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폭력의 계절, 2017년 여름에서 겨울까지

-문재인 정권 시절 KBS가 내게 남긴 상흔-

by 나신하

광기와 폭력의 혁명, 2017년 여름에서 겨울까지


도쿄 특파원 재임 중반기에 접어든 2017년 여름에서 겨울까지는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념과 가치관은 물론 인간에 대한 신뢰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러한 혼돈의 시간이 또 있었을까?

2016년 여름부터 나는 공영방송의 일본 도쿄지국에서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서툰 일본어, 내겐 무능하고 게을러 보이는 지국장, 그리고 본사의 퇴행적 지휘 체제라는 삼중고 속에서 하루하루가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래도 선택받은 소수라는 자부심과 새로운 취재 경험을 쌓는다는 성취감으로 버텨나갔다. 2017년 여름, 취재보다 다른 일에 관심이 많았던 지국장이 귀국하자 얼떨결에 지국장이 됐다. 언어와 업무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나를 괴롭히던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됐지만 본사의 퇴행적 지배 구조는 그대로였다. 그래도 그럭저럭 인내심을 다져가며 나름 업무에 성과를 높여가고 있을 때, 본사에서 혁명 아닌 혁명이 일어났다. 전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쫓겨나고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기 무섭게,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고대영 사장 축출 투쟁이 시작됐다. 박근혜 체제에서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책임을 사장에게 물은 것이다. 나는 어차피 정권이 바뀐 상황이고 사장이 과거처럼 독주하지 못할 것이므로 축출보다는 연착륙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바로 ‘적폐적인 발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직원들은 속된 말로 이미 눈이 뒤집힌 상황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사장 축출 투쟁이 시작되는 비극의 반복이었다. 기자협회, 피디협회, 노조, 그리고 한직을 맴돌던 소위 반체제 인물들이 앞장서는 모양새였다. 사장과 불화하면서 한직을 맴돌던 인물들은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만, 사장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승승장구했던 간부들이 정권이 바뀌기 무섭게 앞장서서 사장에게 돌을 던지는 상황은 희극이자 비극이었다. 사측과 불화하던 내게 “나대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충고하던 간부들이 앞다퉈 언론 민주 투사를 자처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괴기스럽고 공포스러웠다.

사장 퇴진 투쟁은 중국 문화혁명을 연상시킬 만큼 극렬하게 전개됐다. 언어폭력은 일상화됐고 직원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의 이름으로 사장을 비난하는 게시글을 앞다퉈 올렸다. 가담하지 않는 직원들은 적폐 세력 취급을 받았다. 마치, 중세 일본에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횡행했다는 ‘십자가 밟기’의 재현 같은 공포 분위기였다. 노조 설립 이래 해외 특파원과 간부들은 파업 국면에서 예외였고 그것을 탓하는 이들도 드물었다.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협회가 주도하는 제작 거부와 언론노조 산하 노조가 주도하는 파업이 병행됐다. 잇따른 성명과 집회 속에 사장의 조직 장악력은 급속히 무너졌다.

간부들에게는 조합원으로서 파업 의무가 없지만, 조합원과 협회원들은 간부들의 보직 사퇴와 제작 거부를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자리를 지키는 간부와 주요 보직자들의 실명을 명시해 비난하는 공개 성명이 잇따랐다. 초기의 설득은 “나중에 그냥 두지 않겠다.”는 투의 협박으로 변질됐다. 관행상 노사 분규에서 거리를 둬온 특파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는 공개 협박이 이어졌고, 그 협박은 나중에 실제로 현실화됐다.

그러나 협박에 굴복하기에는 특파원의 자리가 너무 무거웠다. 특파원 한 명 한 명은 각 파견국에서 한국 언론을 대표하는 일종의 기관과 다름없었다. 특파원의 파업은 사실상 기관의 폐쇄나 다름없이 중대한 문제였다. 지국에 소속된 현지 계약직원들의 생계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과거 모든 노조나 집단이 특파원의 파업 참여를 형식적으로 요구했지만, 이를 강요하면서 보복을 말하거나 협박을 가하지 않았다. 사장의 경영 방식이나 보도본부의 지휘체계에 불만이 많았지만 해외 지국을 폐쇄한다는 것은 내 신앙적 양심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겐 퇴로가 없었다. 기껏 찾아낸 해법은 휘하의 특파원 기자 두 명이 욕받이가 되지 않도록 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특파원들에게 지국장인 내 이름으로 기사를 송출하라고 지시했다. 내 이름으로 하루 수십 개의 외신 기사가 송출되는 희비극이 벌어졌다. 파업 국면에서 자리를 지킨 대가로 지국장 앞으로 적지 않은 연말 회식비가 배정됐지만 나는 그냥 반납했다.

사장 퇴진 투쟁은 집회, 시위, 파업, 성명에 그치지 않았다. 사장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퇴진을 요구했고 공식 회의장에 진입해 망신을 주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고 사장은 나를 믿지 못했던 것 같다. 업무상 일본을 방문하면서도 내게는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일본은 넓지만, 소식통은 빨랐다. 사장의 움직임은 아주 짧은 시차를 두고 포착됐다. NHK를 방문할 때는 수십 미터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모른 척했다. 한국의 파업 주동자들로부터 사장의 움직임을 파악해 달라는 요청이 왔지만 모두 무시했다. 나는 그렇게 양쪽 모두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파업을 아무리 세게 오래 한다고 해도 사장이 버티면 현실적으로 쫓아낼 방법이 없다. 강도 높은 파업은 사실상 사장 임면권을 쥔 정권을 향해 보내는 신호였다. 어서 빨리 법적 절차를 밟아 사장을 해임하라는 압력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못 이기는 척 해임 절차를 밟았다. 결국 고대영 사장은 불명예 퇴진했다. 임기가 끝난 뒤 한참 뒤에야 대법원에서 해임 무효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어차피 사장을 몰아내는 것이 목표였기에 대법 판결을 중요하지 않았다. 10년 전 정연주 당시 사장을 불법 해임할 때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사장이 쫓겨나고 후임 사장 임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0년 전 정연주 사장 해임 반대 투쟁 당시 구심점 중 한 명이었던 양승동 피디가 사장이 됐다. 경영진과 보직 간부, 프로그램 진행자와 주요 보직자들이 일사천리로 교체됐다. 파업에 가담하지 않았던 황상무 기자는 9시 뉴스 앵커에서 불명예 퇴진했다. 그냥 조용히 교체하면 됐을 터인데, 파업 주도 세력은 공개 비난 성명으로 모욕을 주고 쫓아내는 모양새를 택했다. 황상무 기자는 후배들의 무시와 모욕을 받으며 한직 중 한직을 맴돌았다. 원래 보수적인 성향이었지만 상대적으로 합리적이었고 후배들과 소통에 노력한 인물이었는데, 그 이후로 극보수 전투적으로 인성이 변했다. 훗날 보수 정치세력에 투신해 윤석열 정권 탄생에 가담했고 대통령실 수석비서관까지 지냈다.

고대영 사장 퇴진에 앞장선, 소위 혁명의 개국공신들이 사장부터 핵심 간부, 대표 프로그램 앵커, 선망의 출입처, 특파원 등 주요 보직 대부분을 장악했다. 나를 진보 운동권의 핵심 세력으로 오해한 직원들은 내가 주요 보직으로 승승장구할 것이라며 덕담 아닌 덕담을 했다. 그러나, 회사 업무보다 노조, 협회, 단체 따위 활동으로 소일하는 무리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나는 내 앞길이 그리 평탄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문재인 정권에서 사내 권력을 장악한 무리의 인격과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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