 위협을 가한 죄로 유치장에 끌려온 조직폭력배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문도현 경사는
“어쩔 수 없이 다 티가 나나봐? 고등학생 때까지 선수였거든. 나름 실력도 좋았어.”
하며, 기분 좋게 말한다.
살에 파묻힌 근육들을 괜히 한 번씩 쓰다듬는다.
“지금은 뭐 그냥 똥배만 나온 아저씨지.”
작은 겸손도 잊지 않고 선보인다.
“다이어트는 하고 계신 거예요?”
문지성이 순수한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묻는다.
“그건 아니지만, 이제 슬슬 또 시작해야지.”
문지성은 그러면 여태 다이어트를 성공한 횟수가 몇 번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문도현 경사가 그건 성공이라는 개념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단다. 다이어트는 생각보다 복잡한 것이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한 번 성공했다고 대답한다.
대답을 들은 문지성이 그럼 성공의 개념을 보다 너그럽게 해석하면 성공 횟수가 얼마나 늘어나는 거냐고 다시 묻는다.
그러자 상대방은 방금 말한 횟수가 너그럽게 해석한 횟수란다.
“배만 나오면 다행이게!”
유치장 창살에 들러붙어 지켜보고 있던 도상준 전무가 끼어든다.
누가 봐도 다이어트 권위자처럼 보인다.
“난 머리도 다 날라 갔어.”
게다가 탈모에 대해서도 남다른 지식을 자랑할 듯싶다.
“그거 멋으로 민 거 아니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처럼 놀란 얼굴로 문지성이 묻는다.
도상준 전무는 그렇게 생각해준 문지성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꽤 큰소리로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한재천은 여전히 숙면중이다.
“형사님은 머리숱 관리 잘하세요.”
아직 문지성을 형사로 알고 있는 도상준 전무가 뼈저린 조언을 해준다.
“저 형사 아니에요!”
문지성이 특유의 해맑은 표정과 목소리로 대답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본인도 형사가 아니지만, 문도현 경사는 아무 말 않는다.
“……그럼 누구세요?”
강력계 사무실에 형사와 겸상하는 범죄자가 존재할 거라는 상상은 전혀 할 수 없었던 도상준 전무가 자기소개를 요구한다.
“제 이름은 문지성인데요?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스물아홉…….”
자기소개에 남다른 자신감이 있던 문지성이 운을 띄우지만, 문도현 경사가 제지한다.
“아아, 됐어.”
그리곤 도상준 전무를 보며 쏘아붙인다.
“그걸 유치장에 있는 아저씨가 알아서 뭐하게?”
“아……, 저는 그냥 궁금해서요.”
끼니도 안 챙겨주면서 궁금증 해소도 못하게 하는 형사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상준 전무는 아직 사무실 공기를 지배하고 있는 라면냄새를 킁킁 들이킨다.
“저도 궁금한 거 있어요!”
친구라도 만난 듯 신난 문지성이 번쩍 손을 든다.
“나한테?”
형사도 아닌데다 나이까지 어리다는 사실을 안 도상준 전무는 반말로 묻는다.
배고픈 그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란 애연가에게 담배를 하루에 한 개비만 피우게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워 보인다.
“네! 아저씨한테요.”
아무리 심사숙고 해봐도 쓸데라고는 없을 정도로 해맑아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한테 궁금한 게 뭐가 있을까, 도상준 전무도 무척이나 궁금하다.
‘역시 탈모에 관한건가?’
그는 추측해본다.
“……뭔데?”
“하루에 몇 끼 드세요?”
문지성은 진짜 궁금한 점에 대해 묻기 전 사전정보를 취득하기 위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묻는다.
대화상대로 하여금 서운함을 물씬 풍기게 할 만큼 낮은 지능을 가진 그는 결단코 누군가를 함부로 재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차원에서 던진 질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친절한 존재는 질문이라고, 문지성은 생각해왔다.
그러기에 질문을 많이 하는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머리통에 든 자그마한 뇌에 탑재된 사고회로의 흐름대로라면 그렇다.
“……한 끼. 나 1일 1식 하는데, 그건 왜?”
도상준 전무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거짓으로 답한다.
질문자의 의도를 전부 파악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유추는 가능하다.
학창시절부터 비대한 몸집을 유지한 그가 펼치는 나름의 방어법이다.
그렇게 선뜻 대답하면서도 식사 횟수를 오분의 일로 줄여 말한 건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하루에 한 번 식사가 아니라 자원봉사활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뿌듯해하는 얼굴을 유지한다.
“오오! 그렇구나. 그냥 궁금했어요!”
문지성은 다 알았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 알맞은 사전정보를 수집한 그는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진다.
“예정일은 언제예요?”
“…….”
옆에 가만히 앉아 두 범죄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문도현 경사는 힘겹게 웃음을 참는다.
그러다 자기도 이른 새벽부터 처음 보는 민원인에게 지금과 비슷한 수모를 당했었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그의 표정이 다시 굳어진다.
괜스레 뱃살을 움켜쥐어본다.
“……예정일? 무슨 예정일? 어떤 일이 예정되어 있어야 되는데?”
도상준 전무는 본인이 모르는 새로운 다이어트 방법이라도 있는 게 아니냐는 듯 얼굴만큼이나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
문지성은 쉽사리 다음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임산부가, 그것도 9개월 가까이 아이를 품어온 사람이라면 수백 번은 들어봤을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방의 반응에 외려 당황하고 만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조금은 친절하지 못한 질문이 그의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루에 한 번 뷔페에 가는 거예요?”
“뭐!?”
도상준 전무는 그제야 질문자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한다.
이내 분노하지만 형사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버럭 고함을 내지를 바보는 없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분노를 삭인다.
경찰 앞에서는 말썽이던 분노조절장애 증세가 단번에 완화되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렇게 답변한다.
“저기, 남자는 임신을 못하는데 몰랐어? 그리고 보다시피 나는 남자고. 그러니까 임신을 한 게 아니라는 거겠지?”
“그건 저도 알고 있는데, 혹시나 했죠!”
문지성이 그런 거였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나는 밥을 좋아해!”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분노가 조금 새어나왔는지 도상준 전무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본인 음식 취향에 대해 언급한다.
“고기 같은 거 안 좋아한다고! 방금 분명 속으로 기름진 고기만 먹을 거라고 생각했지?”
“아하!”
문지성은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된다는 얼굴이다.
탄수화물을 고기만큼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저런 듬직한 풍채를 소유할 자격이 충분하다.
자격이 차고 넘치다 못해 허리와 엉덩이 부근에 차곡차곡 쌓이고 만 것이다.
결국 참지 못한 문도현 경사가 웃음을 터트린다.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에 도상준 전무 뒤에서 새우잠을 자던 한재천이 번뜩이며 눈을 뜬다.
#김선범
오전 11시 18분.
서울지하철 2호선 HYH-8981열차가 을지로 3가역에서 을지로 입구역으로 이동하고 있을 무렵, 소년과 같은 열차 칸에 탑승해있던 중년 남자가 괴로운 얼굴로 좌석에서 일어나고 앉기를 반복한다.
남자의 얼굴은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오래도록 기근에 시달린 짐승처럼 연약해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얼굴을 양말 뒤집듯 뒤집어 안쪽을 보면 특정 대상에 대한 순수한 욕망이 일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하나
고장 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던 중학생 선하나는 아까부터 정신 사납게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중년 남자를 쏘아본다.
언뜻 보면 하체 근력 강화를 위한 운동처럼 보인다. 그런데 운동을 하기에는 너무 지쳐 보인다.
전체적인 인상이 그렇다.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보이고 불안해보이기까지 한다.
무의식적으로 집을 나간 아빠 생각이 난다. 언제부턴가 처음 보는 사십대 남성을 보면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얼굴을 싹 바꾼 아빠가 자기를 훔쳐보러 온 것만 같다.
혼자 살겠다고 떠난 아빠가 그리움을 못 이겨 언제라도 찾아올 것만 같다.
“……거지같네.”
선하나가 중얼거린다.
두 칸 떨어진 자리에 젊은 남자가 앉아있지만 헤드폰을 끼고 있어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본인 처지를 평하다가, 실제로 자기는 거지나 다름없는 신세라는 사실에 기분이 상한다.
이게 다 아빠 잘못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 번 거지같다고 웅얼댄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쪽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가사가 머릿속으로 쉼 없이 들어온다.
분명 모르는 단어임에도 신기하게 철자를 술술 욀 수 있을 것 같다.
몇 번 따라하면 수월하게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홍지선
홍지선이 지하철 좌석에서 힘겹게 눈을 뜬다.
몸에 기운이라곤 없다. 섭취한 음식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무심코 현재 위치가 표시되는 전광판 안내 문구를 확인한다.
목적지는 진즉에 지났고, 처음 보는 지명이다.
그녀는 버릇처럼 긴 한숨을 내쉰다. 핸드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하차를 준비한다.
#이한성
이한성은 아직까지 깊은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가 바닥에 세워놓은 종이 쇼핑백이 덜컹대는 지하철 진동에 엎어진다.
약간의 충격으로 안에 들어있던 물건이 아주 살짝 드러난다.
커다란 필통처럼 보이는 적갈색 가죽 가방이다.
조금만 유의해서 들여다보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김선범
열차가 시청역에 다다를 때쯤, 한 중년 남성이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일어난다. 다시 앉는다.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앉지 않는다.
그대로 걸어가 지하철 조종실로 들어간다.
승객 칸과 연결되어있는 조종실 칸은 보통 잠겨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남자의 손에 작은 열쇠가 들려있다.
양옆으로 좌석과 손잡이가 늘어서있는 승객 칸에서 조종실로 가는 철제문을 열고 닫을 용도로 제작된 것이다.
남자와 같은 칸에 앉아있던 몇몇 승객이 그 모습을 지켜보지만, 수상히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지하철을 운행하는 철도기관사인가 싶어 신기해하는 기색이다.
조종실로 들어간 남자는 정면 널찍한 유리창 너머에 시선을 둔다.
잠시 그렇게 서서 쇠로 된 무거운 이동 수단이 묵묵히 어둠을 가르는 모습을 지켜본다.
귀로는 열차가 덜컹거리는 소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온다.
저 멀리서 빛이 보인다.
승강장이 가까워졌다는 의미다.
남자는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기계 장치와 버튼과 레버들 중 현관문 손잡이처럼 생긴 은색 레버를 아래로 당긴다.
1시를 가리키고 있던 레버가 5시를 가리킨다.
뒤이어 몇몇 버튼을 조작한다. 그리곤 유유히 조종실을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