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살에서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2016년 3월 8일 오전 10시 38분
아버지의 마지막 심장박동수가 남긴 기록이다
그때 아버지 나이는 51살
내 나이 21살 대학교 2학년이었고,
동생은 18살, 빠른 년생이라 고3이었고,
엄마는 딱 50살이었다.
그리고 현재, 2024년 어느새 내 나이가 29살, 만 나이로는 28살이 되었다. 엄마가 내 나이에 나를 낳았다는데 나는 이제야 남자친구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며 결혼 준비를 시작하려 한다. 정말 갑작스럽게 아버지와의 추억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아마 결혼을 준비하게 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하게 되어 그럴지도 모른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만 앞서갈 뿐 막상 써보려니 어느 시점을, 어떤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하나 등등 고민이 생겼다. 그러다 근본적으로 난 정말 왜 글을 쓰고 싶어 졌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선 가장 큰 동기는 앞서 말한 그리움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환경과 역할들에 적응해 가느라 바쁜 나머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옅어졌었는데, 결혼을 준비하게 되면서 옅어졌던 그리움이 되살아났다. 아버지의 유언은 죄다 나와 관련된 일들이었다.
그중 소원이자 주문처럼 되뇌셨던 말이 “우리 첫째 결혼식장에서 소주 한잔 딱 해야 하는데”였고 그다음이 “은퇴하고 나서 저기 시골에 집 하나 지어서 우리 첫째, 둘째 놀러 오면 삼겹살 구워줘야지 “ 였다.
남자친구와 이제 진지하게 혼사가 오고 가고, 무엇보다 저번주에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뵙게 되면서 이제야 비로소 내가 정말 시집을 갈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현실감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누구보다 내 결혼식을 기대하고 축하해 줄 사람인 아빠가 떠올랐다. 옅어있던 그리움이 슬픔이 되고, 슬픔은 설렘과 행복으로 가득 차야 할 결혼식에 대한 상상마저 서글프게 물들이고 있었다. 혼자 식장을 걸어가야 하는 미래의 나와 혼주석에 혼자 앉아있을 엄마의 모습, 그리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의 부재를 언급한 바 없어 왠지 수군거릴 것만 같은 내 하객, 그리고 적은 하객 수를 보며 또 수군거릴 것만 같은 남자친구의 하객.
글을 쓰게 된 그다음으로 큰 동기는 잊혀지는 두려움이었다. 21년 아버지의 호스피스 병상에 있으면서 몰래몰래 아빠 목소리를 녹음해 두었었다. 아빠는 본인의 기력 없는 쇳소리를 뭐 하러 녹음하냐며 화를 내곤 했지만 21살의 그 당시 나에게는 작은 바람에도 꺼질 듯싶은 촛불과 같은 아빠를 어떻게든 붙잡고 기록해서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나는 그렇게 12개 정도의 녹음본을 저장해 두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빠가 녹음을 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부끄러움과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쇠한 아버지로 기록된다는 부끄러움과 본인이 떠나고 나서 계속 그 기록들만을 붙들고 그리워하다 다시 일상의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할까 봐의 걱정.)
하지만 이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으나, 하느님 바로 옆에 위치한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게 바로 그다음 해에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가서 핸드폰을 도난당했다. 백업이나 별도 기기에 저장을 해두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렇게 하루 만에 아빠의 마지막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핸드폰을 도난당하고 나서 혼자 기숙사 방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당시 룸메이트 언니는 내가 핸드폰 위치를 추적하며 찾기 위해 안달이 나있을 때 아이폰 6이라는 기계의 경제적 가치 및 한두 달 정도의 상해 생활의 사진을 잃어버려 난리인 줄 알았겠지만, 난 당시 그 안의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아빠의 마지막 목소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밤마다 적어도 애플 클라우드 어딘가에 따로 저장되어 있기만을 바라고 또 동시에 내 폰을 훔쳐간 도둑놈의 3대가 망하길 바란다는 무서운 저주마저 내리고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계속 말이 늘어지고 길어질 것 같아 첫 글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해 남겨보려 한다. 앞으로 얼마나 자주 글을 남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빛바래지지 않았을 때 하나씩 남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