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 카뮈의 소설 《이방인(L'Etranger)》을 읽고.

by 나그네

이방인(異邦人)은 '낯선 사람'이다.

잘 모르는 사람, 익숙하지 않은 사람, 생소한 사람이다.

집단이나 공동체 속에서도 홀로인 사람이다.

서로 간에 친숙함이나 연결이 부족한 소외된 사람이다.


이방인 뫼르소(Meursault)는 무심하다.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와 기대에 순응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엄마의 죽음, 애인의 결혼 요구, 아랍인과의 싸움과 총격,

이 모든 것에 무감각한 태도로 일관한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쏴 재판정에 섰다.

그러나 법정은 진실을 묻지 않는다.

'그'가 아니라 그의 '태도'를 심판한다.


한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보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울었는가만을 확인한다.

누구나 하듯이 '슬퍼하는 척'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고 '사형'을 선고한다.


소설도 뫼르소처럼 무심하다.

1인칭 시점이지만, 마치 제3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살인과 사형까지,

'나'는 등장하지만, 정작 '나'는 한 일이 없다.

오후 두 시의 해변, 머리 위로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만이 가득하다.


세 번의 죽음이 등장한다.

어머니의 죽음(자연사), 슬픔을 강요받는 무대다.

아랍인의 죽음(살인), 부조리의 폭발이다.

그리고 뫼르소의 죽음(사형), 사회적 위선에 의한 처형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뫼르소는 피하지 않는다.

종교적 위안에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며 삶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을 느낀다.

뫼르소는 세상의 무의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왜냐?

뫼르소에게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타자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이방인이다.


부조리에 맞서려 하지 않는다.

부조리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

《시지프 신화》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상상해야 한다. 시지프는 행복하다고."




부조리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의 풍경이다.


우리 시대의 부조리는 더 세련되었다.

알고리즘은 취향을 계산하고,

평가는 숫자로 환산되며,

생(生)은 소개서가 된다.


더 많이 설명하지만, 더 적게 이해한다.

더 많이 연결하지만, 더 크게 고립된다.


부조리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과

그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무의미한 우주 사이의 긴장이다.

뫼르소는 이 부조리가 강요하는 거짓된 의미를 거부한다.

그로 인해 고립된다.


뫼르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햇볕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람이나 바다처럼.

사회의 위선에 돌을 던진다.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과 태도를 연기하지 않는다.


뫼르소는 시대의 잔류물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우리 곁을 걷는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가 되어 걷고 있다.


누구도 삶의 변두리에서

주변인으로 외롭게, 관능적으로 살아가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도 '이방인'이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