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쟁이로 살 텐가
Pretender라는 J-POP 노래가 있다. 나는 이 노래를 잘 몰랐는데, 군대에서 동기가 허구한 날 이 노래를 입에 달고 살았었다. 샤워를 할 때나, 스킨로션을 바를 때 꼭 이 노래를 불러댔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 노래의 멜로디만 알았을 뿐, 그 노래가 Pretender라는 사실은 몰랐다. 전역하고 나서 재원이가 그 노래를 노래방에서 불렀을 때, 아 이 노래가 Pretender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노래를 들을 때 제목을 중요시한다. 제목이 특별하면 노래를 한번 더 들어보게 되기도 하고, 제목과 곡의 연관성이 작품의 예술성을 한층 심화시킨다고 본다. 그런데 Pretender라는 노래는 직역하면 “~인척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노래를 들어보면 “사귀는 사이인척 하는 “ 에 관한 내용이다. 그렇다 그런 뻔한 사랑노래이다. 그런데 나는 요새 이 Pretender라는 의미 자체에 관심이 많다.
척하는 사람. 계속 이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앞으로 ‘척쟁이’라는 나만의 표현을 사용하겠다
난 요즈음 이 척쟁이에 관심이 많다.
나도 척쟁이다. 지금도 척쟁이 기질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을 어떻게든 남에게 뽐내기 위해서 정확한 사실과 전문가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것 마냥 남에게 소개해주고 흔히 말하는 ”꺼드럭 “ 거린 적이 꽤나 많았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뽐내고 자랑한 후에 자괴감을 느낀다기보다는 오히려 ”들키지 않고 넘어갔다 휴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은 악순환을 만들었다.
척쟁이였던 나는 코도 길어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수순이다. 척쟁이의 필수요건은 거짓말이니까.
그렇게 거짓말을 한번 두 번 하다 보니 척쟁이노릇은 쉬워졌다. 얄팍한 지식을 당연하다는 듯 남에게 말하고, 집에 와서 그에 대한 지식을 허겁지겁 찾아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튜브에서 흘려들었던, 인스타그램에서 흘깃봐던 지식들을 세상의 진리인 마냥 친구들, 가족들에게 말해주곤 했다. 원인은 아마 자신감 부족이지 않았나 싶다. 살이 찌고 뚱뚱하고 내가 남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많이 안다고 싶으면 어깨를 집어넣으려고 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신은 얼마나 우스웠을까 싶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멘털적으로 엉망진창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척쟁이 짓을 하다 보니 줏대도 없어지고 내 주관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트렌드와 어제 봤던 유튜브지식이 그날그날 나의 줏대와 척도가 되었다. 나라는 사람의 ”개성“이 아예 사라진 것이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인 내가 개성과 거리가 멀어진다니,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런 생각이 많이 바뀌기 시작한 건 군대도 군대지만 앨범을 만들면서 많이 변했다. 내가 앨범과 음악을 만들면서 든 생각은 아름다운 음악을 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답다는 나답다를 말한다. 나다운 음악, 난 개성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개성은 곧 매력이 되고 매력은 타인을 끌어들인다. 타인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홀로 남겨진다. 나는 홀로 남겨지기 싫다. 나를 요하는 사람을 원하는 사람이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나의 생각에 인간은 자신이 요하는 곳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동물이다.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공간에서 인간은 본인에 대한 확신도, 열정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성은 손에 들고 있는 무기이자 갑옷이 된다. 나도 그런 갑옷과 무기를 갖고 싶었고, 그런 생각에서 계속 내가 어떤 사람일까, 나는 뭘 좋아할까, 나는 어디에 살까,라는 생각을 줄곧 던졌던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솔직해지니 늘 지우기 급급했던 나의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때쯤부터 그 모습을 지우지 않고 선명해질 때 닦아냈다. 내가 그랬다는 사실이 창피하지만, 그때의 나도 나이니 사랑해 주기로 했다. 그게 나답다.
하지만 사랑은 사랑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단단한 땅은 비가 오고 마르기를 반복하듯, 과거의 나는 아름답지만 파낼 필요가 있었다.
우선 편협함의 안경을 그만 벗기로 했다.
어떤 음악이 맞다 틀 리다를 논할 수 없듯, 세상을 대하는 자신의 방식도 옳고 그름이 없다. 물론 도덕적인 부분, 사회의 질서가 지켜지는 선에서 말이다. 나는 요새 패션에 관심이 많으니 옷에 비유해 보겠다. 누구는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누구는 유행하는 옷을 입는다. 유행이 지는 옷을 입는 사람은 부끄러워야 하는가? 유행하는 옷을 입은 사람은 어깨를 올리고 다녀도 되는가? 유행이 지나면 그 사람은 다시 어깨를 내려야 하는가? 아니다. 물론 손가락질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안경을 벗고 사는 것은 아니니까. 안경을 아직 벗을 준비가 안된 사람들도 많으니까. 그렇지만 손가락질 ”당한 “ 사람이 그 손가락에 아파할 필요는 전혀 없다. 아파한다면 그 사람도 아직 안경을 벗지 못한 것일 뿐, 진작에 벗어던진 사람들은 안경잽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요새는 어떤 음악이 유행이고 이건 유행이 지났으니 별로고 왈가왈부들을 해댄다.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요새는 옛날한국음악을 듣는다. 인형의 꿈이라고 일기예보의 노래인데 앤틱 한 감성이 너무 좋다. 엄마도 이 노래를 알고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는 사실이 뜻깊기도 했다.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
그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냥 내가 그리고 있는 행복한 세상을 위해 나아갈 뿐이다.
눈치 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지도 않다. 은근슬쩍 흘리고 싶지도 않고, 아무도 모르게 혁명을 준비할 생각도 없다. 그냥 묵묵히 나아가고 싶다.
내가 처음 글을 쓸 때 솔직히 많이 창피했다. 글을 전문적으로 써본 적도 없고, 맞춤법도 틀리고, 그리고 내가 쓴 글을 누가 볼까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한두 개 써봐야 남들이 볼 때 어쭙잖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쪽팔렸다. 그렇게 한 개 두 개 쓰다 보니까 40개 가까운 글을 썼더라. 계단 1칸 올라간 사람이 ”나 계단 올라갔다 “라고 한다면 혀를 차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그렇지만 40 계단 올라간 사람을 보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40개 가까운 글을 쓰면서 나는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그때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 나를 돌아보고 싶다. 왜?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겉만 화려한 척쟁이가 될 바에는 알몸의 소년이 되고 싶었다. 그게 멋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되고 싶었으니까. 단순하다. 나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순간부터 세상이 단순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고 싶으면 하고, 아직 할 수 없다면 준비하면 된다. 준비해서 도전하고,
길고 화려해 보이는 Pretender가 아닌,
단단하고 단순한 I 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