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2장: 운행
#김선범, 손준겸, 선하나
“……어, 어쩌라고!”
김선범의 손에 들린 칼이 손 씨에게 향한다.
물론 5미터 가량 떨어져있다.
김선범에게 특출한 투척의 재능이 있지 않은 이상, 손 씨가 다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손 씨는 인질범의 협조적이지 않은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새로운 고객을 만든다는 심정으로 한 걸음 먼저 다가선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일 뿐 실제로 걸음을 옮기진 않는다.
“저, 일단, 흥분 좀 가라앉히시고 대화로 하시는 게 어떨까요?”
거기까지 말한 손 씨는 여태 원활하진 않지만 철저히 대화의 방식으로 인질범과 소통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래 생각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제안을 한다.
“일단 그 위험한 물건은 내려놓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제 말에 동의하시나요?”
눈앞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과 같이 잔뜩 겁먹은 채 옹기종기 모여 있는 까닭이 본인 오른손에 들린 <칼>이라 불리는 이 위험한 물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김선범은 사람들과 칼을 번갈아 쳐다본다.
다소 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온 이상 아무것도 못한 채 물러설 수는 없다고 다짐한 김선범은 무라도 베는 심정으로 제안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을 뱉는다.
짧은 문장이지만, 입을 여는 내내 동공이 요동친다.
그 안에는 불안이 한가득 보인다.
“……내, 내가 그렇게 해주면, 너네는 나한테 뭐 해줄 건데!”
하나를 얻어내려면 다른 하나를 내어줘야 하는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손 씨는 인질범과의 협상도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줄곧 비즈니스 세계에서 지내온 그는 과감히 배팅한다.
너무 과감한 나머지 본인과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승객들과의 논의는 생략하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린다.
비즈니스에서 과감함은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저, 저희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 예, 핸드폰! 전부 드릴게요.”
“……엥?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핸드폰이 없는 상태에서 두 시간을 넘겨본 적 없는 선하나가 버럭 소리친다.
가장 나이가 어린 인질답게 성대가 아주 건강하다. 어렵지 않게 고성을 내지른다.
아무래도 핸드폰과 같은 개인 물품이 끼어들게 되면 과민해지기 마련이다.
“아저씨!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그런 걸 마음대로 결정해요!”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말에 습관처럼 명함을 꺼내들 뻔했던 손 씨는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을 보며 차분히 속삭인다.
“학생, 걱정 안 해도 돼. 나한테 워치 있어. 애플워치.”
그리고는 비싼 가격을 주고 구매했지만 손목시계 그 이상의 용도를 발휘한 적이 없던 스마트워치를 드디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다고 내심 기뻐한다.
스마트워치의 통화발신 기능을 활용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손 씨의 생각을 단번에 이해했을 리 없는 선하나는 허전한 본인의 손목을 괜스레 붙잡으며 이렇게 외친다.
그게 꼭 크나큰 결점이라도 되는 듯이.
“난 워치 없다고요! 아저씨가 갤럭시를 쓰는지 아이폰을 쓰는지 내가 알 필요는 없잖아요!”
선하나의 건강한 성대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인질범 김선범의 귀에 어렵지 않게 닿는다.
칼과 휴대폰을 교환하자는 손 씨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들려온 제보에 그는 자칫 불공정거래에 서명할 뻔했다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리곤 계약서를 수정한다.
“……좋아. 그렇게 해. 대신 스마트워치도 같이.”
그리하여 인질범은 흉기를 내려놓고, 인질들은 핸드폰을 비롯한 통신이 가능한 스마트기기들을 꺼내 한곳에 모아둔다.
손 씨를 제외하고도 4명의 승객이 스마트워치를 착용하고 있다.
선하나는 또 한 번 열불이 난다. 가만 보면 반 친구들도 상당수 워치를 끼고 있었던 같기도 하다.
살다 살다 시험장도 아니고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압수당하는 경험을 한 몇몇 승객은 경찰에 신고할 수단이 사라진 것에 대해 절망한다.
또 다른 몇몇은 어떤 역에도 정차하지 않고 운행을 이어가는 지하철을 살면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곧 수상한 지하철에 대한 보고가 어딘가로 보고될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다만 단순한 기계적 결함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걱정한다. 지하철에서 인질극이 벌어지는 건 이 세상 어떤 일보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반면, 이곳 상황을 외부로 정확하게 전달한 소년은 그저 자리에 앉아 상황을 지켜본다.
가장 믿음직스럽고 가장 강한 사람에게 전했으니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시민1, 2, 3
평소 당연하다는 듯 자가용을 이용하던 모 기업 김 전무는 전날 잠들기 전에 시청한 다큐멘터리에 크나큰 감명을 받고 지구 살리기 운동에 동참하기 위한 갸륵한 마음을 품고 지하철을 타러왔다.
자가용을 구입하는 순간 빠져나가게 될 보험료, 유류비가 너무나 두려운 자영업자 임 모 씨는 언제나처럼 지하철 승강장에 서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 소요시간이 갑절로 늘어나는 통에 지하철이 유일한 교통수단이나 다름없었던 취업준비생 홍 모 양은 승강장 기둥에 기대어 열심히 단어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평소에는 제자리에 잘만 서던 지하철이 단단히 토라졌는지 승강장을 휭 지나쳐간다.
“……?”
“……?”
“……?”
예비 승객이자 예비 인질 후보 중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한다. 처음 보는 광경에 있는 대로 황당해한다.
“……여기서 타는 게 아닌가?”
지하철이 익숙하지 않았던 김 부장은 의문을 표했고,
“에이씨, 뭐야?”
조금이라도 일찍 가서 점심 장사 재료를 준비해야 했던 임 모 씨는 약간의 짜증을 곁들여 의문을 표했으며,
“뭐야? 쟤 왜 그냥 가지? ……몇 번 버스 타야 되지?”
도서관에 가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스케줄이 없던 홍 모 양은 비교적 평온한 얼굴로 의문을 표한다.
예비 승객―인질―들의 반응은 다음 역, 그 다음 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제때 방문하지 않고 일찍 온 주제에 멈출 기세도 없이 나 몰라라 엉덩이만 보여주는 지하철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각자 소심한 욕과 의문의 소리를 내뱉고 승강장을 빠져나간다.
계획을 수정한다.
공교롭게도 서울에는 지하철 이외에 다양한 교통수단이 운영 중이다. 귀찮기는 하지만 어찌어찌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다.
다만 더 서둘러야 할 뿐이다. 안 그래도 바쁜 일상이 더욱이 바빠진다.
이들에게 사태 진위를 파악할 만한 시간까지는 없다.
그저 눈을 돌려 다른 곳을 보면 그만이다.
그런 현대인들의 무관심한 분주함 때문에 서울 지하철 2호선 열차 운행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는 신고는 한참 뒤에 접수된다.
#문도현
“사람 좀 보내달라고! 나 혼자 무슨 인질을 구해! 빨리! 형, 이거 실제상황이라니까!”
문도현 경사가 핸드폰을 향해 악을 지른다.
핸드폰 너머 고종한 경위는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아끼는 후배의 흥분이 사뭇 놀랍다.
한때는 자타가 공인하는 강력계 에이스로 통했지만, 영문도 모르는 이유로 일에 대한 열정을 잃고 하루하루 찌들어가는 후배가 몹시도 안타까웠다.
파출소로 근무지를 옮긴 이후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저 남의 집 일이라는 듯 무관심한 태도로 업무에 임했다.
그런 문도현이 이렇게나 열을 내며 달려드는 게 고종한 경위는 내심 반갑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는 없다.
이미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신고가 들어와 출동해있는 상황인데다 도주 중인 범죄자를 검거해야 한다.
―누가 너보고 인질 구하라고 했냐! 네가 무슨 수로 인질을 구해 인마! 쌩쌩 달리는 지하철에 뛰어들기라도 할 거야? 대치만 하라고 대치만! 대치가 무슨 뜻인지 몰라? 경찰이 개입했다는 것만 인질범한테 인지시키라고, 더 이상 허튼 짓 못하게!
문도현 경사는 속이 터질 지경이다.
도망 다니는 조직원 하나 못 잡아서 인력충원이 불가하다니.
그때 유치장 안에 얌전히 앉아있는 문지성과 눈이 마주친다.
“…….”
문도현 경사가 문지성의 얼굴과 옷차림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한다.
“형! 도주 중이라는 그 조직원, 인상착의 설명해봐.”
고종한 경위는 설명을 시작한다.
키가 멀대 같이 크고 얼굴이 허옇고 위아래로 검정색 옷을 입었다.
무엇보다 샛노란 마스크와 헤드폰을 착용하고 있단다.
“씨발, 아니네.”
문도현 경사는 중키에 까무잡잡한 문지성을 보고 버릇처럼 욕을 뱉는다.
혹시나 하는 바람이 빗나가자 그는 다시 불만을 제기한다.
“아니, 그렇다고 대치는 나 혼자 하나! 만약 인질범이랑 연락하다가 내가 똥이라도 마려우면 어쩌려고!”
―똥 한번 잘 싸서 사람처럼 보이게 해봐봐!
실로 오랜만에 하는 대화다운 대화에 고종한 경위는 방긋이 미소 짓는다.
“인질범이 우리를 어떻게 봐! 쌩쌩 달리는 지하철 안에 있는데!”
―그럼 네 똥한테 말이라도 가르쳐보던가! 범인 놈이랑 통화할 때 목소리라도 보태게.
“아씨! 이 양반이! 아무나 보내줘요 빨리! 나도 인질범은 무서워!”
문도현의 말에 고종한 경위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미친놈아! 네가 피떡 되게 때려잡아서 수갑보다 링거 바늘 먼저 차게 만든 용의자로 축구팀도 만들 수 있겠다! 법원보다 병원 먼저 보내는 형사가 네 놈 말고 또 어디 있어!
“나 이제 형사 아니라고!”
문도현 경사가 항변한다.
―그래그래, 전 형사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지금 내가요, 이 깡패 새끼랑 빚쟁이 새끼들 때문에 정신이 없걸랑요? 그만 끊을게요. 두 놈은 도망가다가 교통사고 나서 응급실까지 갔답니다. 바빠 죽어!
“아니, 뭔 놈의 경찰서가 조직 접선 신고 하나 들어왔다고 죄다 뛰쳐나가!”
―서울 한복판에서 두 범죄조직이 모인다잖냐! 그러니까 얽혀있는 팀이 많은 거지.
조직폭력을 담당하는 강력계에 이어 금융범죄를 담당하는 수사팀까지 모조리 차출되어 출동한 상황이다.
“아이, 형. ……진짜 누구 없어요? 아무나 괜찮다니까?”
현장출동의 부담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문도현 경사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묻는다.
―네가 아무나……, 라고 했다?
그렇게 ‘아무나’로 판명된 최병기 순경이 강력계 사무실로 출근한다.
파출소로 배정된 지 일주일이 막 넘었다. 그리고 경찰이 된지는 반년이 막 넘었다.
#선하나, 손준겸, 류기태, 채소윤
오전 11시 42분, 실제로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위험한 흉기가 제자리―이한성의 칼 보관가방―를 찾아가고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승객들은 한데모여 나름의 의견을 내놓는다.
“아저씨가 괜한 말 꺼내서 핸드폰 못 쓰게 됐잖아요!”
선하나가 의견을 빙자해 투덜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단체 채팅방에 새로운 메시지가 줄지어 나타나 웃음이 오갈 게 분명하다.
게다가 SNS에서는 유익한 화젯거리를 담은 게시물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것이다.
분명 지하철 속에 있는 자기가 더 빨리 움직이고 있을 테지만, 왠지 모르게 친구들보다 도태되는 기분이다.
“학생, 나는 그저 안전을 위해서 그랬던 거야.”
손 씨는 과장된 몸짓으로 승객들을 둘러본다.
“자, 다들 조금씩은 편안해보이잖아. 불안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못해.”
실제로 승객들의 심신이 한결 편안해 보인다.
인질범과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기는 하지만 공포심에 덜덜 떠는 사람은 없다.
“저기 말이야. 자네, 대학은 어디 나왔어? 딱 봐도 공부 꽤나 했구만. 대학원도 갔나? 난 딱 보면 알아.”
육십 대 남성이 대뜸 손 씨의 최종 학력에 대해 궁금해 한다.
“……예? 갑자기요?”
고등학교 졸업식이 인생 통틀어 마지막으로 참석한 졸업식이었던 손 씨는 되묻는다.
“할아버지!”
선하나는 육십 대 남성을 아주 공손한 낱말로 지칭한다. 누가됐든 새치기는 참기 어려운 법이다.
“제가 먼저 말하고 있었잖아요. 제 얘기 아직 안 끝났다고요.”
하얗게 샌 머리칼과 주름진 얼굴만 보면 언뜻 팔십 먹은 노인이라 봐도 무방한 육십 대 남성이 입을 연다.
“아이고, 그래. 반갑다 아가야.”
과감한 어휘선택도 잊지 않는다.
“나는 류기태라고 한다. 올해로 예순다섯이 됐어. 그러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좀 있는 거 같다만, 내 특별히 대답은 해주마. 넌 이름이 뭐니? 예순다섯이 몇 살인지도 설명해줄까?”
“……아가 아니고 중학생이에요!”
몇 년 전까지 아가였던 소녀를 또다시 아가라고 지칭하는 건 너무 가혹한 걸지도 모른다.
“예순다섯이 몇 살인지도 다 알거든요! 설명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리고, ……선하나! 이게 제 이름이고.”
손녀뻘이나 다름없는 선하나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일법도 하지만 류기태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목소리 또한 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래, 선하나 학생. 기특하구나. 예순다섯이 몇 살인지도 알고.”
눈을 부릅뜨고 째려보는 어린 학생에게 단 한 마디도 질 마음이 없는 류기태가 덧붙인다.
“근데 중학생이라고? 그 말은 그러니까 대학을 안 나왔다는 거네?”
“중학생이라고요!”
그저 틀림없고 분명한 사실을 언급했을 뿐인데도 선하나는 왜인지 화가 치민다.
그녀의 눈은 더욱이 날카로워진다.
“난 하버드 나왔어. 하버드대학교, 알지? 미국에 있는데. 미국은 알지?”
오늘 처음 만난 할아버지의 출신 대학 따위 관심 없던 선하나는 성대가 찢어져라 대꾸한다.
“하버드 알아요! 미국도 알고!”
“아이고, 기특해라. 아는 것도 많네. 대학도 안 나왔는데 말이야.”
그때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던 채소윤이 나선다. “선생님, 그만하세요. 어린 학생이랑 뭐하시는 거예요.”
“대화 중이잖아.”
류기태가 건조하게 대꾸한다.
엄숙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승객들은 육십 대 남성을 보며 예의가 거세된 인간 같다고 생각한다.
#김선범
승객들의 핸드폰을 한데모아 열차 조종실 안으로 들고 온 김선범은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본다.
지하철 점거라니.
오늘 아침, 나아가 삼십분 전까지만 해도 계획에 없던 일이다.
‘게다가 내가 인질범?’
김선범은 아까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처음 누군가의 입에서 <인질범>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바로 부정하지 않은 본인의 굼뜬 태도가 생각할수록 아쉽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조종실 절반이 넘는 면적을 둘러싼 전면 유리를 통해 밖을 응시한다.
또 다시 저 멀리서부터 빛이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열차는 정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계속 달려야한다.
아직 달릴 수 있다.
#정성도, 장석기
경찰들의 추격을 피해 도망쳐 왔건만 이번에는 대뜸 인질범이라니.
정성도는 인질범이 칼을 내려놓자 그제야 긴장을 푼다. 헤드폰 음량을 조절해 음악소리를 키운다.
인질범이 MP3플레이어까지 요구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덕분에 다른 승객들의 대화소리는 정성도의 귀에 닿지 않는다.
그나저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되기는 처음이다.
그때 한 남자가 정성도에게 말을 건다.
“…….”
답이 없자 남자는 정성도의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네?”
느릿한 움직임으로 정성도가 헤드폰을 살짝 들어 오른쪽 귀로 소리를 받아들인다.
“안녕하세요? 장석기라고 합니다.”
정성도는 멀끔한 인상의 남자를 위아래로 훑는다.
굵고 힘 있는 목소리와 각지고 벌어진 어깨 때문인지 제법 강인해 보인다.
“네, 안녕, 하세요?”
“갑자기 말 걸어서 당황하셨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장석기는 대뜸 정성도가 착용하고 있는 헤드폰을 가리킨다.
“저도 같은 헤드폰 써요. 근데 이런 색상도 있었어요? 처음 봐요.”
“아, 이거, 제가, 색, 입혔어요.”
“아아, 역시.”
장석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노란색 좋아하시나보다.”
“네, 뭐, 그렇죠.”
같은 조직 식구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받는 관심이 어지간히 어색한 정성도의 표정은 점차 굳어간다.
“근데 이거 그냥 노란색 말고 이름이 따로 있지 않아요? 저는 그 단데라이온(Dandelion)이었나? 그 노란색이 좋던데.”
“……!”
정성도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다른 사람 입으로 그 단어를 들은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입도 눈 못지않게 큼직하게 벌어졌지만 마스크 때문에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혹시, 미술, 하세요?” 정성도가 묻는다.
“미술이요? 아니요. 전혀 관련 없는 쪽에 있어요. 워낙 평소에 이런저런 단어에 관심이 많아서요. 그래서 알게 됐어요. 단데라이온이라는 어감이 듣기 좋아서.”
장석기는 기대에 못 미친 거 같아 쑥스러운 듯 말하지만, 정성도의 관심을 사기엔 충분하다.
처음 본 또래 남자에게 급격한 호감을 느낀 정성도는 급기야 본인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정성도, 입니다, 나이는, 서른.”
“아, 서른이에요? 동갑이네. 반가워요.”
#이한성
열차에 있는 또 한 명의 서른 살, 이한성은 반쯤 열린 눈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어두운 바깥풍경을 본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
그는 차분히 심장박동을 진정시킨다.
유일한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칼이 든 적갈색 가죽 가방을 필사적으로 붙잡은 채로 소중한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지 두 눈으로 거듭 확인한다.
#홍지선
누군가는 열띤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는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또 누군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때,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로 계획했던 홍지선은 크게 실망한다.
처음 인질범이 손에 칼을 쥐고 핸드폰을 요구했을 때는 다리가 덜덜 떨려오고 겨드랑이에서는 식은땀이 배어나온 게 사실이지만, 그녀는 점차 흥분했다.
어쩌면 굳이 자기 손을 더럽힐 필요 없이 계획을 완수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불러온 흥분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모든 번거로운 절차를 알아서 처리해주는 호사를 누리는 상황이 찾아올 가능성도 있겠다, 싶었던 그녀는 사뭇 기대했다.
하지만 홍지선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질범은 순순히 흉기를 내려놓았고, 또 순순히 뒤돌아 자그만 철문으로 연결된 조종실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인질들에게 어떠한 위협도, 요구도 해오지 않는다.
오늘 같은 결전의 날에 어쩜 이리도 시시한 인질범이 방문했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직접 피를 묻히는 수밖에 없겠다고 홍지선은 중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