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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인 Sep 01. 2024

[단편 소설] 맏이, 받이

받아내다 

                         

 그가 처음 받아낸 것은 동생의 도둑질이었다.


 그날은 12살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그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방학을 싫어했다. 방학은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는 놀지 못했다.


 매미 우는 소리가 쩌렁쩌렁 온 동네에 울려 퍼질 때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온 지구를 돌아다니며 선물 공세를 펼칠 때에도 그는 동생 옆에만 꼭 붙어있어야 했다.


 그에게는 6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그는 동생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


 또 그의 엄마가 해준 말을 그대로 하자면, 그는 동생의 삼촌이자 할머니 할아버지였고, 엄마 아빠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당연히 형이었다.


 “석이가 형이니까, 항상 옆에 있어줘야겠지? 훈이 옆에는 항상 형아가 있는 거야. 그치? 지우 옆에 피카츄가 꼭 붙어있는 것처럼.”


 방학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이른 저녁, 엄마는 석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석의 마음은 살짝 출렁거렸다.


 사실, 그는 피카츄 말고 지우가 하고 싶었다. 여기저기 모험을 떠나며 새로운 포켓몬을 잡으러 다니는.


 형이 아니고 삼촌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면, 엄마 아빠면 항상 옆에 붙어있지 않아도 되는 걸까?


 석은 속으로 그렇게 질문했다.


 삼촌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엄마도, 아빠도, 그중 아무도 자신처럼 동생 옆에 찰싹 붙어있지는 않았으니까.


 형이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걸.


 가끔 그런 생각을 품곤 했다. 나아가 훈이의 친구이기만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도 많았다.


 그러면 기분이 좋았다. 한결 나았다.


 그는 분명 엄마가 공인한 동생의 하나뿐인 친구이기는 했지만, 친구처럼 함께 놀 수는 없었다.


 축구도, 정글짐도, 유희왕 카드도 못했다.


 동생은 할 수 없는 게 많았다.


 운동장에 나가 달리지도 못했고, 놀이터에서 그네도 못 탔고, 탈출놀이도 못했다.


 그가 보기에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엄마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동생은 내가 더 잘 아는데, 엄마는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는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할 수 없이 그는 동생과 종이접기를 하고, 찰흙놀이를 했다. 가끔 역할놀이도 했다.


 장소는 매번 바뀌었다.

 거실이었다가 안방이었다가 놀이방이었다가 화장실이었다.

 어쨌든 항상 집이었다.


 반면, 엄마는 매일 밖에 있었다. 엄마는 바빴다.


 아침 일찍 회사에 갔고, 밤늦게 집에 왔다.


 회사에 살고 집에는 가끔씩 오는 사람 같았다.


 엄마는 아빠 역할까지 해야 했다. 그래서 더 바빴다.


 그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건 다른 것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정리해보자면, 엄마는 아빠가 됐고, 그는 엄마가 됐다.

 동생 훈이는 언제나 훈이었다.


 엄마는 아빠 역할을 꽤 잘 해내는 것 같았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는 것을 보면 그랬다.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 주말에까지 일을 시키는 바보 같은 사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엄마 역할을 그리 잘하는 것 같지 않았다.


 설거지한 밥그릇에는 언제 옮겨갔는지 밥풀이 하나씩은 꼭 붙어있었다.


 밥이 다 떨어진 텅 빈 전기밥솥은 전기코드가 연결된 채로 하루 종일 윙윙 돌아갔으며, 제집을 잘못 찾아간 플라스틱과 유리병과 스티로폼과 캔은 결국 엄마의 손을 한 번 더 거쳐야만 제자리를 찾았다.


 엄마 역할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동생 훈이는 말이 없었다.


 엉엉 목 놓아 울었던 적도, 그렇다고 배꼽이 빠져라 깔깔깔 웃었던 적도 없었다.


 훈이는 한결같이 무심한 표정의 아이였다.


 엄마 아빠는 그런 막내를 순하다며 예뻐했다.


 어려서부터 왁자지껄 온 집안을 휩쓸고 다니던 첫째와는 어쩜 이리 다르냐며 좋아라했다.


 어른들은 원래 얌전한 애를 좋아한다.


 하지만 훈이는 말이 없는 아이가 아니라 말을 어려워하는 아이였고, 차분하고 얌전한 아이가 아니라 감정표현을 할 줄 모르는 서툰 아이였다.


 병원에 다녀온 날 저녁, 엄마는 부엌 식탁의자에 앉아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훌쩍훌쩍 울었다.


 아빠는 정신을 병원에 놓고 온 것처럼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훈이는 헤죽헤죽 아이답게 웃었다.


 석은 그런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각자 다른 얼굴을 짓고 있었다.


 보통의 가족이었다면 그려지지 않았을 기괴한 광경이었다.


 조용한 훈이의 영향 때문일까. 날이 갈수록 집이 고요해졌다.


 엄마와 아빠는 더 이상 서로를 마주 보고 앉지 않았다. 감정을 섞어 대화하지 않았다.


 그저 사실과 현상과 정보를 전달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들을 기획하고 관제하고 처리해야 하는 특명을 임명받은 사람들처럼 간략하게 묻고 간략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언제나 바빴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했다.


 훈이는 그 사이에 껴서 아주 가끔 울고 웃고, 대개는 무표정한 아이로 자랐다.


 석은 그게 너무도 신기했다.


 같은 뱃속에서, 같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는데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나는 여섯 살 때 두부 심부름도 하고 친구네 집에 가서 컴퓨터 게임도 하고 놀이터에서 손바닥과 무릎이 다 까져라 뛰어놀았는데…….


 “석아, 아빠랑 같이 갈래?”


 어느 날 출근 전, 아빠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엄마는 훈이와 병원에 간 뒤였고, 석은 방 침대에 고여 있는 온화한 햇살에 등을 달구며 잠에 취해있었다.


 “……회사를 어떻게 같이 가요?”


 졸음 가득한 석의 목소리에 아빠는 말없이 긴 한숨으로 대답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오묘한 표정이었다.


 “응, 아니야. 석아, 아빠 이만 갈게? 밥 잘 챙겨 먹고, 아들.”


 석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의 외출이 길어짐에 따라 엄마는 석에게 더욱더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동생 훈이에게 할 말까지 석에게 했다.


 서둘러 자랄 것을 강요했다.


 당시 석은 11살이었고, 느리지만 착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럼에도 엄마 눈에는 한없이 더디게만 보였던 모양이다.


 엄마는 또 하나의 아들이 아니라, 막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보호자를 필요로 했다.


 남들은 훈이를 아픈 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만큼은 다르게 말했다.


 엄마는 훈이를 느린 아이라고 했다.


 그래서 조금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관심과 시간만 있으면 훈이는 언제든 다른 사람처럼 될 수 있다고 했다.


 아픈 것은 주위 사람들까지 병들게 할 수 있지만, 느린 건 그저 답답할 뿐이라고.


 엄마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아침을 제외하고 형제는 스스로 끼니를 챙겨야했다.


 그날의 메뉴는 엄마가 출근 전 식탁 위에 놓고 가는 지폐의 액수에 따라 달라졌다.


 그 돈으로 점심과 저녁을 해결했다.


 화폐의 가치를 막 깨우친 석은 자고 일어나면 가장 먼저 식탁 위의 돈을 확인했다.


 짙은 고동색 나무로 만들어진 식탁 위에는 항상 빳빳한 지폐가 예의를 갖추기라도 한 것처럼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보통은 만 원짜리 한두 장이었지만, 아주 가끔씩 천 원짜리 서너 장만 초라하게 올라가 있을 때도 있었다.


 그날도 바로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여름방학의 한가운데에 있는 초등학생답게 석은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 식탁 위를 확인해봤다.


 “……”


 그는 지폐를 고이 접어 목걸이지갑에 넣었다.


 오늘의 예산, 삼천 원.


 자고 있던 동생을 깨워 점심을 먹으러 갔다.


 자주 가던 김밥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석은 동생에게 하소연을 늘어놨다.


 치킨이 먹고 싶네, 피자가 먹고 싶네, 짜장면이 먹고 싶네, 하면서 부족한 식비에 대한 불만을 털어놨지만, 동생 훈이는 여느 때처럼 군말 없이 형의 뒤만 졸졸 따랐다.


 일은 김밥을 한 줄씩 사 먹고 나오는 길에 터졌다.


 어린 형제는 내일 또 와, 라는 김밥집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길을 빙 돌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동생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하도 만지작거리기에 석이 물었다.


 “간지러워? 왜 자꾸 만져?”


 동생은 형의 물음에 잠시간 놀란 듯 보이더니 이내 해맑게 웃으며 느릿느릿 문장을 내뱉었다.


 “혀엉, 배고프지 않아?”


 “배고프지. 집 가서 시리얼이나 먹자.”


 집에 먹을 거라고는 엄마가 출근 전에 먹은 시리얼, 그리고 찬장에 있는 라면이 전부였다.


 “혀엉, 짜장면, 먹으러 가자. 엄마 아빠랑 갔던 곳.”


 동생은 왠지 조금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 자주 볼 수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짜장면은 김밥보다 훨씬 비싸다고 석이 말했다.


 그러자 훈이는 예전에 엄마한테 받은 용돈이 있다고 했다.


 용돈이 있다고?


 석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얼마 있는데?”


 동생의 바지 주머니에서는 꼬깃꼬깃한 만 원 지폐가 나왔다.


 돈을 보자 석은 당연히 좋다고 했고, 형제는 가족이 온전했을 때 가곤 했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그릇을 깨끗이 비우진 못했지만 저녁을 안 먹어도 될 만큼 양껏 먹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짜장면이 가져다준 기분 좋은 포만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엄마가 식탁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벌써 밤이 됐나 시계를 보려고 했지만, 구태여 볼 필요도 없었다. 아직 밖이 쨍쨍했다. 오후 5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엄마? 오늘은 야근 안 해?”


 석은 낮 시간에 보는 엄마가 더없이 반가웠다. 그래서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엄마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첫째 아들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 말하며 식탁에 와 곧장 앉으라고 지시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읽어낸 석은 대꾸 없이 그렇게 했다. 곧 동생도 불려나와 나란히 앉았다.


 “왜 그랬니? 그렇게 짜장면이 먹고 싶었어?” 라고 묻는 엄마의 말에 석은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질문에 두 가지 물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짜장면이 먹고 싶었냐는 질문에는 네, 라고 대답하면 될 일이지만, 왜 그랬냐는 질문에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멀뚱히 앉아있는 석을 대신해 대답은 훈이에게서 나왔다. 시름시름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혀, 형이 그랬, 어요. 형이 먼저 먹자고, 했어요.”


 훈이의 대답에 엄마의 매몰찬 시선이 석에게 쏟아졌다.


 “김영석, 대답해봐. 동생 말이 맞아? 영석이 네가 먹자고 했어? 김밥집에서 훔친 돈으로 짜장면 먹으러 가자고 한 거야? 왜, 돈이 그렇게 부족했니?”


 이번엔 질문이 4개로 늘어났다.


 석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침묵은 엄마의 늘어난 질문처럼 길어졌다.


 “전 몰랐어요. 그냥 형이 돈 생겼으니까 짜장면 먹으러 가자고 해서 따라 간 거예요.”


 이번에도 대답은 동생이 했다. 입술이 비죽 튀어나온 것이 당장 얼굴을 찌그러트려 울음을 터트릴 기세였다.


 “괜찮아, 훈아.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무릎을 꿇고 훈이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네 잘못 아니야.”


 막내를 위로하면서도 엄마의 시선은 첫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질책과 아유와 분노와 실망 등등. 여러 가지가 담겨있었지만 그중에 위로는 없었다.


 “……”


 석은 싸늘한 불을 뿜는 엄마의 두 눈을 마주했다. 어떤 말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동생을 대신해 돈을 훔친 도둑이 되었다.


 동생을 대신해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듣고 대나무 회초리로 매를 맞았다.


 동생을 대신해 김밥집 아주머니께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 동생 대신 반성문까지 써 보이는 정성 어린 반성을 했다.


 훈이는 아프니까.

 훈이의 형이니까.


 그 일련의 일들을 겪는 내내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수없이 많은 방학을 흘려보내고 석은 법적 성인이 되었다.


 훈이는 여전히 그의 동생이었다.


 동생의 몸은 하염없이 커갔지만, 뇌는 그대로였다.


 가족 중 유일하게 엄마만이 작아지고 약해졌다.


 대학에 입학한 석은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집에 있을 때는 동생 생각만 해야 했는데, 밖에 나와 사니 스스로의 몸만 건사하면 되었다.

 그게 좋았다.


 처음으로 경험한 자유였다.


 의무적으로 주고받는 엄마와의 안부전화는 매번 예의 바른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가끔은 사이좋은 모녀지간처럼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주고받을 때도 있었지만, 뒤돌아보면 공허한 한담에 불과했다.


 동시에 언제든 짐을 싸서 집으로 들어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노심초사했다.


 그는 방학 시즌이 다가오면 더없이 초조해졌다. 더군다나 대학생의 방학은 터무니없이 길었다.


 그러나 기우였는지 엄마는 별다른 호출을 하지 않았다.


 결국 석은 방학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멀다는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친구의 자취방에서 같이 생활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동생이 형을 보고 싶어 한다며 집에 오랜만에 들르라는 엄마의 연락에는 공부 핑계가 제격이었다. 그렇게 싫어하던 방학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고 긴 방학을 보내고 나면 다시 정신없이 바쁜 학기가 시작됐다.


 그런 식으로 두 번의 방학을 흘려보내고 이번에는 군대로, 전역 후에는 학교 근처 원룸으로.


 그는 우주의 절대적인 법칙 아래 어긋난 궤도를 가진 행성이라도 된 듯 집을 거부했다.

    

 다시 몇 번의 방학이 흘렀다. 석은 회사원이 되었다.


 자취방을 구하지 않으면 출퇴근이 불가할 만큼 먼 거리에 있는 직장이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 대학생 시절 습관처럼 내뱉었던 바쁘다는 그의 핑계는 진짜가 되었다.


 그래도 장남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한 것인지, 대학생 때와는 달리 안부 전화도 자주하고 주기적으로 본가에 가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엄마와 동생 앞에서 예전보다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먹고 더 자주 웃었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어쩐지 예전만큼은 괴롭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퇴근 후, 그는 채 과장과 술자리를 가졌다.


 매주 금요일이면 돌아오는 행사 같은 것이었다.


 멤버는 매번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와 채 과장은 고정이었다.


 태생적으로 술이 몸에 받지 않는 석은 채 과장의 운전기사 노릇을 해야 했다.


 채 과장은 신기할 정도로 일상생활에 욕설을 섞어 쓰는 상사였는데, 그 욕설의 수위나 단어 선택, 억양 같은 것이 퍽 쾌활해서 그리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모든 술자리가 파하고 석은 운전석에 올랐다. 술 냄새가 고이지 않도록 창문을 열고 운전을 이어갔다.


 도로가 정체될 구간이 아닌데 비이상적으로 차가 몰려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이 음주단속을 위해 차량 유입을 통제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디야?”


 조수석에서 졸고 있던 채 과장이 불쑥 말했다.


 “주무세요.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너 이 새끼, 나 재우고 뭐하려고?”


 “제가 뭘 합니까.”


 석은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차를 천천히 이동시켰다.


 그의 말에 채 과장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 대신 운전해야지. 하긴 뭘 해.”


 지금 상황이 일순 희극적으로 느껴진 것은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코너 속 대화처럼 영양가 없이 반복되는 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석은 흘긋 조수석으로 눈을 돌렸다.


 채 과장이 힘겹게 호흡을 이어갔다. 숨을 내쉴 때마다 지독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


 각질이 허옇게 일어난 얼굴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턱과 그 주변의 탄력 없이 늘어져 겹쳐진 살. 푸짐한 뱃살까지.

 자기 관리에 실패한 중년남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석은 고개를 돌려 거울을 올려다봤다. 사이드미러로 비친 자신의 모습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은지 매사 두 눈 사이에 깊은 고랑이 새겨져 있고 먹는 음식들이 족족 배설물로 바뀌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쩍 꼴아 볼품없었다.


 그런 둘의 모습은 꼭 인기 없는 개그 콤비처럼 보였다.


 “음주 단속 진행하겠습니다.”


 석이 창문을 내리자 경찰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고생하네!”


 술에 못 이겨 혀가 있는 대로 꼬부라진 채 과장의 우렁찬 인사말이 창문을 넘어 날아갔다.


 검문을 진행하는 경찰은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잘 다린 제복과 경광봉만 없다면 대학생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어리게 보였다.


 술 취한 사람치고 첫마디는 제법 기세가 좋았지만, 뒤이어 이어진 채 과장의 문장은 횡설수설 정체를 알 수 없는 주문 같았다.


 석은 미안함을 담아 고개를 슬쩍 숙여 인사했다.


 “후, 길게 부세요.”


 경찰은 조수석에 뻗어있는 채 과장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음주측정기를 운전자인 석의 턱 앞으로 내밀었다.


 석은 경찰이 시키는 대로 했다.


 조수석에 앉은 채 과장은 혼잣말을 연달아 중얼거렸다.


 “아, 씨발. 목말라. 목도 마르고 오줌도 마렵네.”


 드디어 간이 해독 작용을 시작했는지 슬슬 앞뒤가 맞는 문장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채 과장은 자폭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나! 나도 검사해줘.”


 “음주 측정은 운전자만 하면 됩니다. 선생님은 안 하셔도 돼요.”


 경찰은 또박또박 힘 있는 목소리로 만류했다.


 “그니까! 내가 해야지. 저 앞에까지 내가 운전하고 왔으니까!”


 순간적으로 경찰의 눈에 진지함이 서렸다. 


 “……선생님? 저 분이 음주하고 운전한 거 맞습니까?”


 석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여태 운전을 한 건 분명 그였지만, 식당 주차장에서 차를 빼낸 건 채 과장이었다.


 석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단 파출소 가서 얘기하시죠.”     


 블랙박스 확인 결과, 채 과장은 자진 신고에 가까운 음주운전 적발로 결국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다.


 노상주차장도 엄연한 도로라고 도로교통법에 명시되어있었다.


 면허 정지는 운전면허 자격이 일정기간 동안 효력을 잃는다는 얘기였고, 당장 현 시간부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 말인즉슨 1년 6개월을 기다려 받은 새 제네시스를 내버려두고 채 과장은 당분간 택시를 타야한다는 뜻이었다.


 경찰은 난감과 유감을 표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이만 귀가하셔도 좋다는 말을 전했다.


 그 부분에서 채 과장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 정도로 술이 깬 채 과장은 파출소를 나오자마자 쏘아붙였다.


 “아니, 김 대리, 혹시 나한테 악감정 있어? 난 여태 김 대리한테 굉장히 잘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악감정이라뇨……. 제가 회사에서 과장님을 가장 믿고 따르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악감정은커녕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석에게 채 과장은 직장상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사람일 뿐이었다.


 그의 아부성 멘트에도 아랑곳 않고 채 과장은 열을 올렸다.


 “근데 왜 그런 거야? 내가 운전 부탁한 게 그렇게 불만이었나? 그래서 엿 한번 먹어봐라, 이런 생각으로 그런 거야?”


 “저, 과장님. 아까 조사받을 때도 들으셨겠지만, 과장님께서 직접 경찰한테 음주운전 했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나는 진짜 김 대리한테 잘해줬는데, 너무하다.”


 채 과장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중얼거렸다.


 “아, 씨발……. 좆도 아닌 새끼 때문에 기분만 잡쳤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늦은 밤에 상사의 욕지거리나 듣고 있는 꼴이 퍽 우습고 자존심 상하기도 했지만, 석은 평소에 하던 것처럼 욕설이 섞인 부분을 걷어내고 속없는 부하직원 역할에 충실했다.


 그는 “과장님 택시 불러드릴게요. 타고 가세요. 얼른 가서 쉬셔야죠.” 하며 채 과장의 어깨를 붙잡았다. 


 “건들지 마!”


 입은 멀쩡해도 몸뚱아리는 아직 술에 절어있는 사람의 움직임이 정교하고 조심스러울 리 없었다.


 손길을 거부하겠다며 휘적대던 채 과장의 손등에 석은 볼을 얻어맞고 말았다.


 “……”


 퍽 하고 꽤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채 과장은 사과 한마디 없었다.


 대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고는 곧장 달음박질쳐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라고 한 것인지 석은 알아듣지 못했다. 좋은 말은 아니었을 거라는 소심하게 짐작할 뿐이었다.


 시간은 오후 9시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석은 큰 도로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이곳에서 본가까지는 꽤 거리가 있지만, 몇 번 버스를 타고 몇 호선을 타야 집에 갈 수 있는지 알아볼 의욕도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석은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한 뒤에 그는 자동차 시트에 몸을 묻었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지만 어쩐지 취기가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몹시 불쾌했다.


 택시는 부지런히 발을 놀려 그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만 육천 원 나왔네요.”


 기사의 묵직한 목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난 석은 흩어져있던 정신을 부여잡고 카드를 건넸다.


 “영수증 드릴까?”


 “괜찮습니다.”


 “예, 그럼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배웅하던 기사는 대뜸 말했다.


 “사랑니 뽑으셨나 보다.”


 갑자기 사랑니가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의아한 눈초리로 석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기사는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이 멋쩍게 웃었다.


 “아니, 볼이 띵띵 부었길래…….”


 석은 백미러에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왼쪽 볼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채 과장한테 얻어맞은 탓이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석은 편의점으로 가 마스크를 샀다.


 밝은 곳에서 보니 누가 봐도 따귀를 얻어맞은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 앞에 맨 얼굴로 선뜻 나서기가 망설여질 만큼 눈에 띄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본가에 가서 마스크를 쓴 채로 대충 눈도장만 찍고 나오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 얼굴로 엄마와 동생과 한집에서 자는 건 무리였다.


 편의점을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석은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곧장 도착했다.


 주말 내로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 오늘은 잠깐 집에 들렀다가 금방 가야 한다는 말에 엄마는 알았다고 담백하게 답장을 보내왔다.


 석이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집은 3층. 그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다 오르고 복도에 닿았을 때 석은 무언가를 목격했다.


 엄마와 동생 훈이. 복도 끝 308호 현관문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이 보였다.


 장을 보고 왔는지 각자 자그마한 장바구니를 든 모습이었다. 그리고 동생의 큼직한 손은 엄마의 뒤통수로 돌진하고 있었다.


 탁― 하는 타격음이 텅 빈 복도를 채웠다.


 이어 동생은 그 손으로 주먹을 만들어 그대로 팔을 가격했다.


 목표물은 물론, 엄마의 가녀린 팔이었다. 그러자 조금 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일반인과는 조금 다른 동생만의 애정 표현인가 싶었지만, 엄마의 경직된 표정과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보자 그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엄마는 마치 육식동물의 사정권에 들어선 초식동물처럼 잔뜩 위축되어있었다.


 “바, 밖에 있을 때 그렇게 말하지 마, 말라니까! 나 애 아니라고오!”


 이어 기다란 복도를 타고 동생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눌한 발음에 실린 신경질적인 짜증이 석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


 엄마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장바구니를 고쳐 잡고는 서둘러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입술을 감쳐문 엄마와 연신 씩씩대며 더운 숨을 뱉어대는 동생이 현관문으로 들어갔다.


 석은 동생의 뒤통수가 사라지자마자 성큼성큼 걸어가 현관문에 귀를 가져다대고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동생은 끓어오르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달아 고함을 내질렀다.


 엄마의 새된 비명이 들려오고서야 석은 황급히 집으로 들어갔다.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동생 훈이는 그새 눈을 바꿔 끼웠는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순진무구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엄마 쪽이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무언가를 들킨 사람이 그러하듯.


 “……어, 석이 왔니?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나는 방금 출발했다는 줄 알았어.”


 “형, 안녕.”


 그는 동생의 인사를 무시하고 엄마를 쏘아봤다. 그리고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옷을 모두 벗으라고 말했다.


 “……뭐?”


 엄마는 멋쩍게 웃었다.


 “얘는, 엄마한테 무슨 그런 소리를 하니.”


 “일단 벗으세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석은 무심할 정도로 차가운 어조로 말한 뒤 동생에게도 한 마디 했다.


 “김영훈, 너는 방에 들어가 있어.”


 무정한 첫째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낸 것인지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동생이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 주섬주섬 입고 있던 옷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엄마의 하얀 몸에 형광등 빛이 내리 박혀 은은히 빛났다. 그렇지만 군데군데 얼룩져있었다.


 속옷 차림으로 엉거주춤 선 엄마는 멍에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연둣빛이 도는 양쪽 정강이를 시작으로 옆구리, 가슴, 어깨 모두 피멍에 뒤덮인 상태였다.


 그녀는 막내아들의 폭력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엄마의 몸에 뿌리내린 멍은 탁자에 부딪히거나 길에서 엎어져 생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이 깃들어있고 명백한 폭력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거기엔 분명한 동생의 흔적이 담겨있었다.


 “……”


 그제야 석은 그간의 엄마가 보였던 행동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짧은 안부 전화의 마무리는 언제나 오랜만에 동생과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떠냐는 말이었고, 나란히 길을 걷다 무심코 몸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무안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흔한 근육통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석은 분노인지 투정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흔적이 아로새겨진 엄마의 몸을 건조한 눈으로 멀거니 응시했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피멍을 마주한 석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한심하다’였다.


 엄마가 너무나도 한심해보였다.


 평생을 동생 옆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했으면서 그 끝이 기껏해야 얻어맞는 것이라니.


 엄마와 석의 사이에는 어떤 목소리도 섞여들지 않았다.


 유일한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동생만이 방 안에서 초조하게 형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석은 엄마의 눈을 들여다봤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확신하는 고요한 눈이었다.


 그때 석은 엄마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사랑이 아니었다. 그는 엄마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엄마가 자신과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들자면, 오히려 동생 훈이를 더 사랑하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석은 자기 자신보다 훈이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도 그랬다.


 “엄마.”


 혀끝에서 말이 맴돌았다가 이윽고 빠져나갔다. 지난 30년간 모자관계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은 말이었다.


 “……힘들지 않아?”


 “뭐가?”


 엄마는 옷을 꿰어 입기 시작했다.


 “……훈이.”


 “힘들긴, 매일 하는 건데.”


 “그러니까. 매일 힘들지 않을까, 해서.”


 “……석이, 너는?”


 멍이 다 가려진 온전한 엄마를 보며 석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나? 힘드냐고? 돈 버는데 당연히―”


 엄마가 말허리를 잘랐다.


 “아니, 어렸을 때. 방학만 되면 훈이랑 종일 붙어있었잖아. 그때 많이 힘들었어?”


 잊고 지냈던 시절이었다.


 언제나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어느 한쪽으로 밀려나있는 것 같은 심정으로 살아왔던 때였다. 가장자리만 밝으며 지내왔다.


 그의 유년은 항상 기울어져있었다.


 석은 엄마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부엌에서 식칼을 꺼내들었다.


 엄마는 그런 첫째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석이 방을 열고 들어가자 동생은 울음으로 그간의 죄를 벗겨낼 수 있다고 믿는지 꺽꺽 목 놓아 울었다.


 토악질을 하듯 거칠게 울면서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아니야. 나 아니야.”


 얼굴을 적시며 눈물을 툭툭 흘리는 꼴이 영락없이 방학 내내 함께 지내던 6살 어린애 같았다.


 손에 들린 식칼을 보자 훈이의 울음은 더 커졌고, 그만큼 더 역겨워졌다.


 그때 문득, 어릴 적에 줄기차게 느끼곤 했던 감정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분명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이지만 무언가 불공평한 경쟁을 하고 있다는 좌절감과 어딘지 모르게 천칭이 기울어져있다는 열패감.


 석은 그간 잊고 있었다.


 너무 오랜 기간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대학생이 된 20살부터 10년이다.


 그 기간 동안 석은 최소한의 시간만을 투자해 가족과 함께했다.


 엄마와 훈이와 한 공간에 있게 될 경우의 수를 최대한 배제하곤 했다. 거부했다.


 “형! 형! 나 아니야! 나 아니라고!”


 동생은 활짝 열린 눈으로 재차 부정했다.


 “아니, 너 맞아.”


 석은 분명 화를 내고 있었다.


 몸속에 이토록 지독한 분노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분노했고, 그 분노에 파르르 몸을 떨며 동생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칼을 휘두를수록 피를 뿜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흥건한 피를 마주한 훈이의 비명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왼쪽 팔과 손등이 너덜너덜해지고 있는데도 석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동생은 이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석은 그런 동생의 눈두덩을 붙잡아 억지로 눈을 뜨게 했다.


 “훈아, 눈 크게 뜨고 잘 봐. 이게 우리 몸에 든 피야. 너랑 내가 엄마한테 받은 피라고. 알아들어?”


 그의 말에 동생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를 입 밖으로 꺼내어 호흡하기라도 하듯이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눈물과 콧물이, 피가 범벅된 동생의 얼굴이 마치 극 소품으로 쓰이는 가면처럼 작위적으로 보였다.


 석은 온몸을 떠는 동생을 내버려두고 엄마가 있는 부엌으로 나왔다.


 엄마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웃었다.


 잔잔한 미소 하나가 깡마른 몸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해탈이 담겨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서글퍼보였고, 곤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덤덤한 것이었다.


 “……”


 석은 우뚝 선 채 그 미소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애썼다.


 오른손에 들린 식칼과 넝마가 된 왼팔에서 붉은 피가 떨어져 부엌 바닥에 물방울무늬를 수놓았다.


 그 순간 그는 엄마의 저항 없는 미소가 담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고 말았다.


 그건 연민이었다.

 엄마는 석을 가련히 여기고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의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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