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을 판별하는 진영 정치"
정치가 언제부터 선과 악의 문제가 되었을까.
오늘날 정치는 정책 경쟁보다는 윤리 시험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
어느 편에 서 있는지가 곧 도덕성의 기준이 되고,
다른 진영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말은 '악'으로 치부된다.
정치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번역되는 순간, 토론은 사라지고 신념만 남는다.
상대는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존재가 된다.
오늘날의 정치는 더 이상 타협의 기술이 아니라 정체성을 증명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타락한 정치 현실에 분노했다.
법은 강자의 도구가 되었고, 자유는 형식만 남았다.
그래서 그는 도덕을 호출했다.
정치를 다시 윤리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그에게 정치는 인간을 개조하고 도덕적 완성을 이루는 윤리적 과정이었다.
법은 '옳음'의 표현이어야 하고, 일반 의지는 공동선을 지향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정치의 도덕화'다.
그러나 이 숭고한 이상은 치명적인 함정을 안고 있었다.
"일반 의지는 항상 옳다."라는 신념은 정치적 반대를 공동선을 배반하는 행위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자유의 사상은 전체주의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절대적 가치에 대한 신념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
루소의 숭고한 이상주의는 광기 어린 결벽주의와 만나 비극을 창조했다.
그의 이상은 로베스피에르의 손에서 '도덕의 독재'로 변질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인민의 뜻'을 앞세웠다.
"덕 없는 공포는 파괴적이고, 공포 없는 덕은 무력하다."라고 외쳤다.
단두대를 정의의 도구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의 탈을 쓴 폭력일 뿐이었다.
알베르 카뮈는 이 지점을 명확히 겨냥한다.
'내가 옳다'는 도그마에 빠지는 순간 정의는 폭력이 된다.
미래의 유토피아라는 약속은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그 순간 인간은 사라진다.
카뮈가 문제 삼은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다.
그가 거부한 것은, 이상이라는 허상을 위해 현재의 인간을 희생시키는 논리였다.
카뮈에게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오류가 아니라 윤리적 파탄이었다.
어떤 대의도 인간의 생명 위에 설 수 없고,
어떤 정의도 살인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어떤 미래도 현재의 인간을 도구로 삼을 권리가 없다.
이 지점에서 루소의 이상, 로베스피에르의 덕의 집행, 20세기 전체주의는 한 줄로 묶인다.
"그들은 모두 옳으려 했고, 그래서 너무 멀리 갔다."
"선악의 언어가 사라질 때, 비로소 정치는 다시 시작된다."
오늘날의 진영 정치는 역사를 반복한다.
핵심은 '적대의 일상화'다.
각 진영은 자신을 '일반 의지'로 상정하고, 상대를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정의의 편에 있고, 저들은 무지하거나 사악하다.
"누가 말했는가", 그리고 그가 어느 진영에 속해 있는가 하는 사실만 중요하다.
중립은 비겁이 되고, 타협은 배신으로 낙인찍힌다.
정치는 종교가 된다.
교리는 의심되지 않는다.
이단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척결의 대상이다.
언어는 더 거칠어지고, 정의는 쉽게 폭력의 문법을 따른다.
정치는 도덕을 필요로 한다.
'옳음'이라는 가치는 늘 잊지 말아야 할 판단의 기준이다.
그러나 정치가 도덕 그 자체가 되는 순간, 정치는 가장 비도덕적인 얼굴을 드러낸다.
덕이 법이 되고, 법이 검이 될 때, 누가 그 칼날을 견딜 수 있겠는가.
카뮈는 '선'을 그었다.
아무리 옳아 보여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믿음,
정의보다 인간을 앞에 놓는 태도,
승리보다 공존을 택하는 용기,
그것이 정치가 폭력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다.
정치는 구원이 아니다.
불안전한 인간들이 공존하기 위한 가장 서투른 장치일 뿐이다.
정치가 선악의 언어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공존의 가능성이 열린다.
독단에 빠지지 않는 윤리적 긴장, 이것이 바로 오늘의 정치가 요구하는 덕목이다.
"마키아벨리의 독창성은, 정치와 윤리를 명쾌하게 갈라 놓은 데 있다."
- 스스로 마키아벨리의 열성 팬이라며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쓴 시오노 나나미의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