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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영 Oct 01. 2023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의 이별

삶은 갈등의 연속이기에 상대가 있는 갈등에서는 서로를 이해하면서 대화하며 양보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상대방의 견해나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면서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상충하는 의견을 조율하며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때로는 서로의 의견이 합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한쪽이 포기하거나 다른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서로의 문제를 양해하고 대화와 조율, 타협을 해나가는 과정도 중요하다. 이 모든 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인간관계를 쌓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여기까지 정리한 내용이 우리가 타인과의 갈등 시 찾을 수 있는 지극히 모범적인 답안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갈등의 대상이 타인이 아닌 본인일 때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 답안이 소용없음을 느낀다.           

우선 감정적인 혼란이 먼저 앞선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쉽게 떨쳐버리기 어럽다. 더구나 그것 자체가 나의 존재 이유라 생각하는 일에서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유를 발휘하기가 너무 고통스럽기도 하다.           

난 수업하는 교사이다. 그러기에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많은 아이들과 만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 앞에 선 나의 모습에 확신이 없어지고 있다. 젊은 시절 아무렇지 않게 소통되었던 행동과 표현들이 뻗어나가지 못하고 어딘가 꽉 막힘 느낌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어떤 표현을 함에 있어서는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것은 석연치 않은 반응뿐이다. 이럴 때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내 내면에서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만 밀려올라 온다. 수업 내용의 경우 교수법의 문제일까 싶어 매번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벽에 부딪힐 때가 많다.           

투덜거리며 빠르게 변화되는 사회 탓도 해보고, 해서는 안 되는 줄도 알지만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 탓도 해본다. 하지만 결국 다 핑곗거리 찾기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알고 있기에 더 답답함이 밀려온다.             

문제는 분명 나에게 있다. 더구나 내가 옳다고 믿어 온 것에 대한 흔들림인 것이기에 힘들다. 결국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의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학생이란? 교사란? 수업이란? 이름으로 정의해 왔던 신념들을 내려놓고 새롭게 진지한 재 정의를 해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얼마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행 평가 관련 민원이었다.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 없이 다짜고짜 화내시는 성품은 차치하더라도 평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모습에서 과연 평가는 누구를 위한 평가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 부모와 아이에게 공정한 평가란 과연 무엇일까? 자기가 얻게 될 배려는 곧 다른 이에게는 불공평임을 알고 있는 것인가? 구구한 설명과 설득이 뒤따른 뒤 민원은 해결되었지만, 학교가 아이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인 지식만은 아닐 것인데 하는 답답함만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런 경우 그래도 대상이 있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확신이 있기에 흔들림 없이 대응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 앞에서 난 무장해제 됨을 느꼈다.          

나의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이다’고 생각한 공정과 정의라는 화두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라는 관점의 차이로 얼마든지 다시 생각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만의 틀에 얽매인 것일까?           

최근에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쳇 GPT가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통해 써 온 과제를 평가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무엇이 진짜인가를 묻기에 앞서 효율적으로 프로그램 사용하는 것이 잘못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흔히 글이란 고도의 사색 과정을 거친 표현 수단이라 생각해 온 틀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잘 활용 못하는 사람은 꼰대가 되어가는 현실에서 내가 추구해 온 기준이 흔들리는 것이다.          

주제와 키워드 입력만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를 작성해 내는 결과물 앞에서 그것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것은 옹색해진 자기 합리화일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다.          

창작물이란 가장 개인의 창의적인 영역이어야 한다는 나의 기준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하면서 무엇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의 의미가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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