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는 마음은 조절할 수 있는 걸까요?

제3장 가치관 편

by 겨울나무

안녕하세요. 오늘의 주제는 '혐오'입니다.


혐오는 왜 생기고, 어떻게 반복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혐오라는 감정은 생각보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곳에서 출발합니다. 누군가에게 '편견'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주고 밖으로 밀어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 순간 세상은 아주 쉽게 내 편과 적, 두 갈래로 나뉩니다.




아무런 표지판도, 울타리도 없는 텅 빈 우주에 덩그러니 놓인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입니다.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우리는 기꺼이 편을 가르고 혐오라는 울타리 안에 숨어 소속감을 느낍니다. 불편하고 애매한 것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대신, 문을 닫고 비난을 쏟아내는 회피를 선택하는 것이죠. 혐오가 어느새 저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겁니다.


저 역시 그렇게 혐오를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 외모를 향한 날 선 말들에 수없이 찔리면서, 저는 살기 위해 예민해져야만 했습니다. 저를 지키겠다는 명목 아래 높게 벽을 치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먼저 칼을 휘둘렀죠. 하지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정당한 방어라고 믿었던 그 칼끝은, 어느 순간 복수처럼 제게 되돌아왔습니다. 저는 그저 저를 지켰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 피를 흘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제야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찌른 사람들이 쏘아 올리는 원망으로부터 저를 보호하고, 이 지독한 상처와 복수의 굴레를 끊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민하고 상처받은 사람일수록 방어벽은 높고 칼날은 날카롭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정의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저울과 같은 마음의 중심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저를 아프게 했을 때, 무작정 칼을 빼들기 전에 먼저 저울에 달아보는 것이죠. 이것이 악의인지 단순한 실수인지, 저도 누군가에게 이런 적은 없었는지, 한 번쯤 되묻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려운 것'을 '싫은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는 겁니다. 저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억지로 저를 이해시킬 필요도, 너무 싫은 사람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아, 저 사람은 내가 싫은 게 아니라 나를 어려워하는구나', '내가 저 사람을 겁내는 건 싫어서가 아니라 낯설고 어려워서 구나'라고 인정하면 됩니다.


그 낯설고 어려움은 아주 사소한 다름에서 옵니다. 딸기를 어디까지 먹는지, 피자 꼬투리를 먹는지 버리는지, 남은 치킨을 다음 날 데워 먹는지 바로 버리는지. 그 순간에는 나와 다른 그들의 방식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듯 갑갑해지곤 합니다. 그저 농약을 피하거나 위생을 지키려는, 각자만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뿐인데도 말이죠.


머리로는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지만, 마음은 참 쉽지가 않습니다. 무심결에 '이상하다, 거슬린다' 생각하며 "대체 왜 저러는 거야?" 하고 궁금증으로 위장한 혐오의 물음표를 던지곤 하니까요.


혐오는 저를 보호하고 제 편을 만들어준다는 착각을 심어줍니다. 하지만 그 거짓된 울타리는 결국 저를 고립시키고, 제가 그토록 미워했던 방식 그대로 또 다른 누군가를 찌르게 만듭니다. 제가 싫어했던 바로 그 사람과 똑같아지지 않기 위해, 저는 오늘도 말보다 조용하고 더딘 판단으로 마음의 중심을 잡아보려 애씁니다.





퇴근하고 부랴부랴 글을 써봅니다. 요즘은 신나기보다 차분한 톤으로 글을 쓰게 되네요. 가끔은 용서보다 이해가 쉽더라고요. 저는 싫어하는 마음이 저 스스로를 삼킬 만큼 거칠어져요. 그래서 늘 이 풍선이 부풀어 올라 터지지 전에 미세한 구멍을 만들어 바람을 빼는 작업을 합니다. 오늘은 많이 늦어졌네요. 안녕히 주무세요~~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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