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만학도 김상봉 씨

by 류해인


“걱정하지 말라니까. 혼자 잘 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보름 있다가 온다며?”


공항버스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직 현관을 못 벗어난 모녀에게 김상봉 씨는 호언장담한다.


“금방은 무슨…….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먹고는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마지막이니까 잘 들어요.”


그의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김상봉 씨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하면 좋으나 결코 하지 못할 거라면서 알아만 두라는 일들의 리스트를 열거하기 시작한다.


“가스밸브 항상 확인하고, 하루에 한 번씩 환기시키는 거 잊지 말고, 문단속도……. 어머! 내 정신 좀 봐. 어제 화장실 청소 한다는 걸 깜박했네. 이걸 어쩐담…….”


“아이고, 안 죽는다! 화장실청소 안 한다고 당장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난 또 뭐라고…….” 김상봉 씨는 부러 큰 목소리로 호언장담한다. “그까짓 청소! 내가 할게!”


“……그럴래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한 번 때 놓치면 배로 힘들어. 당신, 청소는 할 줄……, 알죠?”


아내의 미심쩍은 목소리와 ‘는’이라는 보조사를 사용했다는 것에 김상봉 씨는 아주 조금(정말 아주 아주 조금) 상처를 받는다.


“알다마다! 나도 예전엔 혼자 잘 먹고 잘 살았어! <나 혼자 산다> 찍어도 될 판이었다니까!”


살림 고수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중수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며 김상봉 씨는 소싯적에 해본 자취생활에 대해 스스로 점수를 매겨본다.


“그러니까 걱정 그만하고 얼른 가. 얼른!”


김상봉 씨는 또 한바탕 일장연설을 늘어놓을게 빤한 아내를 현관문 쪽으로 들이민다. 동시에 딸에게 눈짓을 보낸다.


딸아이는 제 엄마와 똑 닮은 얼굴로 제 엄마처럼 걱정이 한가득 담긴 눈빛을 하고는 못 이기는 척 아내를 끌어당긴다.


“엄마, 이만 가자. 이러다 버스 놓치겠다. 아빠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잘하시겠지. 응? 얼른 가자. 우리 공항 가서 아침도 먹어야 되잖아.”


“그래, 얼른 가. 짐은 다 챙겼지?” 괜스레 딸아이의 캐리어를 요리조리 살피며 김상봉 씨는 긴 하품을 늘어놓는다. “난 한숨 더 자야겠다. 그러고 보니 출근하던 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네.”


거실에 걸린 시곗바늘은 오전 다섯 시를 향해 맹렬히 움직이고 있다.


“우리 진짜 갈게요……. 밥 잘 챙겨 먹고.”


아내의 걱정 어린 표정을 보자, 새삼 혼자가 됐다는 사실이 와닿는 김상봉 씨.


“……집에만 있지는 말고.”


하며, 아내는 조금 슬픈 눈으로 덧붙인다.


집에만 있지 말라는 말은 혼자 남은 가장이 아니라, 나흘 전 퇴직한 전前 직장인 김상봉 씨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열흘 더 출근한 후에 퇴직해야 했지만,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본사 사정상]이라는 거창한 이유로 김상봉 씨는 퇴직을 앞당겨야 했다.


덕분에 그는 결혼한 이후로는 경험해보지 못한 계획에 없는 장기간의 독거생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쉽다……. 그치 아빠? 아빠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기쁘게도 딸은 아쉬운 티를 팍팍 내며 쓸쓸히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아빠의 팔을 살포시 감싼다. 그 한마디와 표정 한 점이 김상봉 씨는 위로한다.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이제 아빠 남는 게 시간인데. 안 그래? 이번엔 어쩔 수 없었잖아. 둘이 잘 놀다와.”


“하여간……, 이상한 회사야. 며칠 더 출근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아내의 불만에 김상봉 씨는 다시 딸에게 눈치를 보낸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자 불현듯 보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이제 진짜 가자. 아빠 졸리겠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도어락이 열린다. 각양각색의 옷이 한 보따리씩 들어있는 캐리어를 끈 모녀가(일주일이 넘는 긴 여행은 처음이라며 한사코 새로 장만했다) 현관문을 나선다.


“잘 먹고.”


재차 반복되는 아내의 걱정에 김상봉 씨는 졸지에 남편이 아니라 아들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근데 그게 그리 나쁜 것 같지 않다.


“응, 당신도 잘 먹고. 입에 잘 안 맞더라도 이것저것 많이 먹어봐.”


김상봉 씨는 모녀를 향해 손을 좌우로 흔든다.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밝은 얼굴로.


올 때 면세점에서 담배……, 라는 말이 목에 걸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다.


나중에라도 문자로 조심스럽게 청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김상봉 씨는 문득 이십여 년 전 다녀왔던 유럽 출장을 떠올린다. 그리고 황급히 말을 잇는다.


“소매치기 조심하고!”


“네. 도착하면 톡 보낼게요, 아빠.”


여행을 떠나는 두 사람의 속마음을 반영하듯 현관문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긴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김상봉 씨는 수도권 32평 아파트를 소유하고 슬하에 대학원 졸업을 앞둔 딸아이를 둔 가장에서 혼자 사는 독거남이 되어버린다.


조금은 신이 나기도, 걱정이 되기도 한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따로 신이 날 이유도 없고 걱정이 될 이유도 없지만 그랬다.


소년일 때의 어느 날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척이나 애매하면서 두루뭉술한 기분이랄까.




1. 그대의 침은 어떤 향신료보다 강렬하다.

어느덧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김상봉 씨가 거실소파를 벗어난 시간이 몇 시간이나 될 런지…….


아마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세 시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밀려드는 잠과 피로에 속절없이 쓰러지고 말았던 김상봉 씨.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면 미적미적 소파에 가 앉는다.


TV도 켜지 않은 상태로 멍하니 있다 보면 어느새 사지를 늘어뜨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곤 보다 편한 자세를 찾아 뒤척뒤척. 그렇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김상봉 씨는 다시 옅은 잠에 빠지곤 한다.


두 번째 수면에서 깨어날 적에는 조금 더 상쾌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멀끔해진 머릿속과는 달리 팔다리는 축 늘어져 힘이 없다.


소진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수면을 취했건만 수면하는 내내 여분으로 남겨둔 에너지까지 모조리 소모되는 느낌이다.


그대로 한참 동안 소파와 하나가 되었다가 리모컨을 집어 드는 것으로 김상봉 씨의 하루가 시작된다.


오래된 가죽 소파는 그가 매번 고수해 앉는 자리 부근만 움푹 꺼져있다.


소파 구석에 버려지듯 놓여있는 휴대폰이 노란 불빛을 점멸한다.


딸아이의 메시지.

휘황찬란한 어느 건물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넘긴다. 어느 멋진 건물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김상봉 씨는 아득한 표정으로 화려한 건물을 등지고 서있는 사진 속 모녀를 바라본다.


딸아이의 웃는 얼굴이야 익히 봐온 터라 별다른 느낌 없이 여전히 사랑스럽고 예쁘지만, 아내의 웃는 얼굴만큼은 새삼스럽다.


이 사람한테 이런 표정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밝고 평온한 표정이다.


아내의 기분은 잔뜩 힘을 준 옷차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자고로, 여행을 할 때에는 발이 편해야 한다며 한사코 발에 익은 오래된 운동화를 신고 간 아내는 현란한 무늬가 박힌 스카프를 멋들어지게 두르고 있다.


김상봉 씨는 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구태여 참지 않는다.


그는 ‘사진 잘 나왔네. 멋지다.’ 하고 답장을 보낸다.


한번 올라간 입꼬리는 한동안 그대로 걸려있다.


어느덧 시계는 열 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침밥을 먹는 시간이 인지할 새도 없이 뒤로 밀려나고 있다.


TV화면은 어떤 영화를 열심히 비춰주고 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모르겠다.


김상봉 씨는 볼륨을 높이고 부엌으로 향한다.


아내가 한가득 끓여주고 간 된장찌개가 슬슬 지겨워진 참이다.


사실, 찌개의 모습을 벗어난 지는 한참 되었다. 잔뜩 졸아버린 국물과 뭉개질 대로 뭉개진 건더기가 강된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입맛이라고는 전혀 돌지 않는다.


열을 가하지 않았으니 뜨겁지 않은 게 당연한 냄비에 괜히 조심스레 손을 갖다 대보는 김상봉 씨.


새빨간 법랑냄비는 차갑게 식어있다. 뚜껑을 연다. 이틀 내내 맡았던 된장냄새가 풍겨온다.


가스밸브를 열고 불을 튕긴다. 파란 불꽃이 피어오른다. 찌개를 데운다.


애호박과 감자, 두부, 팽이버섯, 양파가 냄비 바닥에 들러붙어 타지 않도록 국자로 대충 두어 번 뒤적인다.


뒤적뒤적, 하고 소리 내어 말해본다.


“뒤적일 땐 뒤적뒤적.”


단어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느낌에 김상봉 씨는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낀다.


김상봉 씨는 목소리를 입 밖에 내고서야 자신이 지독한 침묵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요한 집 안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타인의 숨소리를 듣고 싶다.


그때 TV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즐거워서 몸을 가눌 수 없다는 듯 이어지는 폭소에 김상봉 씨는 별안간 우울해진다.


자신과 무관한 웃음소리만큼이나 기운을 빼놓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별안간 피어오른 우울감에 김상봉 씨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하지만 어찌 됐든 끼니는 때워야 한다.


그는 전기밥솥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현미밥을 숟가락으로 턱― 턱― 밥그릇에 담는다.


냉장고를 연다. 냉기가 스민다. 곁들일만한 반찬을 몇 가지 꺼낸다.


매 끼니 반찬을 작은 접시에 조금씩 담아 먹으라는 아내의 당부는 잊은 지 오래다.


허기를 달래는 게 우선인 사람으로서 그런 수고까지 자처해가며 먹을 순 없다고 그는 변명한다.


익숙한 몸놀림으로 큼직한 반찬통을 열어 식탁에 올려놓는다.


이내 보글보글 소리가 들려온다. 냄비받침을 부엌식탁에 던져놓고 그 위에 냄비를 올린다.


장시간의 공복에도 식욕은 쥐뿔만큼도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김상봉 씨는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서 입에 털어 넣는다.


이내 입안을 통해 전해져 오는 건 뭐라 표현할 길 없는 아주 요상한 맛이다.


시큼한 거 같기도, 매콤한 거 같기도 한 이 신비한 맛은 뭘까?


그게 소위 말하는 쉰내라는 사실을 김상봉 씨는 뒤늦게 알아챈다.


“……에라이.”


그때서야 그는 아내의 당부가 비단 반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우친다.


찌개를 먹을 때는 국그릇에 덜어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꼭 달라붙은 그대를 차마 떼어놓을 수 없었네.

상한 된장찌개를 개수대에 버린 김상봉 씨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뒤 다시 소파로 복귀한다.


문화생활 명목으로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해주는 코미디영화를 시청해보기로 한다.


몇 번 크게 웃고 나니 영화는 다소 어이없게 끝난다. 곧바로 광고화면으로 넘어간다.


극장에서는 엔딩크레딧이 서서히 올라가며 잠시나마 여운을 즐기게 해주었지만 TV에서 방영해주는 영화에 그런 사소하지만 낭만적인 배려 같은 건 없는 모양이다.


1초라도 광고를 많이 내보내야 하는 방송사의 사정이라면 사정일 것이다.


돌연 회사 생각이 난다. 퇴직을 기념하는 행사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얌전하고 은밀하게 끝이 날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썩은 동아줄을 잘라내듯 거침없는 회사의 결정에 마치 낙오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회사 사정이라면 사정일 것이다.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김상봉 씨는 소파에서 일어난다. TV화면에서는 전화상담만 해도 최고급 냄비세트를 준다는 보험광고가 한창이다.


거실 창밖은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애매하기 그지없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애매한 건 뭐라 말하기도……, 애매하다.


김상봉 씨는 한바탕 웃은 덕인지 의욕이라는 것이 생겨났음을 인지한다.


언제까지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지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는 과감히(정말 과감한 용기가 필요했다) TV전원을 끄고 리모컨을 저만치 던져버린다.


김상봉 씨는 방금 본 영화 속 조연의 우스꽝스러운 말투를 흉내 내며 빨가벗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거울 앞에 마주 섰을 때 환청처럼 화장실 청소를 깜박했다는 아내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생전 서먹하게 지내던 화장실을 굽어 살핀다.


고놈 참……, 하얗게도 생겼다.


하얀 세면대, 하얀 변기, 하얀 벽과 하얀 바닥까지.


하얀색 일색인 화장실은 걱정과 달리 멀쩡하다. 여전히 하얀색인 것이 애꿎은 청소는 필요 없을 것 같다.


의외로 깔끔한 화장실에 김상봉 씨는 안심하며 샤워를 시작한다.


물을 틀어둔 채로 그 아래 서서 양치질을 한다. 딸아이에게는 물 낭비 말라며 지겹도록 주의를 줬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좁은 화장실은 금세 뿌연 수증기로 가득해진다. 기분 좋게 몸이 달아오른다.


이어 머리를 감기 위해 샴푸를 향해 손을 뻗는다. 샴푸는 바닥을 보인다. 샤워기는 여전히 뜨듯한 물을 콸콸 쏟아내고 있다. 몸이 불어나는 느낌이다.


언젠가 봤던 정신과의사 상담내용처럼 우울감은 수용성인 것 같다.


샤워를 마치니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상쾌하다.


김상봉 씨는 안방 서랍장에서 꺼낸 빳빳한 새 속옷과 러닝셔츠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향한다.


가장 먼저 손봐야 할 집안일. 바로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이다. 민망하고 한심한 얘기지만 고무장갑을 껴본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아마 신혼 때 몇 번, 아내가 만삭일 때 몇 번, 아내가 무사히 아이를 낳고 몸을 풀 때 몇 번.

역시 아내가 지독한 감기에 걸려 열이 40도 가까이 치솟았을 때 몇 번…….


너무나도 오래되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건지, 아니면 가까스로 떠올린 기억이 전부인 건지.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꽤나 몹쓸 남편이었다는 자책을 해가며 힘겹게 고무장갑을 착용한다.


개수대에서 올라오는 역한 음식물냄새가 가장 먼저 그를 반긴다.


초파리까지 합세해가며 어느 못난 남편이자 전 직장인의 설거지 복귀 무대를 환영하는 듯하다.


호기롭게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그릇을 집어든 순간, 김상봉 씨는 눈앞에 펼쳐진 사태를 단번에 파악한다.


‘지금은’ 설거지를 할 수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드라마가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 방송 때문에 결방된 기분이다.


김상봉 씨는 좌절한다.


다양한 종류의 설거지거리들. 이를 테면, 밥그릇, 종지, 숟가락, 젓가락, 플라스틱 컵, 유리컵, 반찬통, 양은냄비, 스테인리스 냄비 등등.


모든 곳에 음식물찌꺼기와 국물이 그대로 굳어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웬만한 수세미질로도 닦이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그는 고무장갑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싱크대 호스를 길게 빼 설거지거리 곳곳에 뜨거운 물을 뿌린다.


밥풀이 한가득 들러붙은 그릇에는 물을 가득 담아놓는다. 오후에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정수리까지 차올랐던 의욕은 삽시간에 발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그는 2리터짜리 생수를 병째로 벌컥벌컥 마신 뒤 낮잠을 청한다.




3. 내 님은 어디에.

김상봉 씨는 온수샤워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니, 시작하려했다. 전처럼 샤워기 밑에 서서 여유롭게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을 차례가 되었지만, 샴푸가…… 없다.


분명 전날 샤워를 했을 때 파악한 문제였건만. 발견한 문제를 즉각 해결하지 않은 미련함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는 짜증내지 않는다.


퇴직 전날, 김상봉 씨는 다짐했다. 스스로를 탓하거나 짜증내는 멍청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게만은 화를 내거나 짜증내지 않겠다고.


“어디 보자. 분명 어디 있을 텐데.”


당연한 소리를 제아무리 수십 번씩 지껄인다고 모습을 드러낼 샴푸가 아니다.


아직은 집안 물건보다 사무실 비품들이 눈에 익은 퇴직 8일 차 김상봉 씨의 눈에 띌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는 먼저, 아내의 화장품이 들어있는 안방 서랍장을 뒤져보기로 한다.


화장솜, 선크림, 아이크림, 미백크림, 수분크림, 핸드크림, 나이트크림, 당근크림, EGF재생크림, 달팽이크림, 립밤, 마스크팩, 스킨, 로션, 바디로션, 바디오일


……까지 모조리 나왔지만, 샴푸는 없다.


아하!


아내에게 샴푸는 화장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아내나 딸아이에게 연락해 물어보면 단박에 해결될 문제지만, 김상봉 씨는 샴푸 하나 찾지 못하는 무지한 중년 취급을 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당분간 비누로 머리를 감을까 생각해본다.


"음……. 아니야."


그건 더 미련하고 멍청한 짓처럼 보인다.


물어보면 될 걸 미련하게 비누로 감았어? 하며 질책할 게 분명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만약 나였다면 샴푸를 어디에 보관했을까.


김상봉 씨는 생각한다. 편의와 실속을 우선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화장실 근처 눈에 띄는 곳에 잔뜩 쌓아뒀겠으나 아내 성격에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가만히 서서 후보가 될법한 장소를 선정해본다.


샴푸를 옷장이나 부엌 수납장에 넣었을 리는 없고, 신발장도 아니고, 온 가족이 쓰는 샴푸를 딸아이의 방에 뒀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방은 옷과 책들로 가득 차있어 달리 둘 곳도 없을 것이다.


김상봉 씨가 거실 베란다로 향한다. 온갖 화분들을 지나 깊숙이 들어간다.


폐휴지와 분리수거가 필요한 스티로폼, 플라스틱, 유리병이 담긴 커다란 바구니가 있다.


더 안쪽에는 언제 구매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산악자전거,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보내준 쌀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까짓거 더 깊숙이 들어가보자.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창고로 쓰이는 공간이 있는데, 여행용으로 쓰이는 커다란 가방과 캐리어를 비롯한 여러 부피가 큰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지금은 반쯤 비어있다.


구석에는 두루마리휴지와 물티슈, 곽 휴지가 들어차있다. 그 위쪽으로는 김장할 때 쓰는 넓은 스텐 양푼 바구니들이 놓여있다.


샴푸는 보이지 않는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김상봉 씨는 두루마리휴지를 꺼내 화장실문 옆에 가져다둔다.


이게 뭐라고, 곳간을 두둑이 채운 것 마냥 든든하다.


다음으로는 냉장고 위, 가로로 널찍한 찬장을 열어본다.


너무 높아 식탁의자를 가져와 올라선다.


각종 티백 차와 비타민, 오메가3, 루테인 등의 영양제, 라면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처박히듯 물러나있는 <햇반>이 눈에 띈다.


4개가 가지런히 탑을 이루고 있다. 살펴보니 유통기한이 이틀 지나있다.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그는 <햇반>을 모조리 꺼내 전자레인지 옆에 가져다둔다.


역시 든든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최고급 오리털 패딩점퍼를 장만한 기분이다.


당분간은 탁월한 기술과 아이디어, 자본력의 투자로 생산된 최상의 쌀밥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냥 기쁘다.


찬장을 닫는다. 이곳에도 샴푸는 없다.


이제 마지막. 부엌과 연결된 다용도실로 간다. 이곳에도 없으면 근처 마트에 가 하나 구입하는 편이 나을성싶다.


다용도실 문을 열자 세탁기가 보이고 건너편엔 일반쓰레기로 반쯤 차있는 종량제봉투가, 안쪽 벽면에는 김치냉장고가 바쁘게 웅웅, 소리를 내며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그 위로는 벽 중간지점부터 2단으로 된 찬장이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빽빽하게 들어찬 치약과 칫솔.


근 이삼 년 정도는 치약 칫솔 걱정 없이 살아도 될 양이다.


그 옆으로 세제와 섬유유연제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아본다.


가끔 옷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던 익숙한 냄새다. 그 아래층엔 고무장갑, 종량제봉투, 린스, 비누, <샴푸>……!


드디어 샴푸가 모습을 드러낸다.


슬금슬금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만들어 보이며 김상봉 씨는 샴푸를 집어 들고 다시 화장실로 간다.


겨울철에 입던 코트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만 원짜리 지폐를 발견한 기분이다.


김상봉 씨가 화장실 거울을 마주 본다.


"……."


알몸이다.


그동안 늙고 거무추레한 몸이 창피하기도 하거니와,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체면을 지키고자 샤워를 마치면 화장실 안에서 꼬박꼬박 속옷과 잠옷까지 챙겨 입곤 했던 김상봉 씨.


그런데 빨가벗고 온 집 안을 쏘다닌 꼴이라니.


민망함과 개운함, 기이한 희열이 뒤섞인 너털웃음이 터져 나온다. 오늘은 샤워를 하기도 전에 기분이 상쾌하다.




4.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본디 인간이란 지난번의 뼈저린 실패를 잊을 수 없는 법. 하루에 한 번. 설거지를 잊지 않은 김상봉 씨.


혈압약보다 먼저 챙겨야 할 게 있다면 바로 설거지일 것이다.


설거지가 잠자던 집안일의 콧수염을 건드리기라도 한 것일까.


김상봉 씨는 잠잠하던 집이 얼마간 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공기의 감촉과 흐름이 질펀하고, 코로 스며드는 냄새는 한층 퀴퀴해진 듯한……, 집안일이라 불리는, 집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일컫는 그 단어가, 비로소 눈을 뜬 것도 같다.


홀로 당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된 건 사실이나 무엇이 됐든 그에게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 입으로 내뱉기 민망하지만, 김상봉 씨는 일을 아주 잘하는 편이다.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집안일에 정해진 순서라는 게 있을까, 김상봉 씨는 공들여 생각해본다.


"음……."


하지만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결국 가장 익숙하고 만만해 보이는 청소기를 집어 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간편하게 청소기 하나 달랑 들고 가뿐히 집안 구석구석을 누비던데…….


김상봉 씨는 거추장스럽고 기다란 코드로 모자라, 체중감량이 시급해 보이는 둔탁한 몸체까지 달려있는 청소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드륵, 드르륵, 드르르륵.


청소기의 엉덩이에서 코드를 뽑고, 뽑고, 또 뽑는다. 그런 다음, 거실 구석에 있는 콘센트에 연결한 뒤 작동시킨다.


집안을 활보하며 먼지와 머리카락을 빨아들인다.


그의 미숙한 운전 실력 탓인지 단순한 기능상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청소기 몸체는 어지간히도 딸려오지 않는다.


아예 몸통 채 들고 다니는 게 무겁긴 해도 한결 편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우친다.


그렇게 무사히 안방과 딸아이 방청소를 마친 김상봉 씨는 부엌으로 이동하려 하지만……, 코드가 더 이상 몸을 늘리지 못한다.


세 식구가 살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크기의 집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런 식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될 줄이야.


그는 별 수 없이 거실의 코드를 뽑아 부엌과 접해있는 방 콘센트에 다시 연결한다.


그때 방에 있는 문어발코드, 즉 멀티콘센트를 발견한다.


아하.


머릿속 전구가 번쩍번쩍.


인류의 위대한 발명에 김상봉 씨는 새삼 감동한다.


그러고 보니 청소기가 놓여있던 자리 옆에도 이와 비슷하게 생긴 멀티콘센트가 있었던 것 같다.


다음 청소부터는 조금 편해지겠다고 좋아라하며 그는 청소를 마무리한다.


어차피 사흘이나 나흘 뒤에 다시 청소기를 사용해야 할 텐데, 하고 혼잣말을 하며 청소기를 거실 구석에 두는 게 어떤지 사뭇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대단히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켄 블랜차드 외 3명의 저자가 실컷 떠들어댔지만, 며칠 전 퇴직한 대한민국의 김상봉 씨까지 춤추게 할 재간은 없어 보인다.


그는 다시 청소기를 들어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청소기가 있던 자리 옆에는 밀대걸레가 있다.


오호라.


김상봉 씨는 싱크대에서 걸레를 빤다. 있는 힘껏 짜서 물기를 제거한다. 밀대에 부착한다. 찍찍이로 되어 있는 게 제법 편리하다.


밀대가 지나가는 자리는 커다란 붓으로 색칠이라도 하는 것처럼 짙은 고동색으로 변해간다.


서랍장과 침대 밑, 소파 밑까지 꼼꼼히 닦는다. 청소기를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걸레에는 먼지들이 사정없이 묻어 나온다.


청소기를 좋아하는 먼지, 걸레를 좋아하는 먼지가 따로 있기라도 한 걸까. 김상봉 씨는 중얼거린다.


밀대걸레 다음엔 손걸레 차례다. 그간 아내가 해왔던 집안일을 은연중에 눈여겨보고 있었는지, 다음 순서를 떠올리는 게 어렵지는 않다.


손걸레로 가구들을 닦아준다. 소파, TV, 화장대, 침대머리, 책상, 책꽂이 등등.


불과 며칠 전까지 아내가 빈틈없이 닦았을 자리지만 먼지는 김상봉 씨가 서운해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나온다.


걸레질까지 마치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김상봉 씨가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한다.


거실 베란다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빨래건조대가 눈에 띈다.


냉큼 건조대를 들어 거실 한가운데에 옮겨놓는다. 차곡차곡 널어진 빨래는 바짝 말라있다.


몇몇 옷들은 너무 바싹 마른 나머지, 접힌 상태 그대로 모양이 잡혀있다. 먼저 건조대의 빨래거리를 모조리 걷어 거실 바닥에 늘여놓는다.


고작 3인 가족이 사는데 왜 이렇게나 수건이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수건을 접고(화장실수납장을 열어 우리 집 수건이 어떻게 접혀있나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상의와 하의를 접고, 또 수건을 접고, 속옷을 접고, 양말을 접는다.


……양말. 그놈의 양말이 문제다.


뭔 놈의 양말은 죄다 뒤집어져 있는 건지. 원상태로 일일이 뒤집는 게 어지간히도 귀찮다.


무심코 벗어던진 양말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귀찮게 하다니. 김상봉 씨는 아내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척, 척, 척.


그는 세탁물을 개는 기계로 다시 태어난다.


척, 척, 척.


군대에서 했던 경험이 되살아나 손쉽게 정리를 이어가다가도, 아내와 딸아이의 것이 나오면 멈칫한다.


당최 어떤 식으로 정리를 해야 옷장에 말끔하게 들어갈지 파악할 수 없다.


"음……."


결국 두 여인의 속옷과 옷들은 대충 접어 안방 화장대 위에 살포시 올려둔다.


정리를 마치자 거실바닥에는 다시 먼지가 흘러 다니기 시작한다. 밀대걸레를 이용해 먼지를 훔쳐낸다.


텅 빈 빨래건조대.


이제 빨랫감을 널어볼까?


……어림도 없는 소리.


당연한 소리지만 빨래를 널기 위해서는…… 먼저 빨래를 해야 한다.


"이런, 상사에게 지적당하기 딱 좋은 일처리방식이군." 김상봉 씨는 헛웃음을 흘린다.


그는 빨래바구니에 있던 것들을 모조리 꺼내 세탁기에 넣는다.


아내가 몇 번이고 일러준 순서대로 세탁기와 연결된 수도꼭지를 열고 세탁기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주말에 익히 듣던 기계음이 들린다. 큼직하고 동그란 동작 버튼을 꾹.


일직선으로 늘어진 갖가지 버튼에 순서대로 파란불이 들어온다. 온도 버튼을 다시 꾹 꾹 꾹. 몇 차례 눌러 80도로 설정된 것을 냉수로 바꾼다.


덜컹, 소리와 함께 드럼통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왼쪽 상단의 손잡이를 당기자 깊숙이 박혀있는 기다란 통이 딸려 나온다.


세제를 넣는 곳이다. 아내가 소리치며 몇 번이나 강조한 대로, 찔끔 넣는다.


일전에 샴푸를 찾다 우연찮게 봐뒀던 섬유유연제도 꺼내 마찬가지로 찔끔, 떨어트린다.


세탁기는 부지런히 몸을 돌려가며 철썩철썩, 들썩, 쿵쿵쿵, 요란한 소리를 낸다.


김상봉 씨는 그 모습을 얼마간 지켜본다. 왠지 세탁기 앞을 떠나면 세탁기가 일을 대충 할 것만 같다.


그렇게 십분 가량을 쭈그리고 앉아 빙빙 돌아가는 드럼통을 들여다보던 김상봉 씨는 다리가 저려 세탁기를 일별하고 식탁의자에 앉아 냉수를 마신다.


부엌 다용도실에서는 여전히 컥컥컥, 쿵덩쿵덩, 하는 소리가 세차게 들려온다.


그는 주말마다 볼 수 있었던 광경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한 자세로 무심코 부엌을 내다볼 때면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던 아내의 모습.


김상봉 씨는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닫는다. 힘에 부쳤다. 겨드랑이에는 이미 땀이 한가득 들어차있고 이마에도 땀이 맺혀있다.


아직 저녁준비도 못 했는데……. 역시나 아내가 곧잘 하던 혼잣말이 돌연 튀어나온다.


무심코 뱉은 말이라고 모두 가벼운 것을 담아낸 말이 아니듯, 아내가 버릇처럼 내뱉는 줄 알았던 문장이 이렇게까지 깊은 고민을 요하는 것인지 김상봉 씨는 그간 알지 못했다.


저녁은 또 무엇으로 배를 채워야 할지 알 길이 없다. 라면은 지겹고 그렇다고 시켜 먹자니 돈이 아깝다.


제대로 된 국이나 찌개를 해 먹을 재주 또한 없다.


문득 아내의 메뉴 고안 방법이 궁금해진다. 어떻게 그리 오랜 세월 동안 누구 하나 불만가지지 않을 정도의 다양한 식사를 차려왔던 걸까.


저녁 메뉴 고민은 나중에 마저 하기로 한다.


김상봉 씨는 노곤한 몸을 이끌고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TV 앞이다.


이 집에서 할 거라고는 TV시청뿐이라는 게 비참하면서도 우습다.


골프채널, 홈쇼핑, 예능프로, 뉴스, 드라마, 영화를 돌고 돌다 보니 세탁이 다됐다는 경쾌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는 배달음식이 왔다는 초인종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신이 나서 부엌을 가로질러간다.


세탁기 뚜껑을 여니 기분 좋은 섬유유연제 향이 풍긴다. 축축한 빨래를 품듯 가져다 거실 바닥에 던져놓는다.


문득 아내가 거실 한복판에서 곁눈질로 TV를 보며 빨래를 너는 모습이 잔상처럼 피어오른다.


거실과 세탁기를 세 번 오고 갈 만큼 빨래양이 많다. 건조대가 넘어가지 않도록 양쪽 무게를 신경써가며 빨래를 넌다.


절반 정도 널고서야, 손에 집히는 족족 마구잡이로 널 게 아니라 수건은 수건끼리 양말은 양말끼리 속옷은 속옷끼리 널어야 나중에 빨래를 갤 때 편리할 거라는 생각에 이른다.


젖은 빨래로 가득해진 건조대를 볕이 잘 드는 곳에 둔다.


내일이나 모레 다시 빨래를 걷을 생각에 순간 아찔해진다. 사실 문제는 빨래만이 아니다.


이 집에 누군가 생활을 하는 한, 설사 아무도 살지 않는다 해도 계속해서 먼지는 쌓여간다.


또한 사람은 먹어야 생활할 수 있으므로 싱크대에 설거지거리는 하염없이 쌓여갈 것이다. 그럼 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고무장갑을 낀 채로 설거지를…….


김상봉 씨는 저녁은 대충 시켜 먹기로 한다.




4. 그 사람을 만나거든 전해주세요. 사랑한다고.

김상봉 씨는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는 마트로 향한다.


쟁여둔 냉동식품이 바닥났기 때문에 서둘러 장을 봐야한다.


몇 달 전, 비가 오던 날 우산을 들고 아내를 데리러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찾아간다.


평일 오전의 마트는 더없이 한산하다. 손님보다 일하는 점원이 더 많은 지경이다.


입구에 비치된 장바구니를 들고 매장에 들어선다.


어머나, 저기 좀 봐. 이 시간에 웬 남자가 있네? 회사는 안 가나? 짤렸나? 하는 수군거림은……, 당연히 없다.


서늘한 에어컨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청과코너를 지나는데 김상봉 씨는 그간 과일 하나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내가 곱게 깎아 앞 접시에 덜어주는 과일이 문득 그립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과일을 내어오던 아내의 세심한 배려가 내심 고맙다.


청과 코너에는 정말이지 별의별 과일들이 있었지만 그의 손길을 끄는 과일은 없다.


맛있게 생긴 과일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쌌고, 만만한 가격대의 과일들은 무사히 과육을 영접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과일 껍질을 말끔히 깎기도 전에 손가락이 잘려나갈까 무섭다.


결국 김상봉 씨가 집어든 과일은 가장 저렴하고, 무엇보다 안전한, 바나나다.


그는 유제품 코너를 지나 해산물 코너로 걸음을 옮긴다.


서른이나 됐을까 싶을 정도로 앳된 청년이 좌중 앞에서 연설하듯 우렁차게 손님을 끌어 모은다.


그 앞을 지나가자 청년은 기다렸단 듯이 “자, 자, 사장님, 점심엔 자반고등어 어떠세요? 그냥 이대로 가져가셔서 굽기만 하면 되는데!” 한다.


생선은 애초부터 넘볼 수 없는 상대인지라 김상봉 씨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대로 지나친다.


이어 육류 코너까지 지나고서야 그가 찾고 있던 즉석식품 코너에 도달한다.


가장 먼저 즉석 밥 진열대에 눈길이 간다.


다양한 브랜드와 가격대의 즉석 밥들이 위용을 떨치며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김상봉 씨가 흔히 먹던 하얀 쌀밥뿐 아니라 현미, 흑미와 같은 잡곡밥도 있다.


"오호……."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는 습관처럼 가장 가격이 저렴한 상품으로 사려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명관은 명관이고, 명관은 실수를 하지 않는 법이니, 가장 익숙한 <햇반>으로 골라 카트에 담는다.


다음은 라면이다. 라면 또한 눈이 아플 정도로 종류가 넘쳐난다.


맘 같아서는 하나하나 맛보고 싶었지만 김상봉 씨는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괜스레 걱정이 되어 라면 역시 가장 익숙한 것으로 산다.


1차 목표는 무사히 달성한 김상봉 씨가 카트를 내려다본다.


이것들만 먹어도 남은 날들을 충분히 버틸 수 있지만 썩 건강한 생활은 아닐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든다.


얼큰한 찌개나 국이 먹고 싶다. 아내가 끓여준 찌개가 상한 이후, 먹은 국물이라곤 라면 국물이 전부다.


무심코 모퉁이를 돌자, 김상봉 씨의 소박한 니즈를 단번에 충족시켜줄만한 장관이 펼쳐진다.


전복죽, 김치낙지죽, 단호박죽, 소고기죽, 녹두닭죽, 버섯야채죽, 소고기미역국, 두부김치찌개, 돼지고기김치찌개, 소고기뭇국, 순댓국, 콩나물황태국, 추어탕, 육개장, 차돌된장찌개, 사골곰탕, 닭곰탕, 설렁탕, 삼계탕……


……까지.


온갖 종류의 죽과 찌개가 단일포장 되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김상봉 씨는 기쁜 마음으로 제품의 상표를 확인한다.


<비비고>? 이거 만두 만드는 회사 아니었나? 이건 또 뭐야.


그는 시선을 돌린다. 그 옆에는,


소고기꽈리고추장조림, 소고기장조림, 고등어시래기조림, 코다리무조림, 꽁치김치조림, 무말랭이무침, 오징어채볶음……


……과 같은 각양각색의 반찬들을 판매하고 있다. 역시 <비비고>가 만든 것이다.


선뜻 카트에 담기에는 제법 가격이 있었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새로운 반찬을 먹을 생각에 신난 김상봉 씨는 입맛을 다시며 카트에 담는다.




5. 배배 꼬인 건 헤어드라이기 전선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네.

독거생활을 이어간 지 열흘쯤 지나고부터 김상봉 씨는 급격히 외로워하기 시작한다.


평생의 동반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TV는 어느새 시끄러운 소리만 빽빽 질러대는(그럼에도 집안이 적적한 건 더 싫어 종일 켜놓는다) 같이 지내기 피곤한 친구로 전락해버린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몸에 붙어 한시도 떨어질 생각을 않던 피로는 어느샌가 증발해버렸다.


그렇다고 퍼질러 잠만 자며 외로움을 달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퇴직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쯤에는 분명히 뭔가를 하겠다고 열심히 다짐했던 것도 같은데,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침울한 김상봉 씨.


한동안 마트에서 사 온 여러 가지 즉석식품을 맛보느라 신이 있는 대로 났었지만 그마저도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특별한 신체활동이라고는 없으니 식욕이 돋을 리 만무하다.


좀이 쑤셔 어젯밤에는 집 앞 공원에 나가 산책을 했다.


시원한 밤공기는 우울한 기분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으나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울한 상태로 돌아오기 일쑤다.


기운 없는 김상봉 씨.


언젠가부터 날마다 보내오던 딸아이의 사진도 소식이 끊겼다.


김상봉 씨는 여행은 잘하고 있는지 모녀에게 먼저 연락이라도 해볼까, 하다가 그냥 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주 조금, 진짜 아주 조금, 질투가 난다. 급기야 혼자 두고 여행을 떠난 두 모녀가 마냥 밉다.


하릴없이 집 안을 서성이던 김상봉 씨가 딸아이의 방으로 간다.


틈틈이 청소를 한 덕에 책상은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다.


책상 위에 한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각종 대학교재와 필기도구들을 살핀다.


괜스레 울적해진다.


뒤돌아 방을 나오려다 조그마한 쓰레기통 옆 콘센트에 꽂혀있는 헤어드라이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콘센트를 뽑아 정리한다.


헌데, 전선이 마구잡이로 꼬여있어 갈무리할 수 없다.


하는 수없이 김상봉 씨는 배배 꼬인 전선의 끝을 잡고 차근차근 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전선을 풀고 나서야 헤어드라이기의 몸통에 전선을 빙그르르 감아 한쪽에 둔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 잔뜩 성나 있던 감정이 사그라든다.




6. 달걀껍질은 일반쓰레기입니다.

부엌에만 가도 구역질나는 악취가 기승을 부린다.


부엌 다용도실에 있는 음식물쓰레기통이 그 근원지이다.


순조롭게 가을로 향해가던 날씨는 급제동한 탓이다. 한낮의 날씨는 여름과 다를 바가 없다.


음식물쓰레기 냄새는 삽시간에 퍼져간다. 김상봉 씨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재료를 손질해가며 특별한 요리를 한 것도 아닌데 음식물쓰레기가 이렇게까지 쌓이다니.


냄새와 더불어 극성인 초파리 때문에라도 서둘러 처리해야 한다.


김상봉 씨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내의 행동을 곱씹어본다. 평소에 어떤 식으로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했을까.


그러고 보면, 여태 집안에서 이처럼 역한 냄새가 풍겼던 적은 없었던 같다.


이제는 물건들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다용도실에서 비닐봉투를 찾는 것쯤은 거뜬하다.


그는 고무장갑을 낀 채 숨을 꾹 참으며 개수대에 가득한 음식물쓰레기까지 비닐봉투에 탈탈 털어 넣는다.


혹여 무게 때문에 찢어지지 않을까 겁이 난 것도 사실이지만 봉투를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그리곤 단숨에 봉투의 입구를 오므린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김상봉 씨는 그대로 봉투를 들고 집을 나선다.


마음을 집어먹은 김에 처리하는 게 속 편할 것 같다. 집을 나선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엘리베이터에는 아내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중년 주부가 타고 있다. 김상봉 씨의 기억이 맞다면 단지 내에 부녀회장인가 뭔가 하는 직책을 맡고 있을 것이다.


보글대는 파마머리에 쭉 찢어져 올라간 눈꼬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날카로운 인상을 풍긴다.


김상봉 씨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나란히 선다.


“네에, 안녕하세요.”


부녀회장이 온화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는다. 그때 그녀는 김상봉 씨의 손에 들린 봉투를 흘긋 굽어본다.


타인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일으킬만한 음식물쓰레기를 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색 봉투에 담아온 자신의 배려심 없는 행동에 그는 한없이 민망해진다.


김상봉 씨는 민망함에 봉투를 왼손으로 바꿔든다. 몸이 부녀회장의 시선을 가로막아 봉투 속 내용물을 가려주길 바란다.


엘리베이터가 서둘러 1층으로 데려다주길 기다린다.


기대와는 달리 부녀회장은 기다렸단 듯이 입을 연다.


“그거, 안 되는데요.”


“……예, 예? 뭐가…….” 하고 김상봉 씨가 답한다.


부녀회장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가 들고 있는 투명한 봉투를 가리킨다.


“그거, 지금 음식물쓰레기 버리러 가시는 거 아니에요?”


“네, 맞는데요……. 근데 뭐가 안 된다는……?”


“봉투 이리 줘보세요.”


그의 손에 들려있던 봉투를 뺏듯이 잡아챈 부녀회장은 까만 매니큐어가 칠해진 검지로 봉투 겉면을 요리조리 찔러대며 이어 말한다.


“여기 보면, 달걀껍질이 있잖아요. 그것도 엄청 많이. 달걀을 좋아하시나 보네. 어찌됐든, 달걀껍질은 일반쓰레기에요. 그러니까, 음식물쓰레기랑 같이 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김상봉 씨로서는 생전 처음 듣는 얘기다.


“……예? 정말요?”


“그럼 정말이죠.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하여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니까. 제가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단지 내에 쓰레기 하나 제대로 못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에휴, 정말……. 사람들이 왜 그러나 몰라.”


여봐란듯이 부녀회장은 한숨을 푹푹 내쉰다. 김상봉 씨는 얼굴에 화악, 열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다. 초등학생 시절 반 친구들 앞에서 미처 못 외운 구구단을 버벅대며 외는 것처럼.


“저, 그럼……, 이건 어떡하죠? ……다시 분류하고 버려야 할까요? 아이구, 죄송합니다. 제가 음식물쓰레기는 처음 버리는 거라 실수를 했네요.”


김상봉 씨는 습관적으로 사과부터 하고 본다. 왜 지금 이 여자에게 사과를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죄송하다는 말이 입에 붙은지라 어쩔 수 없다.


저자세로 나오는 사람에게 더 이상 지적하기가 민망했는지 부녀회장은 안쓰럽다는 얼굴을 짓는다.


“그걸 뭘 다시 분류해요. 됐어요. 그냥 버리세요. 그래도 이번 기회에 꼭 알아두세요. 쓰레기 잘 구분하셔야 돼요.”


엘리베이터는 부지런히 몸을 가라앉혀 1층에 도착한다.


부녀회장은 문을 나서면서 지나가는 어투로 덧붙인다.


“보아하니 이제 회사도 안 나가시는 거 같은데, 편히 집에서 쉬던가 하세요. 집안일도 엄연히 일인지라, 그간 해온 사람이 더 잘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곤 아파트현관을 나서는 부녀회장을 보며 김상봉 씨는 기이한 상실감을 느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멍청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열림 버튼을 누른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은 메슥메슥한 냄새로 가득하다.





저녁 생각이 없어 굶었더니 밤늦게 허기가 진다.


김상봉 씨는 TV를 보다 말고 냉장고를 열어 구석에 가득한 달걀을 꺼내든다. 가스밸브를 연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불을 튕긴다. 팬이 달궈지기를 기다렸다가 호기롭게 달걀을 깨뜨려 달걀프라이를 한다.


입에 털어 넣듯이 해치워먹고 사용한 접시를 싱크대에 넣는다. 접시에 잔뜩 묻은 노른자가 굳지 않도록 물을 뿌려놓는 걸 잊지 않는다.


텅 빈 배수구에는 반으로 쪼개어있는 달걀 껍질이 있다. 습관처럼 음식물 배수구에 던져 넣은 것이다.


그는 배수구에 손을 집어넣어 껍데기를 꺼낸 다음, 일반쓰레기를 버리는 종량제봉투에 넣는다.


“……이러면, 되는 건가?”


내일 점심 전에 아내와 딸아이가 돌아올 것이다.


늦지 않게 화장실 청소를 해야겠다고, 화장실 청소는 어떻게 하는 건지 인터넷에 검색이라도 해봐야겠다고, 김상봉 씨는 다짐한다.


어서 가족들이 돌아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