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떡볶이

나의 빨간 맛

by 은조

매운맛은 떫은맛과 함께 일종의 통각으로 분류되며, 우리가 아는 기본적인 네 가지 맛(단맛, 신맛, 짠맛, 쓴맛)에 속하지 않는다. 우마미(umami), 감칠맛이라는 ‘제5의 맛’ 학설도 생겨났지만, 안타깝게도 매운맛에게 그 이상의 자리는 없는 듯하다.


수많은 음식들이 ‘매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새롭게 태어난다. 나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항상 매운맛을 갈구하고, 주전자 물 끓듯 치솟는 도전의식으로 점철된 식사시간을 보내곤 한다. 순한 맛과 보통맛이 의미 없는 선택지에 불과한 건 당연지사. 물론, 우물 안 개구리겠지만, 아는 사람을 통틀어 매운맛을 가장, 그것도 아주 잘 즐겨 먹는다. 그렇다 보니 친구들은


“이 정도면 병이야. 병원에 가보자.” 우스갯소리를 덧붙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종종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먹을 때마다 버릇처럼 말한다.

칠판을 보며 혀의 지도를 배우던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뜻밖의 사실인 것처럼.


“매운맛은 맛이 아니래. 통증이래.”


그렇지만, 통증(痛症)은 말 그대로 몸에 아픔을 느끼는 증세인데, 매운맛을 본다고 혀가 아프기나 한 건지는 모르겠다. 살면서 혀 깨무는 실수를 안 해본 것도 아닌데, 피맛 나는 아픔과는 확연히 다르니까.

결혼하기 전, 엄마가 꽈리고추볶음을 해주셨을 때의 일이다. 간장 양념이 너무 맛있는 나머지 모자란 밥에 꽈리고추를 비벼 먹다시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속이 쓰리다 못해 아프기 시작했다. 혀는 멀쩡했지만, 위는 괴로웠다. 맵 부심을 부리다 며칠을 속앓이를 했는지 모른다.

우리 몸에는 혀의 통증을 느끼게 하는 수용체가 있다는데, 그렇다면 분명 나의 수용체는 뇌의 신경을 찌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게 아닐까?




식습관은 후천적인 환경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맵 부심도 그중에 하나다. 생물학적 요인도 내 몸 어딘가 있을 테지만, 우리 집 식탁에 있는 음식들은 전부 빨간색인 경우가 많았다. 매운맛의 시작은 분명 김치였겠지만, 그에 대한 집착은 떡볶이부터 시작됐다. 그렇기에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떡볶이다.


결혼식을 위해 다이어트를 시작했을 때, 가장 나를 힘들게 만든 것도 떡볶이였다. 다른 어떤 음식에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떡볶이만은 달랐다. 로제 떡볶이가 한창 유행을 타기 시작할 때였는데,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배달 앱을 잠시 눌렀다가 스스로를 원망하며 곧장 앱을 삭제하기도 했다. 다이어트용 떡볶이로 곤약 떡볶이를 먹어보라며 추천을 받기도 했지만, 차마 손댈 수 없었다. 분명 처음 한 번으로 끝나지 못했을 테니까.


떡볶이는 다이어트 최대의 적!


흔히 고춧가루에 비해 고추장으로 요리를 하면 텁텁하다고 하지만, 고추장 맛이 일상인 우리 집은 떡볶이를 조리하는 경우에도 고추장과 설탕 아니면 물엿이 베이스였다.

맛있음이 텁텁함을 우선하면 된다. 그러면 그뿐이었다.


늘 맞벌이 부부였던 부모님을 대신해 외할머니가 나와 동생을 자주 돌봐주셨다. 한때 같이 살기도 했던 외할머니는 우리를 참 예뻐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외할머니는 90세에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자식들을 위해 요리를 하시는데, 변함없이 늘 내 몫은 따로 챙겨놓으신다. 가족들이 외할머니를 염려하는 마음에 하지 마시라고 해도 항상 하시는 말씀이,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게 더 아파.”


외할머니는 음식을 만들어주시고 나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게 전부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사랑이라는 걸 안다. 늘 그렇듯 외할머니 손끝에 닿은 음식들은 뭉클한 맛이 난다.


학교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면 외할머니는 현관문 앞에서 우리를 반겨주셨다. 교복 셔츠가 더러워지지 않았는지, 배고프지 않은지 물어보시고는 늘 부엌으로 가 먹을거리를 준비하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자주 먹었던 것도 단연 떡볶이였다.

할머니 떡볶이의 특징은 가래떡이 아닌 떡국용 떡으로 만든 떡볶이였다. 다른 재료도 없었다. 물엿의 찐득함이 떡과 더해져 더욱 쫄깃한 맛을 냈고, 외할머니가 손수 만드신 깊고 진한 고추장은 감칠맛 나는 떡볶이 양념을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똑같은 떡이었지만 외할머니의 떡볶이는 왠지 모르게 더 특별해 보였다. 다른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떡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선호하는 떡볶이는 오롯이 떡만 들어있는 떡볶이다. 기본 토핑으로 허용할 수 있는 건 어묵 몇 조각이 전부다.


물론, 냄비 채로 보글보글 끓여먹고 싶은 분위기가 생기는 날이면, 그날만은 즉석 떡볶이다. 양파와 양배추를 가득 썰어 넣고, 라면사리, 삶은 계란, 심지어 야끼만두도 준비한다.

제일 먼저 남편은 국물을 흠뻑 머금고 촉촉해진 야끼만두를 가져가고, 나는 보호막이라도 두른 것 같은 반들반들한 삶은 계란을 가져온다. 포크로 흰자를 가르고, 뽀얀 노른자를 날계란도 아닌데 조심스럽게 꺼내다가 걸쭉해진 떡볶이 국물에 단숨에 으깨버린다. 떡볶이 국물에 버무린 노른자는 별미 중에 별미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부끄러운 얘기일 수도 있지만, 아직 시중에 나온 떡볶이 브랜드를 모두 섭렵한 것은 아니다. 굳이 핑계 아닌 핑계를 대자면, 배달로 주문하는 프랜차이즈 떡볶이들은 (말이 안 되는 말이지만) 분식이라기보다 요리에 가깝다.

떡볶이의 품격이 올라가는 건 떡볶이를 애정 하는 사람으로서 응원한다만 친근한 맛에 비해 2~3만 원을 넘나드는 가격을 보면 만족감이 사그라들기도 한다.


어찌 됐든, 세상에 모든 떡볶이는 사랑이고,

떡볶이는 영원히 맛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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