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살고 싶다는 말보다, 그만하고 싶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어쩌면 그건 오래전부터 내 안에 박혀 있던 문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고,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내 입술 끝에서 가장 먼저 흘러나오는 건 늘 그 반대였다.
나는 며칠 전, 할머니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느릿하고, 오래된 시계의 초침처럼 일정했다.
“너 요즘 얼굴이 안 보이네. 괜찮은 거니?”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 같았고, 힘들다고 말하는 건 너무 무거웠다. 대신 침묵이 이어졌다.
“말해봐라. 너 목소리가 왜 이리 가라앉았니.”
할머니가 조심스레 묻자, 나는 엉겁결에 속마음을 꺼냈다.
“…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만하고 싶다는 말이 먼저 떠올라.”
그 순간, 공기가 멈춘 듯 고요했다. 할머니의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내가 던진 말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수화기를 타고 흘러가, 할머니의 가슴을 찌른 것 같았다.
“어린것이, 왜 그런 소리를 하니.”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세상은 원래 힘들다. 그렇다고 네가 없어져도 되는 건 아니야.”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말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그 옳음이 내 현실을 덮어주지 못했다.
집 안은 여전히 숨 막히게 어두웠다. 방 한쪽 구석에는 내가 쭈그려 앉아 울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식탁 위엔 차갑게 식어버린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나의 하루는 늘 비슷했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저 버티는 듯한 날들의 반복.
다음 날, 나는 괜히 할머니 집에 들렀다. 좁은 부엌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밥부터 차려주었다.
“밥은 좀 먹어야지. 사람은 밥 힘으로 사는 거다.”
숟가락을 들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 눈물이 고였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누군가 설명해 주길 바라면서도, 정작 내 안에서는 그만하고 싶다는 말이 자꾸 차올랐다.
할머니는 내 표정을 보고 눈치를 챘는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옛날에 그런 생각 많이 했다. 그만 살면 편하겠다 싶었지. 근데 말이다, 네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앞에 앉아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허무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 말에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울컥한 마음이 올라왔다.
할머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더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네가 없으면, 나는 매일 밥 지을 이유가 없어진다. 그게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다. 그러니 너도 누군가의 이유가 돼주면 된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가로등 불빛이 번져 눈앞이 아득해졌고, 나는 길 한가운데서 발걸음을 멈췄다.
살고 싶다는 말은 아직 입안에서 굴러다니지 않았다.
여전히 그만하고 싶다는 말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말한 그 문장이 내 귀 속에서 맴돌았다.
“너도 누군가의 이유가 돼주면 된다.”
나는 그것을 붙잡고 있었다.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부표처럼.
살고 싶다는 말은 아직 멀리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할머니 때문에, 단 하루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 집 문을 닫고 나오자, 골목길은 이미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저녁 공기는 차갑고, 가로등 불빛은 희미하게 길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은 자갈이 굴러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오늘 하루의 무게처럼 내 마음을 두드렸다.
골목 끝에서 구워진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
작은 슈퍼 앞, 아이와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사고 있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뛰는 아이의 모습은 너무 평범했지만, 내 마음을 뚫고 들어왔다.
순간, 어린 시절 내가 떠올랐다.
어릴 적, 엄마와 함께 시장 골목을 걸으며 빵집 앞에서 기다리던 기억.
나는 작은 손으로 빵 봉지를 꼭 쥐고, 마음속으로 세상이 다 내 편인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의 나는 무겁거나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순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자, 눈가가 시큰해졌다.
나는 근처 공원의 낡은 벤치에 앉았다.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고, 라이터를 켜자 작은 불빛이 손끝에서 흔들렸다.
처음 한 모금 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오자, 오늘 하루의 무거움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벤치 위에서 다리를 꼬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 웃음소리,
가로등 불빛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모든 것이 너무 평범한데, 동시에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