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1장: 승차
#문지성
조직폭력배 문지성이 빠르게 지하철 계단을 내려간다.
그는 익히 들어본 지명이 시야에 들어오고 이내 머릿속까지 그 지명으로 가득한 상태라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다.
예상치 못한 흥분상태가 그의 운동능력을 향상시킨다.
그와 동시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인지능력이 대폭 감소된다.
예상보다 훨씬 더 가파른 하강세를 보였는지, 그만 앞서 걷던 한 행인의 어깨를 피할 생각도 않고 그대로 들이받는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문지성의 어깨에 충격이 전해진다.
몸이 휘청거린다.
거의 나자빠질 정도의 곡예를 펼치면서 바닥에 엎어진다. 넘어지지 않으려 허우적댄 것이 더 부끄럽다.
부끄러움도 잠시, 문지성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한다.
평소라면 분명 반대로 됐을 것이다.
문지성은 지적능력이 어지간히 서운할 정도로 부족하지만, 얼마간의 균형을 위해 신은 그에게 튼튼한 신체를 부여했다.
또한, 평소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해온 그는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왕성한 활동으로 인해 필요이상으로 단련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문지성은 조금 많이 지나치게 멍청해 보이지만 어엿한 조직폭력배 아닌가.
그야말로 건강한 육체를 무기삼아 생계를 이어가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맞닥뜨린 의외의 상황에 필요이상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문지성은 온순한 인물이지만, 새로운 연장을 구입했다는 들뜬 마음과 지하철만 무사히 타면 드디어 사무실로 복귀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된다.
결국 문지성의 사지 멀쩡한 신체가 척추동물의 부신 속질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아드레날린)에 지배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 결과, 그는 화를 자초한 어깨의 소유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 너 뭐야? 죽고 싶어?”
#채소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사 안으로 들어선 채소윤은 느닷없이 펼쳐진 광경에 두 눈이 번쩍 열린다.
건장한 성인남자가 누군가에게 칼을 들이밀고 있는 모습은 금요일 오전에 자주 볼법한 광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생경한 모습을 두 눈에 담아낸다.
#강승호
소년은 아버지가 일러준 방향으로 차분히 걸어 역시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 역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뒤에서 달려온 누군가 소년의 어깨에 부딪히고 말았다.
처음 방문하는 장소에서 처음 겪는 상황이니 자지러지게 놀란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지만, 소년은 놀라지 않는다.
그저 바닥에 철퍼덕 넘어진 남자에게 공손한 어투로 말한다.
“괜찮으세요? 안 다치셨어요?”
#채소윤
심장이 발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와 세차게 뛴다.
남자의 오른손에 들린 예리한 칼에서 눈을 뗀 그녀는 그 남자와 대치 중인 사람을 본다.
소년이다.
아무리 편견 없는 눈으로 보더라도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됐을 법하다.
소년의 앳된 얼굴을 본 순간 채소윤은 뭔가 이상한 점을 알아챈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채로 어정쩡하게 서있는 쪽이 흉기를 손에 쥔 사내고, 주변 공기마저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냉철한 표정을 하고 있는 쪽이 무방비상태인 소년이다.
평소 범죄영화에서 봐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칼을 든 남자의 표정이 초조해 보이는 건 처진 눈 때문일까 생각하다가도 그녀는 금세 생각을 고쳐먹는다.
흉기를 소지한 남자의 손과 다리가 미세하게 떨린다.
반면 소년은 남자가 들이밀고 있는 것이 칼이 아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는 천장무늬인 것처럼 무덤덤한 얼굴이다.
소년의 몸은 잔잔한 호수 같다.
파문 한 점 일지 않는다.
그저 우뚝 서있다.
#문지성
‘씨발, 씨발, 씨발’
상황이 뜻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자 조직폭력배 문지성은 연신 욕을 뱉는다.
그마저도 차마 입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속으로 중얼거린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한참 잘못된 게 틀림없다.
‘분명 배운 대로 했는데.’
그동안 큰형님께 배운 대로 해서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근데 이번만큼은 다르다.
문지성은 당황한다. 심히 당황한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손과 다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목소리를 높이고 눈을 부릅뜨며 여기저기서 분노를 빌려와 마구잡이로 쏟아낼수록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오기 직전 칼장수에게 구입한 칼까지 꺼내들었건만 조금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다시 한 번 큰형님과 처음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조직에 들어간 문지성은 큰형님과 독대했다.
큰형님 조광필이 물었다.
“야, 막내야. 넌 꿈이 뭐냐?”
“……꾸, 꿈 말입니까?”
문지성은 당황했다.
이미 서류심사, 면접까지 통과한 뒤 합격통보 연락을 받았는데 마지막 평가가 남았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 같았다.
“그래, 꿈 말이다, 꿈.”
친절한 조광필이 질문을 확인시켜주었다.
지적자극이 거의 없다시피 살았던 문지성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열심히 생각했다. 그러자 두통이 찾아왔다.
깊은 생각을 요하는 질문은 두통을 불러오는 법이다.
“……꿈이 없어?”
조광필의 얼굴에서 실망이 떠올랐다.
친하게 지내자 마음먹은 친구가 고수를 못 먹는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는 얼굴이었다.
그때 문지성이 대답했다.
연산처리 속도가 떨어지는 그의 뇌가 무사히 연산을 마친 뒤에 답을 내놓은 것이었다.
“훌륭한 조직폭력배가 되는 것이 제 꿈입니다!”
아부하는 것 같아 어두에 ‘큰형님 같은’ 이라는 말은 넣지 않았다.
새로 온 조직원의 대답을 들은 조광필은 <훌륭한> 조직폭력배라는 말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가만 생각했다.
수사적으로도 맞는 표현처럼 보이진 않았다.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문제인 것 같아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마저 입을 열었다.
“이야, 그래? 그게 뭐든 일단 꿈이 있으니 다행이구나. 어디 한번 열심히 해봐라.”
거기까지만 말했다면 문지성에게 큰형님 조광필은 그저 그런 직장상사로 비춰졌을 테지만, 조광필은 다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항상 응원한다. 몸조심하고.”
그 순간, 큰형님 조광필은 문지성의 새로운 가족이 된다.
어릴 적부터 친형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남자를 본 경험이 없는 남자에게, 폭력과 폭언으로 점철된 유년 시절을 보낸 남자에게 응원과 격려는 그런 것이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문지성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을 나가려던 문지성의 등에 대고 큰형님이 말했다.
“야, 막내야. 자고로 깡패는 깡이 있어야 돼. 그래서 깡패야.”
사실 큰형님 조광필은 조직폭력배라는 말보다 깡패라는 말을 더 좋아했다.
“예!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깡패가 되겠습니다!”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면 안 된다. 아무도 널 얕보지 못하게 해야 돼.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되는 거다. 알았지?”
조광필에게 주옥같은 가르침을 받은 문지성은 훌륭한 깡패가 되기 위해 물심양면 노력했다.
강함의 영역에는 오직 육체적인 부분만 존재하는 줄 알고 신체단련에만 신경 썼던 것이 매우 아쉽긴 하지만,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갔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문지성은 훌륭한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당당히 조직폭력배다운 조직폭력배가 되는 데 성공한다.
그 증거로 오늘 주어진 업무(미팅장소 및 시간 전달)를 아주 근사하게 처리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지 않는다. 얕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문지성이 강한 사람이라는 방증은 아니다.
물론 사람들은 강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얕보지도 않지만, 위험한 사람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문지성은 강한 사람이라기보다 위험한 사람이었다.
위험한 사람을 무시하고 얕보는 건 위험한 상황에 빠지겠다는 자진신고나 다름없다.
그리고 지금 문지성은 사마천파 일원이 된 이래로 처음 무시당한다.
게다가 자기를 얕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가장 중요한 점은 상대방은 성인도 안 된 학생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담배도 제대로 필 줄 모를 것 같이 생긴 학생에게 얕보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훌륭한 조직폭력배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더욱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강승호
소년은 두 눈이 받아드리는 시각정보를 빠르게 수집해 뇌로 전달한다.
성인남성, 신장 178, 체중 80, 리치 181, 상체에 비해 부족한 하체 근육, 칼날 12, 오른손잡이.
#채소윤
벽 뒤에 숨은 채 고개만 삐쭉 내밀어 상황을 지켜보던 채소윤은 경찰에 신고를 마친다.
#문지성, 강승호
문지성의 뇌는 여태 보인 활동과는 사뭇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때 아닌 흥분과 사태의 심각성이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해 그의 지능을 한껏 끌어올린 것이다.
그는 비로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능히 가져야 할 수준의 지능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엄청난 진화로도 현안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훌륭한 조직폭력배를 꿈꾸는 문지성의 뇌는 사고를 멈춘다.
여기서 뇌를 더 사용했다가는 과부하로 타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뇌가 생각을 멈추자 몸이 반응한다.
오른손에 들려있던 칼을 크게 휘두른다.
특정 부위를 겨냥하는 법 없이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움직임이다. 누가 봐도 훌륭한 조직폭력배의 움직임은 아니다.
그와 동시에 문지성은 내 당장 네 놈의 생식기를 비롯한 신체 각 부위를 도려내어 장을 담가먹겠다는 당찬 포부를 큰소리로 외친다.
그 묘사가 어찌나 생생하던지.
얼떨결에 식재료 취급을 당한 소년이 ‘요리산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릴 정도다.
이미 훌륭한 복싱선수로 거듭난 소년은 상대방의 움직임에 즉각 반응한다.
하체를 굳건히 바닥에 고정시킨 채 상체를 왼쪽으로 기울여 칼을 피한다. 그리곤 곧바로 허리를 회전시키며 반걸음 앞으로 치고나가면서 왼쪽 주먹에 힘을 싣는다.
뻗는다.
#채소윤
채소윤은 그 순간, 소년이 뿜어내는 신체적 절묘함에 감탄한다.
한 인간이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2초도 안 되어 마무리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다.
거칠게 휘두르는 남자의 흉기를 피해 소년이 짧게 뻗은 주먹이 갈비뼈 밑에 다다르자 남자는 으헉,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다.
흉기가 금속음을 내며 떨어진다.
외마디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호흡하는 방법을 까먹은 것처럼 헉헉거리며 배를 부여잡은 채 웅크리고 있다.
이윽고 저 멀리서 역무원이 달려온다.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의 손목이 결박되고 자칫 인명피해로 번질 뻔했던 위험한 소란은 의외로 간단히 정리된다.
채소윤은 유유히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소년을 뒤따른다.
곧 지하철이 도착할 것이다.
#문지성
훌륭한 조직폭력배를 꿈꾸던 사마천파 막내 문지성은 그렇게 체포된다.
세종대왕님을 여덟 분이나 모셔서 구입한 근사한 칼도 경찰에 압수된다.
#공원 산책 중이던 행인1
“처음에 무슨 촬영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요! 공원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 생김새가 워낙 특이해서요. 대머리 둘에 앞머리가 콧잔등까지 내려와 있는 사람이랑 노란색 마스크랑 헤드폰 쓰고 있던 사람까지. 나머지 한 명은 워낙 평범해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리고 각 무리에서 한 명씩 의자에 앉아있었어요.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요. 바둑으로 릴레이 경기라도 하려나, 생각했죠! 근데 갑자기 서로 막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서울 모 공원에서 진행된 두 범죄조직 간의 회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시민 김 모 씨의 증언이었다.
“제 기억이 제대로 됐다면 아마도 그 눈 없는……, 아, 그러니까 앞머리로 눈을 가린 사람이 먼저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바둑 두다가 싸움이라도 난 줄 알았어요. 원래 자주 그러잖아요. 이런저런 훈수하다가 목소리 높아지고 그러다보면 주먹도 주고받고. 물론 그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는 않았어요. ……솔직히 조금 아쉽긴 했어요. 그 사람들 싸움 진짜 못하게 생겼거든요! 구경하면 꽤 재밌었을 텐데. 근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제가 마침 무시무시한 도끼보고 놀라서 112에 신고하려던 참이었는데!”
#사마천파-형제캐피탈 M&A 미팅 현장
난데없는 경찰의 등장에 그야말로 화들짝 놀란 두 범죄조직은 실제 가족, 혹은 가족 같은 조직원이나 상사와 부하를 챙길 겨를도 없이 각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내달린다.
공원을 빠져나가 좁은 골목길을 누비기 시작한다.
침실 위치를 들킨 바퀴벌레도 이 정도로 재빠르게 도망치지는 못할 거라며 경찰들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현장에 출동한 인원 중 가장 고참인 고종한 경위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뭐해? 잡아.”
#정성도
공원에 들이닥친 경찰이 우렁찬 목소리로,
“경찰이다! 두 손 머리 위로 올려!”
하고 외쳤을 때, 누구의 말이던 간에 잘 듣는 정성도는 그렇게 한다.
하지만, 두 다리에 대한 명령은 입력되지 않았기에 그는 죽어라 다리를 놀려 공원을 벗어난다.
190센티미터 신장에 딱 맞는 비율로 자라난 긴 다리가 제 능력을 톡톡히 발휘한 덕이다.
바둑판처럼 촘촘하게 늘어진 골목길을 누비며 정성도는 필요 이상으로 숨을 헐떡인다.
미세입자―평균 입자크기 0.4㎕m―를 94% 이상 차단하여 황사, 미세먼지 같은 입자성 유해물질과 신종플루 같은 질환 감염원으로부터 호흡기를 보호할 수 있다는 KF94 마스크 때문이다.
마스크필터를 거치고 들어온 산소는 정성도의 호흡을 안정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그는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냥 습관이고 패션이다.
#도상길
형제캐피탈 도상길 사장이 재빠르게 차에 시동을 걸고 현장을 빠져나간다.
실로 오랜만에 잡아보는 핸들이다.
그동안 운전은 동생이자 부하직원인 도성준 전무가 도맡았기 때문이다.
들썩들썩 마구잡이로 떨어대는 심장이 꼭 경찰의 등장 때문만은 아닌듯하다.
핸들을 돌리는 양손과 액셀을 밝는 오른발이 아주 어색하게 느껴진다.
‘내가 왼발잡이였던가? 음……, 일단 밥 먹는 손은 오른쪽에 달려있어.’
그나저나 경찰이 무슨 수로 들이닥쳤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안 그래도 모르는 일투성인데, 이것만은 진짜 모르겠다.
질문할 용의는 있지만, 질문을 받아줄 사람이 안 보인다.
#조광필
또 한 명의 사장, 사마천파의 보스 조광필도 자동차에 오른다.
무의식적으로 운전석에 앉은 채 3초가량 기다린다.
부하들이 뒤따라 타길 바라지만, 행동대장 한재천과 서열 3위 정성도는 이미 각자도생의 길을 떠난 지 오래다.
혼자 운전하는 것만큼 지루한 일도 없건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광필은 별 수 없이 액셀을 꾹 밟는다.
평소처럼 라디오를 틀까 고민하다 혹여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묻힐까 단념한다.
그래도 명색이 도망자인데, 사이렌 소리 정도는 들어줘야 한다.
#한재천
호리호리한 체형의 소유자답게 발이 빠르고 말도 빠른 한재천은 진작 공원을 빠져나가 좁은 골목에 숨어든다.
평소 휴대하던 묵직한 나이프가 없어서인지 몸이 한층 가볍다.
#도상준
비대한 뱃살 때문인지 움직임이 둔한 형제캐피탈 도상준 전무는 힘겹게 골목을 방황한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민머리라는 특징 때문에 경찰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불상사가 생길까 두려워 그는 재킷을 벗어 하얀 두피를 가린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그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확보되지 않은 좌우 시야각이 바로 그것이다.
민머리를 숨기느라 덮고 있는 재킷이 그의 시야를 방해한다.
좁아진 시야 때문에 우측 골목에서 나온 행인을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 도상준 전무는 행인과 충돌하고 말 그대로 벌러덩 나자빠지고 만다.
“우아아아악!”
다소 사실적인 비명과 함께 골목길 한복판에 드러누운 도상준 전무는 그대로 누워 쉬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지만, 서둘러 이겨내고 몸을 일으킨다.
당장 안 일어나면 간식을 안 준다는 얘기를 들은 어린아이 같다.
“어이, 아저씨! 잘 보고 다녀야죠!”
상대가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민머리땅딸보배불뚝이 아저씨라는 점을 간파한 행인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한눈에 봐도 건장해 보이는 이십대 청년이다.
청년은 뒤이어 혼잣말로 욕을 지껄이고는 대뜸 팔을 걷는다.
하얀 긴팔티셔츠가 팔꿈치 부근까지 말려 올라간다.
왼쪽 팔에는 할 줄 아는 거라곤 어흥, 하고 소리 내어 우는 것밖에 없어 보이는 호랑이 문신과 정체불명의 외계어로 가득하다.
본인의 모자란 지능과 섣부른 판단력, 결여된 사회성을 팔뚝에 광고하고 있는 셈이다.
“…….”
도상준 전무는 말이 없다.
초대장도 보내지 않은 경찰들의 뻔뻔한 등장 때문에 예정에 없던 운동을 했기 때문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탓이다.
누구보다 계획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그는 절대 계획표에 적혀있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다.
물론, 운동이 도상준 전무의 계획표에 포함되는 일은 근 5년을 통틀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머리로 일하는 사람은 몸을 단련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변명이라면 변명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머리라는 명사는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두뇌, 지능을 뜻한다.
운동부족이 탈모 진행속도를 가속화시켰다는 의사의 진단에는 유전이라는 근사하고 운명적인 변명을 늘어놓곤 했다.
그의 아버지, 형 모두 머리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머리는 그 머리가 맞다.
머리카락이다.
유서 깊은 민머리 집안의 막내 도상준 전무는 눈앞에서 눈알을 부라리고 있는 이 청년에게 42인치 허리둘레를 가진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보려는 너그러움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고 힘겹게 말한다.
“……뭐라는 거야? 됐고! 내 핸드폰 어쩔 거예요?”
30인치 허리둘레를 가진 청년은 이때다 싶어 일주일 전에 박살난 휴대폰 액정을 들이민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지금 급히 가봐야 해서요.”
도상준 전무는 불안한 눈으로 뒤를 살핀다.
아까 도망칠 때 슬쩍 봤는데, 경찰들 중 어떤 사람도 허리둘레가 34인치를 넘을 것 같지 않았다.
암만 생각해도 희소식은 아니다.
“그거 좋네! 피차 급한 사람들끼리 급하게 해결해보자고.”
팔에 새긴 광고가 그 효과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는 거 같아 신난 청년은 도상준 전무의 저자세에 더욱이 건방진 어조로 덧붙인다.
“아저씨! 원래 이럴 때는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깔끔한 거야.”
청년의 말에 도상준 전무는 자기도 그 분야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 잘 아는데, 지금은 수중에 현금이 없다고 답변한다.
“아니, 아저씨! 세상에 무슨 그런 재미없는 소리를 해. 지갑 한번 봐봐.”
청년은 이미 충분히 웃음을 유발하는 외모 덕에 재미있는 농담을 일삼을 필요가 없던 도상준 전무가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휙 낚아챈 다음 지퍼를 연다.
그리고 그대로 돌처럼 굳는다.
청년이 민머리땅딸보배불뚝이 아저씨의 서류가방에서 가장 먼저 본 물건은 다름 아닌 손도끼다.
흉기 소지로 혹시 모를 오해를 불러일으킬 생각은 계획에 없던 도상준 전무가 청년을 진정시킨다.
“아아, 저기 청년,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시고, 이건 손도끼라는 물건인데, 뭔가를 자르거나 할 때 쓰는……, 내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잠깐―”
“……움직이지 마!”
청년은 이미 웃돈을 주고 오해란 오해는 대거 구입한 상태다.
“움직이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니냐며 도상준 전무는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참고로 경찰은 이미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이 근처에 깔려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는다.
대신 신고는 안 하는 편이 한결 나을 거라고 나름대로 힌트를 준다.
이미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똑같은 지역에서 또 신고를 받으면 자기 같아도 괜히 심술이 날 것 같다고 한다.
어릴 적에 이제 슬슬 게임을 끄고 잠을 자려고 했는데 컴퓨터게임 좀 그만하고 잠이나 처자라고 꾸짖던 부모님의 잔소리를 떠올려보란다.
신고는 안 하는 게 좋을 거라는 도상준 전무의 힌트를 경찰에 신고하는 순간 네 신상에 크나큰 이변이 생길 거라는 아찔한 경고로 받아드린 청년은 소리치기 시작한다.
“당신! 허튼 수작 부리지마! 무기는 지금 나한테 있어!”
그때, 누군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재천이다.
30인치 바지를 입을 것 같은 허리에 눈앞이 깜깜해 보이는 남자.
그를 본 청년은 든든한 아군이라도 등장한 것처럼 호소하기 시작한다.
“아저씨! 여기 수상한 사람 있어요! 도와주세요!”
#한재천
잔뜩 겁에 질린 문신청년에게 사마천파 행동대장 한재천이 묻는다.
“무슨일이에요?”
문신청년은 격앙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고 한재천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을 한다.
“아저씨! 이 대머리아저씨가 괴팍하게 생긴 도끼 가지고 있어요!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데, 아저씨가 경찰에 신고부터 해주세요! 이 더럽게 생긴 아저씨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요!”
한재천의 맹목적인 집단주의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아무리 인수합병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어도 도상준 전무는 이미 같은 식구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한재천의 사고회로에 존재하는 조직도―사마천X형제캐피탈―에는 이미 도상준 전무의 이름이 새로 연결된 상태다.
항렬이나 호칭과 같은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심도 깊은 고민과 상의가 필요하겠지만, 식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식구를 욕하는 사람에겐 응징만이 있을 뿐이다.
“감히누구한테까불어!”
“…….”
처음 본 두 남자의 비정상적인 기질을 뒤늦게나마 파악한 문신청년은 천천히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간다.
어깨와 가슴을 반듯하게 편 모습이 꽤 당찬 걸음걸이였는데, 꼭 자기가 급히 자리를 옮기는 건 당신들이 무서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금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동료의식에 위협을 가하고 허위사실 유포로 식구를 매도한 문신청년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한재천과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잔칫날에는 빠지는 법이 없는 분노조절장애인 도상준의 린치가 시작된다.
어떤 각도로 보나 차마 정상이라고는 판단하기 어려운 두 남자에겐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연히―동작이 과격해짐에 따라 한재천의 앞머리가 나풀거렸다―서로의 시선이 맞닿자, 둘은 좋다고 웃어 보인다.
미친놈까지는 아니어도 정신이 엇나간 동류로서의 친근감에서 비롯된 미소다. 서로에게 자연스러운 호감이 생긴다.
즐거운 일을 함께함으로써 빚어낸 동료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잠시 후, 너무 신난 나머지 사주 경계를 소홀히 한 도상준 전무와 한재천은 골목을 누비던 강력계 형사들에게 체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