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화가가 왜 작가예요?" 미술 수업 시간, 한 아이가 던진 순수한 질문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예술가이자 작가'라고 소개했을 때였다. "화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고,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 아닌가요?" 아이의 물음에 잠시 말을 잃었다. 며칠 뒤, 알았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이렇게 생각한다는 걸.
"그림 그리시는데 왜 작가라고 하세요?" 전시회에서, 동호회에서, 심지어 가족 모임에서도 들었던 말이다. 처음엔 웃으며 넘겼다. "화가도 작가죠."라고 가볍게 설명했다. 하지만 점점 답답해졌다. 마음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계속 반문했다.
"왜 사람들은 화가를 진짜 작가로 인정하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작가는 누구인가? 작가(作家)는 '만들 작(作)', '집 가(家)'.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다. 글을 만드는 사람만 작가가 아니라, 그림을 만드는 사람도, 음악을 만드는 사람도 모두 작가다. 그런데 왜 유독 화가에게만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이면 딴지를 걸까?
어제도 그랬다. 동네 공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산책하던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취미로 그림 그리세요?" "아니요, 작가예요." "아, 소설 쓰세요?" "그림 작가요." 그때의 어색한 침묵. 나는 그냥 웃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35여 년간 미술 교사로 살았다. 퇴직 후 3년, 이제야 온전히 내 그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내가 '진짜 작가'인지 의문을 품는다. 지난해 개인전 할 때 전시장에서 한 지인이 말했다. "작품 정말 좋네요. 그런데 작가라고 하시니까 좀 어색해요." 그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나눈 수많은 순간, 방과 후 혼자 남아 그림을 그리며 느낀 적막, 전시회를 준비하며 밤새 그렸던 작업실의 형광등 불빛까지. 그 모든 시간이 내 안의 '작가'를 만들어 주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바로 그것들이 '작가'라는 이름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날 밤, 결심했다. 화가도 작가라는 걸 보여주겠다. 세상은 글 쓰는 사람들만 작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글을 쓰는 사람도 모두 창작자이다. 이런 창작자들을 '작가(作家)'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 덕분에 그림만 그리던 내가 글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졌다.
붓으로 캔버스에 표현하던 것을 펜으로 종이 위에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조형 예술가로서 내 작업을 설명하고, 내 표현에 대한 이론적 바탕을 글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붓으로도. 펜으로도.
그렇게 지은 이름이 '나자카(Najaka)'다. '나는 작가다'를 줄인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세 글자 안에는 61여 년을 살아온 내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60년을 살아오며 쌓은 이야기들이 있다. 미술 교사로서 아이들과 함께한 순간들, 캔버스에 담지 못한 감정들, 일상 속 소소한 아름다움들. 어제 아침 산책길에서 마주친 참새의 눈빛, 커피잔에 비친 창밖 가로수의 그림자, 지하철에서 본 할머니의 주름진 손등까지. 그동안 그림으로만 표현했던 것들을 A4라는 캔버스 위에 '글'이라는 붓으로 그려내려 한다.
사실 내 글쓰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그림 그릴 때처럼 자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플루트, 첼로, 가야금도 50세가 넘어서 시작했고, 한국무용은 예순이 다 되어서 배우기 시작했다. 늦은 시작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 아침에도 화분에 물을 주면서 생각했다. 꽃도 제철에 피어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늦게 피어도 꽃은 꽃이고, 나도 마찬가지다. 늦은 나이지만 지금이라도 글을 쓰고 다듬어서 작가로 거듭나 보려 한다.
앞으로 이곳에서 나눌 이야기들이 많다. 그린 그림 한 점에 담긴 사연, 한국무용 연습하며 언니들과 나눈 이야기, 여행 중 만난 풍경과 사람들, 소소하지만 잊기 싫은 일상의 순간들. 그리고 언젠가 손주가 생겨 "할머니는 뭐 하는 사람이야?"라고 물을 때, 당당히 "작가야"라고 답하고 싶은 소망까지.
때로는 그림으로, 때로는 글로. 캔버스에서 느낀 감동과 단어로 담는 감정이 서로 다른 색으로 교차하며, 나의 하루하루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것이다.
오늘부터 나는 '나자카'다.
붓으로도, 펜으로도 세상을 그려낼 것이다.
61여 년을 살아온 이 손으로.
그리고 이제, 내 인생의 두 번째 막, 그 막이 천천히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