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지랄하네’
콩이를 강아지 유모차에 태우고 사거리에서 남편과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들으라는 듯이 제법 큰 소리로 우리를 향해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우리도 강아지를 키우지 않았다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콩이를 키우기 전에는 강아지를 껴안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며 피해 다녔었다. ‘아이고 지저분해라.’
콩이가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남산으로 산책을 갔다. 콩이는 짧은 다리로 우리를 열심히 따라다녔다. 조금 걸리고는 걱정이 되어 안고 가자 했더니 남편은 괜찮다고 계속 걸렸다. 콩이에게 무리였는지 저녁에 집에 오자 아파하면서 몸을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였다. 동물병원에 물어보니 조금 내버려 두고 지켜보라 하였다. 일주일쯤 지나자 원래 컨디션을 회복했다.
그제야 페키니즈종에 대해 알아보니 신체적으로 가장 취약한 견종이었다. 몸통은 굵고, 허리는 길고, 다리는 짧고 오다리여서 허리나 다리가 약했다. 코는 납작하고 콧구멍이 작아 숨쉬기도 힘들었다. 더위에도 취약했다. 결국 오래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산책 나가서 응가하고, 소변보고, 냄새 조금 맡고 100m 남짓 걸으면 그게 끝이었다. 산책이라기보다는 그냥 바람만 쐬는 정도였다. 그날의 남산산책은 콩이에게 너무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개모차를 구입하였다.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심지어는 식용으로 기르는 동물들에게도 동물복지를 부르짖는 시대이다. 인간의 반려로 격상된 강아지들에게는 더욱 다양한 돌봄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개모차. 좀 이상하게 만들어진 단어다. 그러나 ‘강아지 유모차’라 하기에는 너무 길다. 그러면 ‘견모차(犬母車)’라 불러야 맞겠지만 뭔가 너무 심각하고 거창하게 느껴진다. 다들 가볍게 ‘개모차’라 부른다. 적당히 귀여운 느낌이 들면서 강아지에게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듯하다. ‘개모차’는 한글과 한자가 적당히 섞인 정체불명의 단어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럼 나도 그렇게 불러야지 뭐. 언어의 사회적 속성. 그냥 개모차는 개모차일 뿐이다.
이 아파트로 이사오니 집집마다 강아지를 키우고, 너도 나도 개모차를 끌고 나왔다. 대개는 노견이나 눈이 보이지 않는 개도 있었고, 더러는 과시욕을 드러내는 명품 개모차 부대도 있었다. 그 속에 묻혀 눈치 안 보고 개모차를 끌고 다녔다. 유모차 반, 개모차 반이었다. 콩이 개모차를 보고도 ‘깜짝이야. 아기가 아니네’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멀리서 보면 유모차인데 가까이 가면 개모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안에 아기 대신 강아지가 타고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국가의 존망을 걱정할 정도로 아기를 낳지 않으니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나중에는 유모차라는 단어 대신에 개모차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유모차냐 유아차냐로 페미니즘 논쟁이 붙은 요즈음 유모차라는 용어는 아주 사라질 모양이다.