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의 단점
가끔 한국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옛날 이야기가 대화의 주된 소재가 되곤 한다. 초중고교를 함께 다닌 고향 친구들과는 초중고 시절의 추억을, 대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과는 대학 시절의 추억을, 그리고 서로 다른 국가에서 만났던 친구들과는 우리가 그 국가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바쁘다. 물론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이직,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직장생활-도 주고 받지만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는 건 아무래도 과거의 이야기이다. 만나는 친구마다 다른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때로는 혼란을 느낄 때도 있지만, 각각의 인간관계가 공감할 수 없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에 서로 함께 했던 시절에서 대화의 소재를 찾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언젠가 한 친구가 과거 이야기를 습관처럼 꺼내는 나에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 있었던 일을 장난처럼 상기시키며 현재와 연결 지으려는 나의 억지에 화가 날 법도 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도 내심 그 친구와 나 사이에 실재하는 장벽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옛날 이야기 아니면 너랑 할 이야기가 없어. 나도 너 지난 10년 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고 너도 나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잖아."
알고 지낸 지 십수년이 넘는 친구지만 못보고 지낸지도 십수년이 넘었음에도, 서로 기억하는 모습은 과거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살았던 그 때에 머물러 있었다. 나도 많이 변했음에도 변하지 않은 척, 예전과 똑같은 척하는 것이 편했던 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대화가 즐거워서였다. 1년에 한번, 2년에 한번 한국에 가서 몇 번 볼까 말까 하는 관계에서 과거 이야기 빼면 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냐며 항변해보지만, 직업이나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들은 과거에 만났으면서도 현재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어색함이 없는 걸 보면 과거만 공유한 친구와는 과거를, 과거와 현재를 공유한 친구와는 둘 다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아닌지 싶다. 반면, 고향 친구들과는 과거 이야기만 해도 누구 하나 지겨워 하는 사람 없이 즐거운 건 또 참 이상한 일이다.
나의 인간관계가 각각의 시기에 따라 분절돼 있고, 어떤 관계는 과거 이야기를 빼면 나눌 이야기가 없단 생각이 든 건 수 년 전부터의 일이다. 개발협력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뭣하러 거기 가서 고생하면서 사냐"는 반응이 대다수고, 현지에서 생활이 되다시피한 정전, 단수, 사기, 절도 등에 대한 푸념은 "뭣하러..."의 단순반복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대화의 언저리에서 "돈 있으면 어디 좋은 데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좋은 데"에 친구인 내가 사는 개발도상국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돈을 많이 벌어 한국보다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는 신흥국이라면 또 모를까. 직장의 크기가 고생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UN에서 폼나게 일하는 것도 아니고 잘 알려진 NGO도 아니면서 왜 저 고생을 하는 지 이해를 받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재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는 으레 외국에서 만난 친구들이 되었다.
이런 내가 이상한 건지 궁금해서 w에게 물으니 내 상황에서는 당연할 수 밖에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계속해서 한 군데 머무르지 않고 살아 와서 그런 거 라고. 한창 친구관계가 가장 활발할 시기인 20대 초반부터 떠돌았으니 누군가와의 공감대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해서 쌓일 기회가 없었던 것이라고. 이미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내가 친구들과 공유하는 이야깃거리란 우리가 함께 있었던 그 시기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어떤 친구에게 나는 "과거무새", "옛날무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들을 내 기억속에 박제한 건지, 함께 했던 시기 이외의 이야기를 하면 친구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아는 너"라는 데이터에 의하면 너는 놀기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지금은 퇴근 후 집에만 틀어 박혀 사람 만나는 게 귀찮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기억과 현실 간의 괴리가 서먹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떻게든 과거의 모습에서 현재의 모습을 야기할 만한 어떤 연결고리를 찾으려 애써 보지만, 거기에는 "변하니까 사람"이라는 걸 인정 못하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나도 변했으면서...
10년 넘는 해외생활 동안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보내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10년 지기, 20년 지기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의 즐거웠던, 슬펐던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지하 유치장에 현지인들과 수감됐을 때 '내가 여기서 이렇게 된 걸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알까?' 생각했다. 험난하다면 험난한 생활 속에서 나를 지키는 건 내 자신이었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쌓았던 건 한국인 친구들이 아니라 외국인 친구들이었다. 해외생활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 발생한 불행이나 슬픔으로부터 격리된다는 것인데, 단점 또한 장점과 같은 이유다. 거리, 시차 등의 이유로 잠시 면죄부를 받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면제 받았던 슬픔을 한꺼번에 부과 받으니까.
얉고 넓은 관계보다는 깊고 좁은 관계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여질 때가 있지만 사실 나는 업무적인 관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관계를 친구로 보는 편이다. 친구라고 해서 모든 걸 털어 놓고 위로 받고 축하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예전에 버린지 오래다. 한국의 친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그들의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에 대한 기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한다. 내가 관계라는 나무에 물과 거름을 주고 보살피지 않기 때문에 떠나가는 관계에 대한 미련이나 원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