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30
페북을 하다 한 기독교 뉴스에서 반려동물 축복식을 하는 교회를 소개하며 동물권과 종차별주의등을 기사화 한 게시물을 보았다. 댓글에 동물 축복 예배에서 그칠것이 아니라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댓글을 달았는데, 왜 교회가 비거니즘을 실천해야 하냐, 식물도 생명인데, 다른 생명을 섭취하면서 살수밖에 없는데 왜 식물은 배제해야 하는가 하는 등의 질문을 받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두서없이 댓글을 달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비건으로 살면서 원죄는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여야만 하는 것. 내가 하루 더 산다는 것은 하루 더 죄악을 더한다는 의미라고. 자이니교는 채식을 교리로 삼고 있는데, 그들은 감자, 당근같은 뿌리식물도 먹지 않는다. 비단 비인간 동물 뿐 아니라 식물의 생명 또한 해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걸을때도 작은 곤충들을 밟지 않기 위해 비질을 하며 걷는다고 하는데, 생명을 향한 그들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나 역시 같은 고민을 했다. 하루는 음식물 쓰레기에서 날파리들이 생겼는데,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쉽게 다 죽일수 있지만 그들 또한 생명인데 내가 비건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큰 동물들은 소중히 여기면서 이런 작은 생명은 천시할 수 있는가. 결국 나는 그들이 자연 소멸하길 기다리며 몇줄을 보냈다. 지금도 집에 벌레들이 들어오면 잘 잡아다 밖에 놔주고 있다(그냥 집에 놔두면 눈누 난나가 사냥 본능때문에 벌레들을 사냥해서 죽이기 때문이다). 막상 겨울에 밖에 놔두려니 고민이 또 되긴 하지만서도.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생명을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하루는 입을 벌리고 걷다가 나도 모르게 작은 날벌레가 입으로 들어와 죽은적이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누군가를 충분히 죽일수 있는 존재였다.
산다는 것이 원죄라는 말을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생명을 해할수 있는 힘, 권력이 있다는 것이 곧 죄라는 것이 아닐까. 어느날 나는 실수로 난나의 발을 밟은적이 있다. 난나가 크게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고, 다행이 다친건 아니었지만 그 비명은 아직 가슴속에서 나를 찌르고 있다. ‘네가 가진 힘, 그것이 다른 누군가를 상하게, 죽게 할수 있어.’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이 이해됐다. 내가 죄를 저지를 의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힘이 누군가를 상하게 할수 있다는 뜻이었다.
비건이어도 여기서 자유롭기 힘들다. 언젠가 블루베리 농장 얘기를 들었다. 블루베리를 키울때 가장 큰 해충 중 하나가 달팽이라더라. 요즘 시대에 농약을 함부로 칠 수도 없다보니 달팽이를 피해서 블루베리를 키우려면 손수 잡아서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 방식이, 달팽이가 생존력이 강하다보니, 손으로 달팽이 집까지 꾹 짓눌러 으깨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블루베리를 먹지 못하고 있다.
과연 블루베리 뿐일까. 내가 먹는 쌀, 밀, 야채, 과일등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어나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결국은 내가 죽어야한다는 결론에 다달았다. 아니면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되거나. 여기까지 얘기하면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하는데, 걱정마시라. 나는 여전히 살고 싶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죄인으로라도 말이다. 나의 욕구와 나의 깨달음 사이에 이만큼나 큰 괴리가, 모순이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나의 삶을 “모순을 견디는 삶”이라 명명했다. 죽어야 하지만 죽기 싫은 모순. 죄라고 생각하지만 그 죄를 계속해서 더해나가는 이 부조리함.
이런 생각을 나만 했을까. 문득 한강 작가를 떠올렸다. 그의 저작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영혜가 생각났다. 어느날 꿈을 꾸고는 자신이 가진 소름돋게 역겨운 폭력성을 마주하고 육식을 거부하던 영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결국 누군가의 죽음을 담보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나무가 되길 소망하며 섭식을 거부하면서 죽어간 영혜. 그의 심리가, 한강작가가 그 글을 쓰면서 느꼈을 그 마음을 가슴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그 어마무시한 폭력을 마주한 뒤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들었다. 그렇게 지내다 최근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면서 치료가 되었다고. 치료가 되었다는건 그가 이 모순을 극복해냈단 얘기처럼 들렸고, 그래서 나는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이는 어떤 생각으로 이 모순을 견딘걸까, 이 부조리함을 극복했을까 하는 마음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단숨에 읽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이 온전히 사랑에 관한 책이길 빈다고 적었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이 그를 치유했을까. 내 안에 내재되어있는 이 모순, 끔찍한 폭력성을 치료하는 것은 사랑인가. 나의 비거니즘의 동기가 사랑에서 나온걸까. 여전히 나는 혼란스럽다. 그것이, 해답이 사랑이라면, 그렇기에 예수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고 자기를 스스로 죽인걸까. 그 사랑의 끝은 다시 자기 파멸이 아닌가. 여전히 나는 혼란한 길을 가고 있다.
혼란한 정신만큼 혼란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