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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뭐 하셔?

나의 우주에서 사라진 질문

by 흔들리는촛불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

예전에는 이 말이 단순히 인간의 이기심,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더불어 팽배한 자존감을 나타내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말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큰 우주에 작은 점과 같은 크기의 지구 안에 수억의 인간들과 동식물들이 바글바글 살고 있다. 우리는 우주의 작은 점이라는 걸 알고, 문과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탄생부터 소멸 과정들이 몇 천년동안의 상상이라는 창끝에 마침내 과학 기술이라는 창대를 꽂아 이리저리 우주를 헤집어가며 ‘우주과학’이라는 명칭 하에 활자로 기록되어 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은 미지의 우주를 이해하려고 부단히 탐험을 하며 우주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한 복잡한 체계와 과학으로 탄생한 지구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부터 열심히 진화하고 여러 세대를 거쳐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나라는 인간의 역사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사실 내가 죽으면 나한테는 아무 의미 없지 않나?라는 생각으로 변모했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 그 말은 나는 우주의 중심일 만큼 대단한 사람이다 보다는 이 우주도 결국 내가 눈을 감는 순간 나에겐 아무 의미 없다는 허무주의로 변모하게 되었다. 물론 나하나가 없다고 해도 세상은 잘 돌아가겠지만, 그 돌아가는 세상에 나는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출퇴근을 하면서 무수히 지나치는 익명의 사람들도 다 저마다의 우주를 이고 다니겠구나 싶었다. 어디선가 우주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너무 광대한 우주를 공부하다 보면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볼품없고 작디작은 존재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데, 맨눈으로 수많은 별들과 우주들을 공부하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마다의 우주에 대한 생각과 ‘나는 이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말의 또 다른 뜻을 해석하게 된 건 시기적으로 대략 아빠의 죽음 이후였던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1~2년 후 작은 중소기업의 인턴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새로운 신입 직원이 들어오면 으레 질문하는 질문들을 받았다. 어디서 사느냐, 나이는 몇 살이냐, 그전에는 어디서 근무를 해봤냐 등등 그리고 부모님은 무얼 하시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분들의 삶이 투영한 시야에서 20대 중반에 부모님 중 한 분을 여의는 게 특이한 경우였을 테고, 본인들이 20대 중반이었을 때는 당연히 부모님이 살아 게셨고 아직도 건장하셨을 거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내 아픔을 드러내는 게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아버지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싸해질 분위기와 더불어 회사에서는 굳이 개인적인 사생활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신념이 맞물려 그 짧은 순간에 ‘그냥 회사원이세요’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누군가의 아픔에 대한 공감은 직접 그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만이 전달이 가능하다. 그 외의 안쓰러운 마음, 공감은 싸구려 동정심과 연민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의 모든 노력, 악착같이 해내려는 업무에 대한 욕심과 자세가 자칫하면 ‘아버지가 안 계셔서 더 열심히 하는구나’ 하는 안쓰러운 싸구려 연민이 묻을까 봐 아버지의 죽음을 홀연히 감췄다.


그날 이후 내 우주에서 ‘아버지’란 존재는 지워졌음을 알았다. 우주에서 지워진 아버지는 ‘그리운 대상‘으로만 입력되었고, 그 입력값에 의해 내가 보는 시야도 달라져있었다. 내 나이 또래에게 아버지가 있는 게 부럽다는 생각보다 ’아직 아빠가 있어?‘ 하는 신기함으로 먼저 인식되었고 그 이후에야 ’아~ 우리 아빠가 정말 일찍 가시긴 했구나 ‘ 하는 판단이 되었다.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한눈박이 키켈롭스의 일화 같았다. 한눈박이의 거인 키클롭스 형제들은 처음 오디세우스 일행을 보고 두 눈을 가진 그들을 이상한 종족 취급을 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두눈박이였던 나에게서 한 눈을 앗아갔고 그렇게 내 세상은 달라져있었다.


달라진 세상이 힘겹거나 아버지의 죽음을 잊지 못해 서글프고 그리워하는 건 절대 아니다.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지가 9년째니 그러한 슬픔들은 시간이 모두 지워줬다. 다만, 아빠가 그렇게 열심히 키웠던 자식들이 다 자라서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되고, 결혼을 하는 걸 보면 참 좋아하셨을 텐데 라는 아쉬움만 들뿐이다. 평생 청춘을 받쳐 일궈온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 나무가 되어 이제 그 옆에서 뜨거운 햇빛과 비바람 속에서 밭을 갈게 해 준 ‘가장의 책임’이라는 쟁기와 굴레들을 벗어두고 두 나무 그늘 아래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새로운 시각과 함께 타인에 대한 배려의 영역을 넓혀줬다. 난 더 이상 누군가와 첫인사를 나눌 때 그들의 부모님의 직업이나 연세를 더불어 묻지 않는다. 그들도 나와 같은 아픔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라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 20대에 부모님이 모두 다 계신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종종 나 혼자만 낯선 타인으로부터 악의는 없으나 내 마음 한편에 작은 생채기를 남기는 질문들을 떠안고 살아간다.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 상실‘의 상처가 아물었다고 생각이 되지만 가끔 악의 없이 받게 되는 순수한 질문인 ‘부모님은 뭐 하시니?’는 차마 상처가 온전히 딱지지지 못하게 만든다. 9년 동안 내 마음은 항상 다 말라붙지 못한 딱지 아래 선홍빛 핏기를 보이며 살아간다. 그리고 행여 그 연한 살갗이 보일까 싶어 손으로 애써 가리며 살아왔다. 다만, 나도 내 딱지의 크기는 다 알지 못해 가끔은 애써 누른 내 손 밖으로도 그 상처가 보일까 싶어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내 미소로 그 시선을 치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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