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믿음
아침에 고양이들과 함께 마당을 걷는데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대부분 "똑똑똑"으로 표현되기에 마땅히 그 소리를 나타낼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 게 아쉬운데, 철문을 쉴 새 없이 두드리는 통에 저 손이 남아날까 걱정될 정도로 끊임없이 두드려댔다. 무슨 일인지 싶어 철문에 작게 뚫린 구멍을 열어 밖을 살펴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현지인 남성이 서 있었다.
"Muli bwanji? mukufuna chiyani?" 안녕? 무엇을 원하니?(물리 봔지? 무쿠푸나 쨔니?)
"Ndikufuna ntchito. ndithandizeni" 나는 일을 하고 싶어. 도와줘(은디쿠푸나 은치또. 은디탄디재니)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일 수도 없고, 또 마땅히 줄 수 있는 일도 없어서 "Pepani 미안해"라고 말하고 보냈다. 청년은 바로 옆집 문을 두드리고 또 그 다음 집, 또 그 다음 집 문을 두드렸다. 현지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릴롱궤에서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일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일을 시키기도 하느냐며 묻는 나에게 "(일이 있으면) 일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좋다"며 사람 좋은 소리를 하여 상당히 의아했다. 말라위가 이런 신용사회였던가.
살리마에서 지낼 때는 집주인의 관할 하에 숙소를 임대하여 지냈기 때문에 이런 내용들은 잘 알 수 없었는데, 그 때도 자잘한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대문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을 몇 번 본 것 같았다. 잔디에 석회를 뿌리거나 잡초를 뽑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마을에 알려서 일당 받고 일 할 사람을 뽑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골 동네의 경우 익명성이란 게 거의 없어서 어느 정도 신뢰가 구축됐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노동이 가능했다고 생각되는데, 릴롱궤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집안에 들여 일을 시키기도 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다음 날 아침, 누군가 또 다시 철문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소리가 아침에 듣기에는 꽤 거북할 정도로 커서 조그만 구멍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어제 그 청년이 서 있었다. 같은 대화가 오고 간 끝에 나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일당은 얼마를 주면 되는 지를 물으니 3천콰차(=약 4,500원)라고 했다. 무슨 면접이라도 봐야 되는 건가, 아님 신분증이라도 확인해야 하는 건가... 혼란을 느끼며 그에게 일거리를 주었다.
집 마당 한 구석에는 작은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바나나 나무와 고구마가 심겨진 밭이 있는데, 내가 입주하기 전 집안 수리를 하며 생긴 쓰레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쓰레기를 모두 골라 한 군데 모으고, 밭을 갈라며 삽과 곡갱이를 주었다. 의욕에 차서 윗옷을 벗고 신나게 일하는 그에게 물을 갖다 주었다. 점심 때는 간단하게 요기할 것들을 갖다 주니 먹고 또 다시 계속 일을 하였다. 오후 3시 쯤 되자 나를 불러 자기가 한 일을 보여주었다.
밭은 당장 무얼 심어도 될 만큼 말끔하게 정돈돼 있었고, 깨진 유리병이며 찌그러진 통조림 같은 쓰레기들을 구석에 쌓여 있었다. 그의 업무에 꽤 만족한 나는 오후 5시까지는 일을 더 시켜야 겠다는 생각에 다른 일을 더 줄 건 없나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이런 나의 궁리를 눈치챘는지 그는 "무척 피곤하다"고 말하며 집에 가겠다고 했다. 주머니에 넣어 둔 3천콰차를 내미니 "내일 다시 와서 일을 할테니 내일 달라"고 말하며 집에 갔다.
다음 날 아침 또 다시 만난 그에게 마당에 널브러진 벽돌들을 모으고 마당 한구석 텃밭을 갈도록 부탁했다. 또 열심히 일을 하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내린 비에 일을 한동안 멈추어야 했다. 비가 한창 쏟아진 후 오후 2시가 됐을까. "오늘도 피곤하다"고 말한 그는 내가 6천 콰차를 내밀자, "내일 달라" 말하며 문 밖을 나섰다. 그는 이런 식으로 3일 동안 일했고 마지막 날 9천콰차(=약 13,000원)를 받아 갔다.
인사나 기본적인 대화 이상은 통하지 않아서 자세한 건 물어볼 수가 없었지만 상당히 앳된 외모에 멋 부리기 좋아하는 보통의 청년 같았다. 전화가 없는 그는 자기가 나중에 또 문을 두드리겠다고 말했다. 해가 지면 문단속부터 하면서도 도둑이 드는 건 아닌 지 걱정하며 잠이 드는 게 일상인데, 전혀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여 일을 시키니 기분이 참 묘했다. 뉴스에도 공무원 행세를 하며 집안에 침입해 금품을 훔치는 도둑들이 기승을 부리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많은데, 일자리를 구하는 구직자의 얼굴을 한 그 청년에게서는 어쩐지 흉악한 범죄를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말라위의 실업률은 5.99%(2020년 기준)1이며, 인접국인 잠비아 12.17%, 짐바브웨 5.73%, 모잠비크 3.39%이다. 말라위의 경우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0.06% 이상의 지속적인 감소를 보이다, 코로나 판데믹이 발생한 2019년 소폭 상승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말라위보다 더 많은 다른 국가들이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말라위의 상황만 특별히 심각하다고 말할 순 없다. 어쨌든 일당을 줄 수 있는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에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거절 당하는 수고로움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짐작해본다.
정직하게 땀을 흘려 일하고 돈을 받는 청년을 보니, 이렇게 성실하게 노동의 댓가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말라위의 희망이라면 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었고 나쁜 생각을 실행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외국인이라는 신분과 안전에 대한 우려로 인해 모르는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해야 하는 상황도 안타깝고 인간이 인간을 무조건 믿을 수 없다는 현실도 씁쓸하지만, 나의 안전한 울타리에 모르는 사람을 들이는 "금기"를 깨는 행동을 통해 내가 가진 생각들을 다시금 정리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 2021년 말라위의 일일 최저 임금은 1,923.08콰차(=약 3,000원)
1: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808778/unemployment-rate-in-malaw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