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남시티(Panam city)

잃어버린 삶의 자취를 찾아서

by 지구지고

“뒤를 봐요, 뒤를 보면 건물 규모를 알 수 있어요.”

윤 선생이 말했을 때 우리는 파남시티(Panam city)의 경계 안에 들어서 있었다. 아직 입장 전이어서 뒤쪽으로 가 보진 못했지만 50여 미터는 됨직한 거리였다. 빛바랜 자줏빛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이었다. 흙으로 구운 벽돌은 비바람에 그 각을 잃고 둥근 모서리로 변한 지 오래인 듯했다, 세월과 함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당당함이 함께 스며있었다. 그 속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지 궁금해졌다.

겉보기로 파남시티는 <인디아나 존스>다. 존스가 ‘크리스털 해골’을 찾았을 법한 낡은 건물들이 죽 늘어섰다. 그 고고학의 여정을 느끼려면 파남시티는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날, 천둥과 번개가 적당히 소리 지르는 음침한 날 가는 게 제격일 것 같았다. 그래야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여정과 같은 맛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파남시티에 들어서자, 어젯밤 내린 비에 짙은 팥죽색으로 변한 외벽이 맞았다. 햇빛을 받아들인 밝은 자줏빛 벽돌들에선 살짝 하얀빛이 돌기도 한다. 늘씬하게 쭉 뻗은 일자 원형 기둥은 흰 곰팡이를 내보이며 ‘나 오래된 거 맞아’ 하는 것처럼 뻐기며 서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2층이었다. 중간에 3층 집이 있었다. 어떤 건물 하나 그냥 지은 것이 없다. 같은 모양이 없는 집들이 연결 연결되었으되 간섭하지 않은 자기만의 공간을 가졌다. 아치형 테라스가 예뻐 흉내 냈을 법한 다른 집도 똑같이 만들진 않았다. 원형 기둥을 세워 2층에 테라스를 만들었으면서도 옆집과의 조화를 잃지 않았다. 현대 건물에 못지않게 정원이 갖춘 곳도 있으며, 발코니, 베란다 같은 편의 시설이 도입됐다. 조각으로 장식한 난간이 있고 무슨 연유인지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한 사람이 빠듯하게 지나갈 정도로 좁게 만들었다. 건물은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뒤쪽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통로를 냈다. 내가 배낭을 메고 빠듯하니 헤비급 선수들은 통과가 어려웠을 것이다. 사각의 기둥으로 추녀를 만들어 비에도 대비했다. 기둥들의 위에는 꽃을 정교하게 양각했고 붉은 벽돌 위에 회를 발라 벽돌을 보호하려는 치밀함도 보였다. 오래 살려고 지은 집이 분명하다. 자기 집을 더 아름답게 꾸미려는 경쟁이 작용한 걸까. 디테일한 세심함이 돋보이는 건물은 내부에까지 정교한 부조로 장식했다.

도로는 살짝 굽은 에스자형이다. 베란다에 앉아 커피 한잔 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훤히 보이지 않게, 그리고 앉은 이 또한 남의 일상을 엿볼 수 없도록 사생활까지 고려했다. 테라스에서 즐기는 망중한을 모든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심산인 듯하다. 그 에스 자에 구멍가게에 과자봉지가 연달아 걸려 있듯이 집들을 죽 배치했다. 개개인의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화와 곡선의 미를 살린 구조다. 양쪽 건물의 뒤에는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랐고 코코넛 나무는 농구선수가 공을 잡고 손을 올리듯 꼭대기에 열매를 맺었고, 망고나무는 기다랗게 뻗은 꽃술 끝에 주먹만 한 망고를 하나씩 매달아 흔들었다. 들어가면서 오른쪽 건물 뒤에는 호수를 배치하고 왼쪽은 강으로 막혀 천연의 요새 형식을 갖췄다. 건물은 모두 52채. 비슷하면서도 다른 건물이다. 주거용 건물들이 대부분인 것 같지만 채광이 잘되는 넓은 공간은 파남 공동체의 발전을 논의했을 회의장으로 사용했을 법하고, 또 신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비볐을 무도장으로 하루의 피로를 푸는 장소였을 것이다. 화장실은 집에서 멀리 강가나 호숫가에 배치했다. ‘화장실과 뭐는 멀수록 좋다’는 말이 여기 방글라데시에도 있었나 보다 생각했다.


‘잃어버린 도시’라는 별명처럼 이 도시의 영광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하루를 즐기는 공원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여러 곳에서 건물들이 낡고 허물어져 혀를 내밀고 낮잠 자는 개처럼 축 쳐져있었다. 벽돌의 파편들이 발에 걸리고 무너진 벽 사이로 아이들이 재주넘기를 하듯 뛰어다녔다. 화려하게 치장했던 벽은 늙은 얼굴에 검버섯 번지듯 검게 물들었고, 하얗게 빛났을 회벽 미장은 떨어져 나가 너덜너덜한 것이 어린아이가 이불에 그린 ‘세계지도’ 같았다. 철재로 된 창문과 방범창은 녹이 슬어 만지면 부스스 내려앉을 것 같았다. 천정을 기하학무늬로 장식한 예쁜 공간엔 역사에 남고 싶은 누군가가 자기 집이라고 써 놓은 양 이름이 새겨졌다. 동네 사람들이 안부를 물으며 열고 닫았을 문짝은 어디로 사라진 지 오래요, 인사도 나누지 못하도록 또 다른 붉은 벽돌로 꽉 막혀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게 됐다. 더위에 축축함이 배어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 안 어디에 진짜 ‘크리스털 해골’이 있다는 전설이 나올 듯했다. 입구에는 출입 통제하는 통나무 바가 걸렸는데 한쪽은 건물의 허물어진 벽 위에 걸쳐있고 벽돌은 떨어져 저 혼자 돌아다녔다.


이 거리를 분주하게 오갔을 사람들은 지금 모두 떠나고 없다. 동네 사람들 몇이 파나마시티를 자기 정원처럼 오가고 관리하는 사람인지, 건물 세 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버려진 듯 한 이 도시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도시임에도 ‘잃어버린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여기 살던 사람들이 떠난 후 그들을 모두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남시티는 19세기 초 인도 캘커타 출신의 부유한 힌두 상인들에 의해 이곳 파남에 작은 마을로 세워졌고 그들이 정착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정착하게 된 역사는 소나르가온(Sonargaon)에 있다. 파남시티가 있는 소나르가온은 뱅골 최초의 수도로 15세기에 세워졌다. 외국의 옷감과 면직물 등을 강을 통해 수출하기 쉬운 항구 도시였다.(파남시티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매그나 강이 있다). 뱅골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인 소나르가온에 파남 시티가 지어진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공장이 건설되고 파남시티가 영국산 조각품과 면직물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성장했다. 무역이 증가하면서 이를 움직이는 상인들이 건물을 지었다.


활기찬 상거래가 이뤄지던 이곳이, 부의 상징처럼 꾸미고 살았던 이 마을을 파남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잃어버린 도시’,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은 걸까? 그 출발을 1947년 인도 분할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번성했으나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되고,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시가 독립되었다. 이 분열의 과정은 종교적인 것으로 힌두와 무슬림 간의 갈등이었다. 이때 파남시티에 살던 대부분의 상인들은 힌두교도였다. 종교적 갈등과 더불어 인종 갈등으로 일부가 떠나고 나머지는 1965년 인도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본인들 스스로 일궈놓은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했을 심정은 어떠했을까?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던 우리 동포들이 이름도 모르는 동토의 땅으로 이주하던 그 심정이었을까. 무슬림 사회에서 힌두 사회를 지키려 했던 그들이 조여 오는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긴 시간 버텨온 것은 그들 안에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했을까. 그리고 1965년 최후로 이 터전을 떠난 힌두 상인들은 어떤 말을 남겼을까. 윤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이것 봐요. 정말 잘 지어졌어요.” 그렇다. 대대손손 살기 위해 잘 지은 집, 자신이 일군 삶의 터전을 떠나면서 파남에서의 행복함에 감사했을 것이고 꼭 돌아오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땅속 어디엔가, 아니면 벽 속에, 쉽게 찾지 못하는 곳에 이 집이 내 것이라는 증표를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증표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없고 자꾸만 허물어져 안타깝게 되자 세계 기념물 기금은 2006년 가장 멸종위기에 처한 세계 100대 유산 중의 하나로 파남시티를 선정했다. 더는 허물어지지 않도록 관리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방글라데시의 관리인들은 무관심한 듯 보였다. 여기에 살던 사람들이 와서 보면 하품할 노릇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인도로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행의 길을 떠난 것이 아니다. 방글라데시가 싫어서 떠난 것도 아니다. 장강명이 <한국이 싫어서>에서 말한 것처럼 ‘여기서 못 살겠어서’ 떠난 것이다.

마침 파남시티를 찾은 날은 방글라데시 이드 명절이었다. 명절빔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파남시티로 몰려들었다. 파남시티에는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가족은 가족끼리 즐거운 소풍의 장소가 되었다. 수많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디에서 왔냐는 둥, 어디에 사냐는 둥 물으면서 따라다녔다. 어깨에 샤리를 출렁하게 걸치고 한복의 맵시 같은 살루아 까미즈(Salwar Kameez)를 입은 아가씨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학생들은 정원 풀밭에서 핸드폰을 가운데 두고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멀리 강 쪽을 어슬렁거리는 무리들은 마치 이곳이 자기들 영역이라고 표시라도 하듯 구석만 찾아다녔다. 나무 그늘 아래 젊은이들은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시시덕거리고 있었고, 그중 몇은 담배를 피우라며 계속 따라다녔다. 하지만 우리는 앙증맞은 빤자비를 입은 아이들과 손을 잡고 걸었을 부자들의 거리를 걸었다. 마치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처럼 아이들 손을 잡기도 하고 어깨를 감싸기도 하며 파남시티라는 세트장을 걸었다.


두 번째 온다는 윤 선생이 세세한 부분까지 안내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줬고, 모자이크 문양이 화려하다는 것, 천정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장식되어 예쁘다는 말, 무도회장으로 쓰일 만큼 큰 곳은 연회장이었을 것이라는 추정, 이층 테라스에서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 그리고 “뒤를 봐요, 뒤를 보면 건물 규모를 알 수 있어요.”라고 말해 건진 한 컷 사진, 빨강 플라스틱 통이 있어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잘 관리된 집. 파남시티는 ‘잃어버린 도시. '죽은 자들의 도시'가 아니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였고,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마음을 나누며 걷는 삶을 충전할 수 있는 도시였다.


파남시티에 대해서는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소나르가온은 13세기에 세워졌으며 1610년까지 뱅골 술탄국의 수도이자 행정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파남시티는 다카에서 남동쪽으로 30마일 떨어진 곳에 있으며, 19세기 초에는 부유한 힌두 상인들이 기초를 닦았다. 동서로 뻗은 도로 양쪽에 52개의 건물이 서 있으며 길이 600m, 폭은 5m에 달한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직사각형이고 남북으로 뻗어 있다. 건물들은 유럽의 예술적인 기술과 무굴인들의 기술과 혼합된 형태다. 건물들은 다양한 크기의 벽돌로 지어졌다. 석회와 색색의 유리로 모자이크 되었다, 건물의 양 뒤쪽에는 강과 연못, 우물이 있다.」


【방문 정보】

▢ 가는 방법: 다카 굴리스탄에서 소르나가온 행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가서 모그라파라(Mograpara)에서 하차 후 릭샤나 CNG를 이용하면 10분 내외로 도착한다.(릭샤, CNG 요금은 40~50따카 정도다.)

▢ 개장 시간과 입장료: 아침 9시에 문을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9시에 맞춰 파남시티를 찾았다. 10시에 문을 열었다. 입장료는 100따카였다.

▢ 확인 필요: 소나르가온까지 직접 가는 버스인지 여러 번 확인해야 한다. 버스의 대부분은 승객을 태우기 위해 갈아타고 가야 할 경우에도 소나르가온까지 간다고 탑승을 강요한다.(굴리스탄에서 소나르가온까지 가는지를 몇 차례 확인했으나 결국은 종점인 듯 한 허허벌판에 내려주고 갈아타라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반대쪽으로 건너가 버스를 갈아타고 소나르가온에 도착했다.)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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