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쥐가 나는 도교 도심 임대료
월세가 기본인 일본의 부동산 임대차 관행은 흥미롭다. 한편으로는 합리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까다롭다. 한국인이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2016년 5월 한복판, 나는 일본 도쿄 한복판에 있었다. 특파원 체류 3년 동안 머물 집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입국 이튿날 첫새벽 3시쯤 잠에서 깼다. 벽에 걸린 벚꽃 사진 위로 빛줄기가 그어졌다. 커튼 바깥의 세상은 벌써 환했다. 같은 시간대이지만 도쿄는 서울에서 한참 동쪽에 있다. 한 시간가량 일찍 새벽이 왔다. 시차는 없는데 시차가 느껴지고,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맑아졌다. 동향집을 구하면 하루의 시작이 빨라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외국인이 일본에서 부동산 계약을 체결하기는 쉽지 않았다. 잃어버린 10년이니 20년이니 해서 부동산값이 대폭락 했지만 실제로는 지역별로 편차가 컸다. 대도시 한복판, 전통적 부촌, 학군 좋은 동네 등은 경기와 상관없이 집값도 비싸고 임대료도 비쌌다. 대신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임대료가 일정 비율씩 내려갔다. 역세권은 비싸고 교통이 불편한 곳은 싸는 점, 값싸고 좋은 집은 없다는 점, 발품을 많이 팔수록 가성비 좋은 집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한국과 비슷했다. 일본어와 일본 상황에 능통하지 않으면 믿을 수 있는 대리인을 찾는 편이 좋다.
내가 선정한 주택 중개인은 외국 주재원에게 주택을 소개한 경험이 많은 한국 교민이었다.
일본어도 능통하고 부동산 관련 법규는 물론 거래 관행에도 능통했다. 중개인은 사전 논의를 거쳐 도심의 맨션 몇 곳을 추천했다. 한국의 아파트에 해당하는 주거 형태를 일본에서는 맨션이라고 불렀다. 대개 중산층 이상의 재정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거주했다. 일본에서 아파트라고 하면 대개 중저가 서민용 저층 연립주택을 뜻했다. 맨션은 상대적으로 비쌌고 아파트는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네 곳을 방문한 뒤 주상복합 고층 맨션 한 곳을 낙점했다. 특파원 지국 사무실까지 차량으로 10분 남짓, 버스로 20분 남짓,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5분이라는 지리적 이점이 컸다. 도쿄도청이 몇 분 거리에 있는, 도심 중 도심이었고 주변에 대형마트와 상점과 식당, 그리고 넓은 공원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입지가 좋았지만, 실내는 좁았다. 침실 하나, 거실 겸 주방, 건식 화장실, 욕실 등을 갖췄는데, 한국식으로는 ‘1.5 룸’ 느낌이었다. 강력한 내진 설계 때문인지 굵은 기둥과 보가 공간을 많이 차지했다. 서류상 전용면적이 15평가량인데 체감으로는 12평 정도로 좁게 느껴졌다. 대신 체육관 등 편의시설이 다양하고 로비 등 공용공간이 넓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맑은 날이면 100km 거리의 후지산이 보였다.
입주를 원한다고 한국에서처럼 바로 계약서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부동산 회사에서 2∼3주 동안 자체적인 심사를 거쳐 계약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부동산 회사가 브랜드 관리와 임대료 수수의 안전성 확보 차원에서 아무나 입주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은 많다고 해도 직업이 모호한 졸부들은 입주가 어렵다고 했다. 일본인의 경우 공신력 있는 사업체 직원이거나 전문직 종사자 등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입주할 수 있지만, 외국인의 경우 자격 기준이 훨씬 까다롭다고 했다. 대형 기업체 또는 유명 언론사의 현지 주재원 정도는 돼야 안심할 수 있다고 했다. 해당 맨션은 회사 경영진이나 사업가, 외국인 주재원 등이 많이 거주했다. 도쿄 주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나중에 택시 기사에게 맨션 이름을 댔을 때 눈빛이 달라졌다.
일본의 건물주들은 외국인과 계약을 꺼리는 경향이 많았다. 특히 한국, 일본, 동남아 등 동양권 외국인에게 상대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분위기였다. 제국주의 일본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인들의 민족 차별 감정 탓도 있고, 외국인은 보증금을 다 까먹고 야반도주하기 쉽다는 선입견이 뿌리 깊은 탓도 있다. 실제로 특정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임대료 체납으로 보증금을 다 까먹고 몇 달을 버티다가 쓰레기만 잔뜩 쌓아두고 도망갔다는 소문을 몇 차례 듣기는 했다. 나이 지긋한 개인 건물주는 반한 정서로 똘똘 뭉친 사람이 종종 있었기에 계약 성사 단계에서 틀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공신력 있는 부동산 회사는 자체 규정대로 평가할 뿐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부동산 회사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는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다. 2주가 흐른 뒤 부동산 중개인이 주간지 두께의 계약서를 갖고 왔다. 계약서에는 임대임과 임차인의 권리와 의무가 아주 세세하게 명시돼 있었다. 사회 통념과 관행으로 처리하면 될 법한 일까지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양측이 생각하는 통념과 관행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고, 분쟁이 생길 때마다 법적 절차를 밟는 것도 낭비가 크기 때문에, 번거롭더라도 최대한 자세하게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한국 기준으로는 번거로운 일이지만 일본 관행으로는 합리적인 일이었다. 중개인이 임대인과 임차인, 양측을 오가며 계약서에 서명하면 계약이 완료되는 방식이었다. 자세한 시설 안내를 받고 이사 절차를 확인하는 것으로 일본의 주거지 마련은 무탈하게 끝났다.
일본에서는 보통 월세 두세 달 치의 보증금과 한 달 치의 사례비를 요구했다. 보증금은 계약 기간이 끝나고 돌려받지만, 사례비는 집주인에게 그냥 주는 돈이었다. 보증금은 내 돈으로 내고 내가 돌려받는 것이었고, 사례비와 월세는 내 돈으로 먼저 내고 나중에 회사가 정산해 주는 방식이었다. 맨션을 임대한 곳은 거대 부동산 회사였는데, 다행히 별도의 사례비는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 석 달 임대료에 해당하는 목돈을 한꺼번에 마련해야 했다. 천만 원을 훌쩍 넘기는 돈은 신용 대출로 조달했다.
내가 비싸고 좁은 도심 맨션을 얻은 이유는 출근 시간이 최대한 짧고 지하철역이 가까이 있고 생활 편의시설과 녹지가 근접한 곳에 우선순위를 뒀기 때문이다. 쉰 살이 다 되어 아내와 단출하게 떠나는 길이기에 구태여 넓은 집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한국에서 놀러 올 지인들이 내 집에 머물 빌미를 아예 없애고 싶었다. 설마 그런 일까지 있을까 싶지만, ‘설마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해외에 살고 있는 지인 집에 공짜로 머물며 여행안내 역할까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진상들이 꽤 있다는 얘기를 여러 경로로 많이 들었던 터였다. 회사 고위층이나 소위 고급 취재원 따위가 여름휴가를 나오면 먹고 자는 것을 기본으로 무상 제공하고 운전사와 여행∙안내인 노릇에 더해 선물 보따리까지 챙겨 주는 것이 관행이라는 엽기적 얘기까지 들었다. 나중에, 그와 비슷하게 처신하는 특파원이 있긴 있었다. 혜택 받는 해외 주재원이니까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암묵적 압박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갑질 감수를 요구하는 악습이었다.
특파원 상당수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고급 주택가에서 널찍한 단독주택을 얻었다. 특파원 사무실에서 꽤 먼 거리인데도 외국인 전용의 고급 사립학교 인근에 값비싼 월세 집을 얻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학군과 부동산값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추가 부담을 불사하고 어떻게든 최고급 사립학교 인근을 고집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녀의 편입학 학교가 정해질 때까지 호텔을 전전하며 버티는 특파원도 있었다. 회사 일과 자녀 교육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셈이다. 회사는 자녀 한 명당 교육비로 1년에 약 2천만 원가량을 지원했는데, 자기 돈을 조금 보태면 최고급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1학년을 포함해 3년 이상 해외 체류를 하면 국내 대학에서 특례 입학 지원 자격을 얻었다. 청소년 자녀를 둔 기자들이 특파원 자리를 놓고 전쟁하듯 다투는 이유가 있었다. 자녀를 해외의 외국인 학교에 먼저 전학시킨 뒤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특파원으로 나가야 한다고 읍소하는 진상 기자도 있었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주거비는 많다면 많았고 적다면 적었다. 특파원이나 주재원들의 주거비 지원은 총액 지원 방식과 실비 지원 방식이 있었다. 전자는 규정상 지원 한도 금액을 매달 한꺼번에 지원해 각자 알아서 사용하는 방식인데, 저렴한 주택을 빌려 차액을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주거 여건이 상대적으로 덜 좋은 곳에 임대료가 저렴한 집을 얻은 뒤 남는 돈을 챙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후자는 지원 한도 내에서 실제 임대료 영수증을 제출하면 해당 금액만큼 사후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KBS는 전자에서 후자로 바뀌었다고 했다. 작정하고 이중 계약서를 쓰지 않는 한 가욋돈을 챙길 수 없는 구조였는데, 이런저런 안 좋은 소문이 돌기는 했다.
나처럼 지원 금액에 맞춰 살면 문제가 없을 터인데 일부 특파원들은 회사가 지원하는 주거비에 자기 돈을 보태 학군 좋은 부자 동네에서 넓은 집을 얻기도 했다. 아무개 아무개는 이중 계약서로 적지 않은 돈을 챙겼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집에 목매는 부류의 공통점은 회사 업무는 건성건성 대충 하고 자녀 유학에 몰입한다는 것이다. 동료 특파원에게 민폐가 아니라면 거짓말이었다. 일보다 가정사에 진심인 동료 특파원 때문에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는 경험담은 드물지 않았다.
집 계약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기도했다. 함께 일하는 특파원들이 제발 상식에 맞는 인간이기를. 그 기도는 훗날 반만 이뤄졌다. 최선의 기자와 최악의 기자가 동시에 존재했다. 마치 '양념 반 후라이드반'처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특파원 생활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